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최강욱의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에는 보수와 진보 성향의 두 대학생이 식사를 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가 등장합니다.
친구 A: 보수를 무조건 부정하는 건 옳지 않지. 나도 네 말을 무조건 부정하는 게 아니야.
친구 B: 진보가 옳은 말을 하긴 하는데 ‘내가 다 옳아’ 하는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거야.
친구 A: 보수도 좋은 거지, 사실. 그런데 왜 좋은지 차근차근 말해 주는 어른이 보수 쪽에 잘 없지. 불쌍해, 넌.
친구 B: 나도 진보 쪽 주장에 동의되는 부분이 있긴 있어.
친구 A: 둘 다 좋은 거잖아. 우선순위가 좀 다른 거지.
친구 B: 잘만 하면 서로 보완적이겠고.
친구 A: 감정적으로만 대립하는 건 좀 그렇고.
친구 B: 너부터 나를 ‘완전히 설득하려는 태도’를 좀 버려.
친구 A: 내 의견을 존중해 봐. 신념을 버리라는 게 아니잖아, 내가.
친구 A: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는 거지,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는 게 아니지. 그치 않냐?
친구 B: 그렇지. 각자 옳다고 믿는 걸 믿고 사는 거지. 나가자, 이제. 잘 먹었다. 저번에 네가 냈으니까 오늘도 네가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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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들은 이 대화를 긍정적으로 읽을 것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성숙한 태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자 역시 그런 이유로 이 대화를 인상적인 사례로 소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대화를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오히려 저는 이 대화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 A는 보수도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왜 좋은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친구 B는 친구 A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반박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친구 A가 더 성숙하고 친구 B가 논리적으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이 대화는 보수와 진보의 대화라기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화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는 원리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원리가 옳다고 판단되면 그 원리로부터 사회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려고 합니다. 반면 "경험주의"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인간 사회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하나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으며,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언제나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주의"는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원리를 발견하면 그 원리로 수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경험주의"는 성장 속도가 느립니다. 하나의 사례를 보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또 다른 사례를 관찰하고, 예외를 확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는 토론에서 종종 불리해 보입니다.
그는 왜 불편한지는 느끼지만 그것을 즉시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정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왜 위험한지 아직 언어로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확신보다 의심을 먼저 갖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 B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목은 단독으로 읽기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감정과 위험 인식을 가진다는 다른 글들과 이어서 읽을 때 더 잘 보입니다.
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부터 나를 완전히 설득하려는 태도를 좀 버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을 단순히 감정적인 표현으로 읽습니다. 상대방의 태도가 기분 나쁘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안에 훨씬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정말 그렇게까지 확실히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자주 틀립니다.
과학도 틀립니다. 철학도 틀립니다. 정치도 틀립니다.
과거에 당연하다고 믿었던 수많은 진리가 오늘날에는 오류로 취급됩니다. 오늘의 상식은 내일의 미신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놀라울 정도의 확신을 갖습니다.
이 문제는 가장 깊이 고민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젊은 시절에 《자유론》 제2장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론 2장의 핵심은 매우 단순합니다.
인간은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은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단순히 관용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이성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대방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상대방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과 부딪혀 보지 않으면 자신의 신념 역시 살아 있는 신념이 아니라 단순한 암기가 되어 버립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독단주의"의 가장 큰 문제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독단주의자"는 자신의 신념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독단주의는 특정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보주의자도 독단적일 수 있고, 보수주의자도 독단적일 수 있습니다. 과학자도 독단적일 수 있고, 종교인도 독단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신념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느냐입니다.
최근 정치심리학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논리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먼저 판단합니다. 호기심, 두려움, 분노, 혐오, 돌봄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들이 먼저 세상을 해석하고, 그 위에 철학과 이념이 쌓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으로 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정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논리 때문에 신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감정 때문에 신념을 갖고 그 후에 논리를 동원해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는 도대체 무엇이 다를까요?
다음 글에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 특히 호기심과 두려움이라는 두 감정이 어떻게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힌트는 그 책의 앞 부분에 있습니다.
정준희, 한양대학교 미디어학과 겸임교수의 추천사가 있는데, 그 내용을 일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좌파다. 자본주의는 정의롭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으며, 따라서 영원할 수도 없는 경제체제라고 여긴다. 따라서 내게 자본주의는 극복의 대상이지 행복의 원천이 아니다. 또 나는 진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현재는 늘 출발점이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가 된 현재를 돌아보면, 비합리적이고 어처구니없는 현실 속에서 잘도 살았구나 싶을 거라고, 미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우파다.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로부터 얻은 것이 많다고 여긴다. 정의롭게 자본주의를 뒤집는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정의로울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 나는 보수다. 품격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랑한다. 과거로부터 누적된 오랜 지혜가 있다고 믿으며, 현재는 그것의 표현이고, 그런 지혜 없이 미래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균형 잡힌 태도의 표현으로 읽을 것입니다. 좌파이면서 우파이고, 진보이면서 보수라고 말하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성숙한 시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이 좌파인지 우파인지가 아닙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훨씬 단순한 질문입니다.
과연 어떤 현실이 나타나면 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것인가?
그는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시장 확대와 산업화가 진행된 시기에 세계의 극빈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세계은행은 1990년 이후 극빈 감소의 주된 동력으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지목합니다. 물론 이 변화 전체를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의 변화가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 평가는 과연 경험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 주장일까요?
경험주의자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주장이 옳은지보다 그 주장이 현실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실과 충돌하면서 바뀔 수 있는 생각만이 경험의 영향을 받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뒤 그 결론을 정당화할 논리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증거를 더 쉽게 찾고, 믿고 싶은 방향으로 자료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여러 경향을 흔히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묶어 부릅니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생각도 자신의 신념 체계 안에서는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 A의 태도가 떠오릅니다. 친구 A는 관용을 말하고 균형을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틀릴 수 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틀릴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방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방어하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던 것도 결국 같은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상대방이 틀렸더라도, 그와의 충돌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에 듣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독단주의"는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이 어떤 조건에서 틀릴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진보에게도 나타나고 보수에게도 나타납니다. 문제는 신념의 방향이 아니라 신념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현실보다 신념을 우선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참고문헌
- 존 스튜어트 밀. (1859). 《자유론》,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관하여」.
- Haidt, J. (2001). “The Emotional Dog and Its Rational Tail: A Social Intuitionist Approach to Moral Judgment.” Psychological Review, 108(4), 814–834.
- Nickerson, R. S. (1998). “Confirmation Bias: A Ubiquitous Phenomenon in Many Guises.” Review of General Psychology, 2(2), 175–220.
- World Bank Group. “Poverty.” 1990년 이후 세계 극빈 추세와 경제성장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