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진보는 보수를 어떻게 보는가?


수원대 송희성 교수의 칼럼을 통해 본 진보 지식인들의 보수관. 대상에 대한 실제 관찰보다 이념적 모델을 앞세우는 규범주의적 시각의 한계와 반증 가능성의 중요성.

진보는 보수를 어떻게 보는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정책의 차이나 이해관계의 차이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보수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면, 단순한 정치적 입장 차이를 넘어 하나의 인식론적 특징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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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송희성 전 법률연구소장, 전 수원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이 기고한 칼럼을 읽어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사람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일반적으로 대학 교수나 법학자의 글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글은 보수를 설명하는 것처럼 시작하지만, 점차 보수를 평가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글의 앞부분에서 보수는 전통적 가치와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집단으로 설명됩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그런데 글이 진행될수록 보수는 기득권을 보호하는 세력으로 바뀌고, 적폐청산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바뀌며, 나중에는 실권 회복을 위해 개혁을 방해하는 정치세력으로 묘사됩니다. 결국 보수는 하나의 정치철학이나 인간관이 아니라, 개혁을 방해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로 정리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등장합니다.

과연 이것은 보수를 설명하는 글일까요, 아니면 보수를 평가하는 글일까요?

설명과 평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작업입니다. 설명은 상대방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평가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상대를 해석합니다. 이 글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게 보입니다. 현실의 보수주의자들이 실제로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탐구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보수는 결국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라는 결론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태도가 단순히 정치적 편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규범주의적 사고방식의 특징에 가깝습니다.

규범주의자는 먼저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의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지, 좋은 정치란 무엇인지, 바람직한 개혁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정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그 기준에 맞추어 평가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혁은 선이 되고, 개혁을 반대하는 것은 악이 되기 쉽습니다. 사회보장 확대는 진보가 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기득권 옹호가 됩니다. 결국 현실을 관찰하기보다 모델을 먼저 만들고, 사람들을 그 모델 속에 배치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과학철학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였습니다.

칼 포퍼는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습니다. 과학은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토마스 쿤은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실제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쿤은 과학이 이상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보다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과학자들을 관찰했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포퍼가 말한 이상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포퍼가 모델을 이야기했다면, 쿤은 현실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합니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보수가 무엇을 믿는지 관찰하기 전에, 보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의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보수주의자들을 그 정의에 맞추어 해석합니다. 그러나 정작 보수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버크는 오늘날 보수주의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버크는 자신을 기득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인간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제도와 전통에는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기능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한 이유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아름다운 원리가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주목했습니다.

좋은 원리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가?

정의로운 목적이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합리적인 존재인가?

버크가 던진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근데 송 교수의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개혁은 옳고,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는 잘못되었다는 전제가 반복됩니다. 물론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적 견해 자체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반증 가능성입니다.

어떤 현실이 나타나면 이 글의 주장은 틀렸다고 인정될 수 있을까요?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면 될까요?

경제가 악화되면 될까요?

국민이 선거를 통해 다른 선택을 하면 될까요?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기존의 해석을 수정할 수 있을까요?

만약 모든 결과를 "개혁은 옳았지만 보수가 방해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주장은 경험적 주장이 아니라 신념에 가까워집니다. 경험적 주장은 현실에 의해 수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현실도 기존 믿음을 흔들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결론이 정해진 주장입니다.

이 점에서 이 글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편향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증 가능성의 부재입니다. 어떤 사실이 나타나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주장은 현실에 의해 수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경험주의의 언어가 아니라 신념의 언어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강조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상대방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나 역시 틀렸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쿤은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보다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버크는 인간 사회가 이론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모두 현실을 모델보다 앞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반면 많은 정치적 글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현실을 관찰하기 전에 모델을 세우고,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분류하며, 설명하기 전에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방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 됩니다.

독단주의는 강한 신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이 어떤 현실 앞에서도 수정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시작됩니다.

보수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글들이 실제로는 보수를 재정의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보수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모델 속에 보수를 배치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경험주의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입니다. 현실보다 이론을 더 신뢰하는 순간, 이해는 멈추고 독단주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1. 송희성. 「보수와 진보의 차이, 그리고 상생의 길」. 『중부일보』.
  2. Burke, Edmund.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Edited by L. G. Mitchel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3. Kuhn, Thomas 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4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4. Mill, John Stuart. On Liberty. Edited by David Bromwich and George Kateb.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5. Popper, Karl R.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London: Routledge,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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