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 레이코프의 《Moral Politics》를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그는 보수주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보수주의를 독립적인 철학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보수주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보다 보수주의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기보다 "엄격한 아버지"라는 심리적 유형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Karen Stenner의 《The Authoritarian Dynamic》은 한 단계 진보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녀는 보수주의와 권위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책의 상당 부분은 보수주의와 권위주의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심리학 분야에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진전입니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보수주의와 권위주의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보수주의와 권위주의의 개념적 분리
스테너는 그 전통에서 한 발 물러섭니다. 그녀는 보수주의자가 반드시 권위주의자는 아니며, 권위주의 역시 단순히 우파 정치성향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권위주의의 핵심은 우파냐 좌파냐가 아니라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선호하는 심리적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사회가 지나치게 분열되고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될 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며 보다 강한 질서와 통일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입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완전한 다양성 속에서 살기 어렵습니다. 언어도 공유해야 하고, 법도 공유해야 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통일성에 대한 욕구 자체를 병리로 볼 수는 없습니다. 스테너는 적어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레이코프처럼 보수주의 자체를 하나의 심리적 유형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권위주의 패키지와 은폐된 보수주의 비판
그러나 바로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레이코프의 문제는 보수주의를 "엄격한 아버지"라는 심리적 유형으로 환원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스테너는 보수주의를 직접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신 권위주의라는 범주를 만들고 그 안에 여러 특성을 집어넣습니다. 문제는 그 특성들이 거의 모두 부정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권위주의자는 다양성을 싫어하고, 정치적 불관용을 보이며, 검열을 선호합니다. 또한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을 보이고, 강한 처벌을 선호하며, 자유민주주의적 다원주의를 불편해합니다. 이 모든 부정적인 특성들이 권위주의라는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물론 스테너는 이것을 보수주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자는 누구인가? 현대 미국 정치에서 권위주의자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책을 읽다 보면 그 답은 거의 분명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보수주의를 비판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보수 진영의 특정 집단이 권위주의 범주에 포함되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스테너의 연구가 가진 흥미로운 특징입니다. 그녀는 레이코프보다 훨씬 조심스럽지만, 이러한 프레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정교화된 심리 환원론의 함정
오히려 그녀의 설명은 레이코프보다 더 정교합니다. 레이코프가 "보수주의자는 엄격한 아버지다"라고 단순화하여 말한다면, 스테너는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권위주의자는 이런 특징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자의 특징은 대부분 현대 진보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보수 우파의 인간형과당당히 유사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진짜 질문은 "권위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사회에나 당연히 존재합니다. 진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권위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가?"
예를 들어 스테너는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선호하는 성향을 권위주의의 핵심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결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권위주의일까요? 공통의 문화와 규범을 유지하려는 욕구는 언제부터 권위주의가 되는 것일까요?
언어의 프레임: 사회적 신뢰인가, 다양성 거부인가
영국의 보수주의 전통을 생각해 봅시다.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를 유지하는 관습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마이클 오크숏 역시 공동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한 규범을 존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중시한 권위주의자들일까요? 아니면 공동체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현상을 설명하더라도 진보와 보수가 사용하는 언어의 프레임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는 공동체 규범을 '통일성'에 대한 강요로 볼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라고 부릅니다. 진보주의자는 전통을 '변화에 대한 저항'이나 '기득권 옹호'라고 부르지만,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역사적 경험의 축적'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진보주의자는 변화에 대한 조심성을 '불안'이나 '두려움'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신중함'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관찰하는 현상 자체는 같을 수 있으나, 그것을 해석하고 명명하는 방식은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립의 미명 뒤에 숨은 세계관
바로 이 점 때문에 스테너는 레이코프보다 훨씬 정교하지만 동시에 더 까다로운 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그녀는 보수주의를 직접 심리학으로 환원하지 않는 조심성을 보입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당연하게 전제한 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성향들을 권위주의라는 부정적인 범주 안에 배치합니다. 보수주의 입장에서도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얼핏 자신들에 대한 비평으로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수주의자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권위주의라는 프레임으로 치환하여 은밀하게 비판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이코프의 단순한 심리 환원론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레이코프는 보수주의 철학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스테너는 보수주의와 권위주의를 명확히 구분해 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는 설명의 기준인가, 아니면 설명되어야 할 하나의 세계관인가?"
만약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세계관에 불과하다면, 권위주의에 대한 스테너의 설명 역시 결코 완전한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없습니다. 결국 스테너의 책은 보수주의에 대한 가장 세련된 비판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얼마나 객관적인 위치에 놓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합니다. 레이코프가 보수주의를 투박하게 심리학으로 환원했다면, 스테너는 권위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훨씬 정교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설명 역시 결국은 특정한 정치철학적 전제 위에 서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Lakoff, George. Moral Politics: How Liberals and Conservatives Think. 3rd e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 Stenner, Karen. The Authoritarian Dynam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 Burke, Edmund.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Edited by J. C. D. Clark.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 Oakeshott, Michael. “On Being Conservative.” In Rationalism in Politics and Other Essays. Liberty Fund, 1991.
- Jost, John T., et al. “Political Conservatism as Motivated Social Cognition.” Psychological Bulletin 129, no. 3 (2003): 339–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