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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는 정말 다르게 생각하는가: 버크와 페인으로 읽는 반박


최강욱의 가상 대화를 출발점으로, 버크와 페인을 통해 보수와 진보가 세상을 보는 차이를 반박하고 재해석한다.

버크와 페인의 토론을 형상화한 일러스트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는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시선은 전통과 혁신, 현실과 이상의 깊은 긴장을 보여줍니다.

아래의 문장은 최강욱의 책에서 발췌한 가상의 대화입니다. 흔히 이 대화는 보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진보는 원리를 본다는 식으로 읽히지만, 버크와 페인을 조금만 더 정확히 읽으면 그 해석은 너무 단순합니다. 이 글의 목적은 바로 그 단순화를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버크

페인 씨. 당신의 열정과 혁명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진 않아요. 프랑스혁명의 이상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지금 봐요. 프랑스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시작했는데 결국 공포정치로 끝나 가고 있잖아요. 혁명이 혼란과 파괴를 불러왔어요. 인간 사회는 역사의 지혜와 전통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걸 이렇게 무시해 버리면 뭐가 남을까요?

페인

어차피 무너져야 할 것들이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낡은 사슬을 끊어 내야지요. 당신이 사랑하는 ‘전통’은 이름뿐인 허울에 불과해요. 특권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거지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합니다. 부당한 억압은 없어지는 게 마땅하잖아요. 프랑스혁명의 실패는 혁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돌발 상황 때문이었어요.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곡이 될 겁니다.

버크

태어날 때부터의 평등이라….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지만 현실은 달라요. 누구라도 자기가 태어나는 국가, 공동체, 가문을 선택하지 못해요. 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평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폭력과 혼란이 발생하는지 페인 씨도 이미 보지 않았나요? 국왕 처형, 교회의 몰락, 거리의 무질서 같은 것들 말입니다. 혁명이 가져오는 건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폭군이에요.

페인

사람의 역할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니요? 봉건사회야말로 불공정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선생님이 혼돈과 테러를 보았던 프랑스에서 저는 자유를 보았습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어요.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저항하는 게 당연하지요.

버크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 가야 저항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프랑스혁명은 선을 한참 넘었습니다. 나는 영국의 명예혁명을 예로 들고 싶어요. 점진적인 변화가 혁명보다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길입니다. 조금씩 고치고, 쌓아 올리는 방법을 택하는 게 맞아요.

페인

영국의 명예혁명, 그건 그냥 귀족들끼리 권력을 나눠 먹은 ‘거래’지요. 프랑스혁명은 다릅니다.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혁명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진정한 정의는 기존의 질서를 깨야 따라오는 거니까요.

버크

정의라는 것도 질서와 함께 가야 지속될 수 있어요. 혁명은 쉽게 시작되었지만, 이제 끝을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당신이 말하는 자유가 무정부 상태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인간 본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아요. 그걸 전제하지 않는 사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페인

저는 당신의 두려움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성의 힘을 믿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지키게 하는 건, 본성이 아니라 이성의 힘이니까요.

버크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거예요. 그 대가가 너무 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페인

그렇죠. 역사가 가르쳐 줄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를 이제부터는 시민들이 씁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결국 버크와 페인이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페인은 먼저 원리에서 출발해 사회를 다시 설계하려 하고, 버크는 먼저 현실에서 출발해 그 설계가 낳을 결과를 따집니다. 이 차이는 보수와 진보의 본질을 고정하는 차이라기보다, 같은 인간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두 다른 태도에 가깝습니다.

버크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강조합니다. 사회는 복잡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며, 제도와 관습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기능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전통을 단순한 낡은 껍데기가 아니라, 여러 세대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축적한 경험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반대로 페인은 전통을 의심합니다.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으며, 모든 제도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는 기준 앞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먼저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에 맞게 사회를 바꾸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먼저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변화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쪽은 정의를 앞세우고, 다른 한쪽은 결과를 경계합니다. 그래서 둘 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보수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가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끝까지 묻는 태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쿤과 포퍼의 논쟁이 유용합니다. 포퍼는 과학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말했습니다. 반증 가능성이 없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핵심이었습니다. 반면 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과학은 이상적인 규범대로만 움직이지 않았고, 실제 연구자들은 기존 이론을 전제한 채 정상과학을 수행하다가 누적된 예외를 맞닥뜨릴 때 비로소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다시 말해 포퍼는 모델의 규범을 말했고, 쿤은 현실의 작동 방식을 말했습니다.

이 대비는 최강욱의 글을 읽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약 누군가 버크와 페인을 보며 "보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진보는 원리를 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한 도식일 수 있습니다. 쿤식으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실제 사람들은 어떤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는가, 그리고 그 원리는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가. 버크는 바로 그 현실의 결과를 묻는 쪽에 서 있고, 페인은 그 결과를 낳게 하는 원리를 먼저 세우는 쪽에 서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글은 최강욱의 식으로 단순화된 보수·진보 구분에 대한 반박이 됩니다. 버크는 단지 과거를 고집하는 보수가 아니라, 현실의 결과를 먼저 보는 사람이고, 페인은 단지 이상주의적인 진보가 아니라, 원리를 먼저 세우는 사람입니다. 둘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보수와 진보의 본질 차이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이 빠지면, 아무리 아름다운 이상도 독단주의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쿤과 포퍼의 대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떤 이론이 멋져 보이는가보다, 그 이론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내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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