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란 무엇일까요. 철학자들은 수천 년 동안 이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플라톤은 정의를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질서에서 찾았고, 근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권리를 중심으로 정의를 설명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유와 평등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는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선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물론 중요하며,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를 결정하려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원칙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논쟁이 지나치게 정교해지면 때로는 바늘 끝에서 천사가 몇 명이나 춤출 수 있는지를 따지는 중세의 논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의의 개념은 갈수록 세밀해지지만, 정작 현실에서 불의가 어떤 모습으로 시작되는지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불의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자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와 불의는 단순한 반대말이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대칭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불의는 처음부터 정의를 부정한다고 선언하며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평등과 안전, 개혁과 공익, 질서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정의의 원리를 세우는 일과 불의의 징후를 찾아내는 일은 서로 다른 지적 작업입니다.
어떤 카드를 뒤집어야 할까요
인지심리학의 유명한 실험 가운데 웨이슨 선택 과제가 있습니다.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은 카드 네 장이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A / D / 4 / 7
각 카드의 한쪽에는 알파벳이, 반대쪽에는 숫자가 적혀 있으며 다음과 같은 규칙이 주어집니다.
카드 한쪽에 모음이 적혀 있다면 반대쪽에는 짝수가 적혀 있습니다.
이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어떤 카드를 뒤집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은 A와 4를 선택합니다. A는 모음이고 4는 짝수이므로, 규칙과 일치할 것처럼 보이는 두 장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해야 할 카드는 A와 7입니다.
A의 뒷면에는 반드시 짝수가 있어야 하므로 A를 뒤집어야 합니다. 또한 7의 뒷면에 모음이 있다면 규칙이 깨지므로 7도 확인해야 합니다. 반면 4의 뒷면에 모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규칙과 일치하는 사례일 뿐이며, 자음이 있다고 해서 규칙이 깨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규칙은 모음 뒤에 짝수가 있어야 한다고 했을 뿐, 짝수 뒤에 반드시 모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규칙을 검증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규칙과 일치하는 자료를 확인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규칙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는 카드보다, 규칙이 옳아 보이게 만드는 카드를 먼저 뒤집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참인지 엄격하게 검사하려면 그 명제와 일치하는 사례만 모아서는 안 되며, 그것을 틀렸다고 만들 수 있는 반증 사례를 찾아야 합니다. 짝수 뒤에서 모음을 백 번 발견해도 규칙이 참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입증되지 않지만, 모음 뒤에서 홀수가 한 번 발견되면 그 규칙은 무너집니다.
정의를 확인하는 자료와 불의를 드러내는 자료
정치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정치적 원칙과 일치하는 자료를 먼저 찾습니다. 복지 지출이 늘었으므로 사회가 더 평등해졌다고 말하고, 경제가 성장했으므로 자유로운 시장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범죄율이 낮아졌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었으며 의료 혜택을 받은 사람이 증가했다는 자료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료는 모두 정책의 결과를 판단할 때 중요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결과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과정에 불의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범죄율을 낮추는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을 과도하게 감시했을 수 있고, 평등을 확대한다는 명분 아래 특정 집단의 권리가 제한되었을 수도 있으며, 복지제도가 많은 사람을 도왔더라도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부당하게 배제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책의 이익을 보여주는 자료와 권력의 남용을 보여주는 자료는 대개 서로 다른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정책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지만 살펴서는 안 되며, 누가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는지, 어떤 절차가 생략되었는지, 누구에게만 예외적인 부담이 부과되었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애초에 다른 카드를 뒤집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웨이슨 카드의 논리와 정치 판단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논리 명제는 하나의 분명한 반례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지만, 정책은 한 건의 피해가 발견되었다고 곧바로 전면 폐기되지 않습니다. 정책은 언제나 다수에게 이익을 주면서 일부에게 손해를 주는 등 여러 결과를 동시에 낳으므로, 피해의 규모와 심각성, 회피 가능성, 대안의 비용, 피해 보상과 시정 가능성까지 함께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피해 사례를 평균적인 성과 속에 묻어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건의 피해가 정책 전체를 자동으로 반증하지는 않지만, 그 피해는 정책이 내세우는 정당성을 다시 검토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반대 증거가 됩니다. 특히 피해가 우연한 부작용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 절차의 생략,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불의의 징후일 수 있습니다.
정의를 안다고 해서 불의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주디스 슈클라는 전통적인 정치철학이 정의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정치철학자들은 정의로운 국가의 조건을 밝히면 그 조건이 결여된 상태를 불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 불의도 그 반대편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슈클라에게 불의는 단순히 정의가 부족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불의가 오히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혁명가는 평등을 약속했고, 전체주의 국가는 공동체의 통합과 역사적 진보를 내세웠습니다. 독재자는 질서와 안정을 말했고, 정치적 숙청은 사회를 정화하거나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불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크고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의에 대한 관념이 없어서 불의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의의 관념이 너무 강해서 그 정의가 만들어내는 피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정의로운 목적을 확신한 사람에게 현실의 피해는 쉽게 부차적인 문제가 되고, 피해자는 대의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 되며, 절차는 목표를 방해하는 형식주의가 됩니다. 반대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을 막는 장애물이나 적으로 변합니다. 이때 불의는 정의의 반대편에서 나타나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의 일부로 나타납니다.
불의는 작은 예외로 시작됩니다
불의가 발견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잔혹한 얼굴을 하고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번만은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거나, 상대방은 악한 사람이므로 권리를 보장할 이유가 없다거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부의 희생은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작은 예외로 나타납니다. 각각의 결정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단기적으로는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반복되면 제도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특정한 사람에게는 다르게 적용되고, 재판은 계속 열리지만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결론이 미리 정해지며, 표현의 자유는 보장된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견해는 위험한 것으로 분류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제도와 정의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오히려 권력은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더 크게 말합니다.
따라서 불의의 시작을 알아보려면 제도가 선언하는 원칙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외가 누구에게 적용되는지, 권력자가 자신에게도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지, 반대자가 절차적 권리를 보장받는지, 잘못된 결정이 실제로 수정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불의는 정의로운 원칙이 사라지는 순간보다,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에 시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슈클라의 공포의 자유주의
슈클라는 자신의 자유주의를 ‘공포의 자유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공포를 이용해 사회를 통치하자는 뜻이 아니라, 정치가 가장 먼저 막아야 할 것이 잔혹함과 공포라고 본 것입니다. 전통적인 정치철학이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슈클라는 그보다 먼저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자의적으로 체포·처벌해서는 안 되며, 권력자의 판단에 따라 법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거나 개인이 의견을 말했다는 이유로 생계와 안전을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원칙들은 정의로운 사회의 완전한 설계도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정치가 넘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경계를 제시합니다.
공포의 자유주의는 가장 좋은 사회를 설계하는 일보다 최악의 정치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는 일을 우선합니다. 인간은 완전한 정의에 합의하기 어렵지만, 고문과 박해, 자의적인 처벌과 권력의 잔혹함이 위험하다는 데에는 훨씬 넓게 합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인간의 불완전성을 관리하는 제도로 본다면 이러한 소극성은 약점이 아닙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옳은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보다, 잘못된 권력을 멈추고 피해를 드러내며 결정을 수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정치적 반증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에서 어떤 이론을 평가할 때 그 이론과 일치하는 관찰만 수집해서는 부족하듯, 정치적 판단에서도 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보여줄 조건과 반대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다만 정치적 평가는 과학적 반증과 달리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 뒤섞여 있으므로, 정치에서 ‘반증’은 엄밀한 논리적 폐기라기보다 자신의 믿음과 정책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반대 증거를 받아들이는 경험적 태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복지제도가 전체 빈곤율을 낮췄다는 긍정자료와 특정 계층이 제도에서 반복적으로 누락된다는 자료가 있을 때, 두 자료 중 하나만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더라도 법적 절차가 무시되고 재산권이 침해되었다면 성장률만으로 정당성을 판단할 수 없으며, 범죄율이 감소했더라도 영장 없는 감시가 일상화되었다면 권력의 확대도 함께 평가해야 합니다.
경험주의는 좋은 결과를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긍정자료와 반대 자료를 모두 보겠다는 태도입니다. 평균적인 이익 때문에 특정한 피해를 지우지 않고, 피해 사례 하나 때문에 전체 성과를 기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자료가 자신의 신념을 지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료가 현실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불의와 불운은 지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슈클라는 불의와 불운의 경계가 정치적 판단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과거에는 자연재해로만 여겨졌던 피해도 건축 규정을 지키지 않았거나 예방 가능한 위험을 방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불의의 문제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지, 어디까지 보상할 것인지는 정치적 토론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피해가 인간의 행위로 발생했는지, 예방이 가능했는지는 정치적 선택만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그것은 경험적 조사와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사실 판단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에 인간의 활동이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과학의 문제이고, 그 피해에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비용을 분담할 것인지는 정치의 문제입니다.
불의에 주목하자는 이유로 사실 판단까지 정치적 선택에 맡긴다면, 오히려 권력과 여론이 진실을 결정하는 위험한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슈클라는 정의에 관한 절대적 지식을 독점하려는 태도를 비판했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찾으려는 노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불의를 판단하려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인과관계와 책임을 밝히기 위한 경험적 검증도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정의보다 불의를 먼저 보아야 하는 이유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며, 우리는 자유와 평등, 권리와 책임에 대해 계속 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이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의로운 사회의 원칙은 여러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지만, 현실의 불의가 언제나 그 목표의 정반대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는 대개 좋은 목적에 딸린 사소한 비용이나 불가피한 희생으로 설명되며 정의의 언어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와 별개로 누구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는지, 누가 법의 보호에서 제외되는지, 권력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좋은 정치체제는 정의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아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체제입니다. 피해자가 말할 수 있고, 반대자가 적으로 취급되지 않으며, 잘못된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입니다.
정의라는 바늘 위에서 끝없이 춤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 그 바늘에 찔리고 있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자신이 정의롭다는 긍정자료만 쌓아 올리고, 그 정의를 의심하게 만드는 카드는 더 이상 뒤집지 않을 때 불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