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갈등을 정책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보수는 전통을 중시하고 진보는 개혁을 중시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양측의 차이는 정책보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진보는 보수를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진보보다 덜 진보적인 사람들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2003년 미국 UC 버클리 연구진은 정치심리학 분야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논문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Political Conservatism as Motivated Social Cognition」이었습니다.
이 논문은 정치적 보수주의를 단순한 정책 선호가 아니라 특정한 심리적 동기와 연결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연구진은 보수주의의 핵심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수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정치심리학 연구를 분석했습니다.
연구진은 12개국, 88개 표본, 약 2만 2천 명 이상의 데이터를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보수주의는 불확실성 회피, 모호성에 대한 불내성, 질서와 구조에 대한 욕구, 위협과 상실에 대한 민감성, 죽음에 대한 불안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반대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나 불확실성에 대한 수용은 보수주의와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연구진의 설명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안정감과 질서를 제공하는 심리적 적응 전략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 논문은 보수주의를 하나의 정치철학이라기보다 인간의 심리적 욕구와 동기의 결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논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사람마다 위협에 대한 민감성이 다르고, 그러한 차이가 정치적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에서 기회를 보는 사람도 있고 위험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정치적 성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연구는 보수주의를 이해하려고 한 것일까요? 아니면 보수주의를 설명 가능한 심리 현상으로 환원하려고 한 것일까요?
이러한 종류의 논문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주의를 독립적인 사상 체계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논문 속에서 보수주의는 마치 두려움, 위협 민감성, 모호성 회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같은 심리적 특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묘사됩니다. 물론 연구진은 보수주의를 병리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논문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보수주의는 설명해야 할 대상이지, 스스로 설명력을 가진 세계관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 전통의 대표적 사상가들은 보수주의를 두려움의 산물이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사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제도와 관습에는 개인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사회를 급격하게 재설계하려는 시도보다 점진적인 변화와 전통의 존중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단순히 변화가 무서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연구자들은 여기에 대해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 철학적 관점 자체가 결국 위협에 대한 민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논리적 정합성이나 심리적 기원 자체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연구자가 진보주의를 설명하면서 "진보주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심리적 성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설명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단순한 심리적 특성으로 환원하지 말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진보주의 역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독립적인 철학적 관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은 보수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보수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보수주의자가 왜 두려움을 느끼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주의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논문을 읽으며 느낀 것은 정치심리학의 상당수 연구가 바로 이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보수주의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연구하기보다는 심리적 특성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 결과 연구는 보수주의를 이해하기보다 보수주의를 진보적 심리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까워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가 발표된 곳이 UC 버클리라는 사실입니다.
버클리는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학문 공동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연구자의 정치적 성향만으로 연구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자가 속한 문화적 환경은 어떤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설명의 대상으로 삼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논문을 읽으며 단순히 "보수주의자는 왜 보수가 되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진보는 보수를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보수를 설명해야 할 심리적 (병적)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보수주의를 이해하는 문제를 넘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 Jost, J. T., Glaser, J., Kruglanski, A. W., & Sulloway, F. J. (2003). “Political Conservatism as Motivated Social Cognition.” Psychological Bulletin, 129(3), 339–375.
- UC Berkeley News. (2003). “Political Conservatism as Motivated Social Cognition.” 연구진의 88개 표본·12개국·22,818명 메타분석 결과를 소개한 대학 보도자료.
- Burke, E. (1790).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보수주의를 전통·제도·점진적 변화에 관한 독립적 정치철학으로 읽기 위한 고전.
- Hayek, F. A. (1960). The Constitution of Liber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인간 지식의 한계와 자생적 질서에 근거한 제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