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하이데거는 왜 나치가 되었는가


아이히만의 무사유와 대비되는 하이데거의 지적 오만을 분석하며,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 거대한 철학이 어떻게 독단주의와 비극적 정치 선택으로 이어지는지 다룹니다.

하이데거는 왜 나치가 되었는가

철학자는 보통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지며,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한 사람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왜 나치에 협력했을까요?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에 가담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를 판단하지 않고, 명령과 행정 절차 속에서 맡은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런 무사유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달랐습니다. 그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거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현실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자신의 철학적 해석이 더 깊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사례는 악이 반드시 무지와 무사유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 철학 역시 인간을 위험한 정치적 선택으로 이끌 수 있는 법입니다.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5월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총장 취임 연설에서 대학을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재편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총장직은 약 1년 만에 그만두었지만, 나치당 당적은 정권이 무너진 1945년까지 유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를 단순히 시대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나치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집권 초기에는 나치 운동에 적극적인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하이데거는 당시 독일의 정치적 혼란만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주의, 의회정치, 개인주의, 과학기술, 대중사회는 그에게 존재의 본질을 잊고 피상적이며 계산적인 세계로 타락한 거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 하이데거의 눈에 나치는 평범한 정당이 아니라, 독일 민족을 각성시키고 무기력한 근대사회를 넘어 새로운 역사적 출발을 가능하게 할 운동처럼 보였습니다. 실제의 나치보다 하이데거가 머릿속에 그린 나치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경험주의자는 생각과 세계를 구분합니다

경험주의자는 자신의 생각과 실제 세계가 같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만들 수 있지만, 그 설명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아름다워도 현실과 맞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관찰과 예측이 이론에 맞지 않으면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려야 하는 것이 경험주의의 기본입니다.

경험주의의 판단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현실을 관찰합니다.
  2. 잠정적인 설명을 만듭니다.
  3. 그 설명이 실제 결과와 일치하는지 확인합니다.
  4. 일치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현실은 이론을 심판하는 외부 기준이며, 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도 현실보다 높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반면 독단주의자는 자신이 만든 개념적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믿기 시작하면, 현실은 더 이상 이론을 검증하는 자료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철학적 체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사례가 됩니다.

  • 경험주의자는 현실에 따라 생각을 수정하지만,
  • 독단주의자는 생각에 따라 현실의 의미를 수정합니다.

현실이 틀리고 철학은 언제나 옳습니다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 철학은 반증되기 어렵습니다. 혁명이 실패하면 역사적 조건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이상적인 국가가 폭력적으로 변하면 진정한 이념이 왜곡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측이 빗나가면 이론을 버리는 대신 대중이 아직 역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함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도 철학은 살아남습니다.

이런 체계에서는 실패가 이론의 반증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론을 강화하는 재료로 다시 해석됩니다. 현실이 철학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현실을 끊임없이 재분류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나치를 구체적인 정책과 결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나치가 누구를 억압하고 어떤 제도를 파괴하며 실제 인간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나치를 독일 민족의 운명, 역사적 결단, 서구 문명의 전환이라는 철학적 언어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면 눈앞의 폭력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며 일시적인 과오나 미완의 과정으로만 간주될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오해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나치의 저속한 생물학적 인종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의 철학을 나치당의 선전문구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의 모든 정책에 동의했기 때문에 협력한 것이 아니라, 나치 운동의 표면 아래에 자신만이 이해하는 더 깊은 철학적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나치가 불완전하더라도 자신이 그 운동에 정신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착오보다 더 위험한 지적 오만이었습니다.

자신은 대중보다 역사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거친 정치운동도 철학적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정치운동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평가하는 대신 그 운동 안에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게 완전히 속은 사람이기보다 나치를 자신의 철학적 계획에 이용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철학자가 나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나치가 철학자의 권위와 대학을 이용했습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공식 역사 역시 하이데거가 총장으로서 대학을 나치 운동의 일부로 만들려 했다고 기록하며, 그의 스승이었던 유대계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대학에서 배제될 때도 하이데거는 그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사명의 언어 뒤에서 실제 인간은 사라졌던 것입니다.

아이히만과 하이데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히만과 하이데거는 얼핏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관료였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역사에 관해 사유한 철학자였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생각이 부족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생각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자신이 참여한 행위가 실제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아이히만은 행정 절차와 명령체계 뒤에 숨었고,
  • 하이데거는 철학과 역사적 사명 뒤에 숨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고, 하이데거는 자신이 하는 일에 터무니없이 거대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한 사람은 현실을 너무 작게 보았고 다른 사람은 현실 위에 너무 큰 관념을 덮어버렸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눈앞의 실제 인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악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생각이 현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도 악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문제

이 문제를 독일 철학 전체의 특징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칸트는 오히려 인간 이성이 경험을 넘어 세계의 본질을 함부로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며 인식의 한계를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칸트 이후의 일부 독일 관념론은 다시 이성과 세계의 구조를 일치시키려 했으며, 인간의 사유를 통해 역사와 세계 전체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거대한 체계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철학에서 개별 사건은 이미 설정된 역사철학 안에서 해석되므로 현실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어도 철학은 틀리지 않습니다.

  • 경험과 충돌해도 살아남고,
  • 예측에 실패해도 살아남으며,
  •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도 살아남습니다.

오히려 실패와 고통마저 더 큰 역사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 수정되지 않는 철학의 가장 위험한 특징입니다.

철학이 정치와 만날 때

철학은 인간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지만, 그 틀이 현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순간 판단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정치는 실제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정책이 실패하면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자유를 빼앗기며 목숨까지 잃을 수 있어, 정치사상은 이러한 결과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되고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철학이 자신을 역사의 필연, 민족의 사명, 정의의 완성이라 선언하면 현실의 피해는 사소한 비용으로 무시되고 반대자는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이때 철학은 악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악을 고상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됩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의 폭력을 직접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나치라는 현실적 운동을 ‘역사적 결단’과 ‘민족의 운명’이라는 철학적 언어로 높여줌으로써 구체적인 폭력을 거대한 역사극의 배경으로 밀어내 버렸습니다.

철학에도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과학에는 실험, 관찰, 재현, 반증, 동료 비판 등 이론을 현실과 대조하고 수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지만, 철학은 실험으로 쉽게 반박되지 않기에 더욱 강한 인식론적 겸손이 필요합니다.

  • 자신의 논리가 완벽해 보여도 현실은 다를 수 있다는 인정,
  • 자신이 역사의 방향을 이해했다고 느껴도 틀릴 수 있다는 인정,
  • 고상한 목적도 실제 결과가 나쁘다면 수정되어야 한다는 인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험주의적 태도입니다. 경험주의는 모든 것을 실험실에서 측정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 세계와 실제 세계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무리 정교한 철학도 현실의 반증보다 위에 놓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수정되지 않는 철학의 위험성

하이데거는 생각이 부족해서 나치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수정할 수 있는 외부의 심판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에 협력했습니다. 그에게는 현실의 인간과 정치적 결과보다 자신이 파악했다고 믿은 역사적 본질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철학의 무용함이 아니라, 철학이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 않을 때 생기는 위험입니다. 생각은 필요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깊은 사유도 현실과 분리되면 망상이 되고 정교한 철학도 반증을 거부하면 독단이 됩니다.

  •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했고,
  • 하이데거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체주의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생각하지 않는 관료와, 그 명령에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지식인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철학자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틀릴 수 있다는 인식론적 겸손입니다. 현실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머릿속에 가두어 버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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