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진주의는 해방인가, 또 다른 권력욕인가
Lichter와 Rothman의 「The Radical Personality」가 던진 질문
1960년대 미국의 뉴레프트 학생운동은 오랫동안 “해방된 세대”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들은 권위주의적 질서에서 벗어나고, 더 자율적이며, 더 도덕적이고, 더 민주적인 인간형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회심리학 연구는 급진적 학생들을 억압적 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시민, 혹은 미래 사회의 전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S. Robert Lichter와 Stanley Rothman은 1982년 논문 「The Radical Personality」에서 이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뉴레프트 급진주의를 단순한 심리적 해방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부 급진주의는 권위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가 뒤집힌 형태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논문의 핵심 질문은 간단합니다.
급진주의자는 정말 권위에서 해방된 사람인가. 아니면 기존 권위에 반항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는 사람인가.
저자들은 기존 연구의 가장 큰 문제로 측정도구의 편향을 지적했습니다. 당시 일부 심리검사는 진보적·급진적 태도를 곧바로 자율성, 비권위주의, 심리적 성숙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하거나, 전통적 가족관에 반대하거나, 자신을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항목이 심리적 개방성이나 자율성의 지표처럼 취급되었습니다. Lichter와 Rothman은 이것이 심리학적 측정이라기보다, 좌파적 가치관을 긍정적 성격 특성으로 바꿔 부른 것에 가깝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하버드대, 미시간대,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보스턴대 학생 1,195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단순한 자기보고식 설문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주제통각검사, 즉 TAT와 의미분화검사 같은 투사적 심리검사도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말하는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권력, 친밀감, 자기확장, 항의, 폭력성, 집단 동일시를 어떻게 상상하고 해석하는지를 보려 했습니다.
그 결과 저자들은 뉴레프트 급진주의가 몇 가지 심리적 특징과 관련된다고 보았습니다. 급진 성향은 권력동기, 권력에 대한 양가감정, 낮은 친화동기, 자기주장적 성향, 나르시시즘적 반응, 그리고 항의와 전투성을 힘의 원천으로 보는 인식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저자들은 급진주의자가 약자를 순수하게 연민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리적 힘을 얻는다고 해석했습니다.
이 해석은 중요합니다. 급진주의자는 겉으로는 권력에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 반대가 반드시 권력욕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존 권위가 약해 보이거나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잃었다고 판단하면, 급진주의자는 그 권위에 맞서는 새로운 집단, 새로운 운동, 새로운 도덕적 권력에 자신을 결합시킬 수 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민중”, “피억압자”, “역사”,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급진주의의 위험이 생깁니다. 자신을 권력의 추구자가 아니라 정의의 대리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욕을 잘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공격성은 폭력이 아니라 저항이 되고, 자신의 지배욕은 억압 해방이 되며,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은 사회정의가 됩니다.
Lichter와 Rothman의 논문은 모든 진보주의자가 나르시시스트라거나, 모든 좌파가 권위주의자라는 주장을 하는 연구가 아닙니다. 이 연구의 대상은 196070년대 미국 대학의 뉴레프트 급진주의였습니다. 실제로 이 연구는 196070년대라는 특정 격변기의 한정된 대상을 바탕으로 한 자료라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하며, 투사검사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현대 심리학 기준에서 해석에 신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연구 결과를 모든 급진주의로 자동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보일 수 있는 심리적 경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이 논의의 균형을 위해 해방적·민주적 급진주의를 지지하는 연구나 사례들도 함께 고려하는 편이 독자의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결론에서 이를 명확히 해 독자가 연구의 범위와 한계를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그 시절에도 리버럴하거나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단순히 '더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은 이 연구를 통해 명백해졌습니다. 당시 학계 주류가 뉴레프트 학생들을 억압적 사회에 저항하는 이상적이고 자율적인 인간형으로만 미화하려 했던 편향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이면에 작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심리적 동기(지배욕과 반항적 권위주의)를 실증적으로 규명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논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급진주의를 무조건 심리적 건강이나 도덕적 성숙으로 보는 해석에 제동을 걸었다는 데 있습니다. 급진주의는 때로 약자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순수한 연민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급진주의는 자기확장, 권력동기, 도덕적 우월감,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심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교육, 문화, 제도 개혁의 이름으로 남의 삶과 남의 자녀에게 개입하려는 정치적 충동을 이해할 때 그렇습니다. 급진적 개혁가는 자신이 남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을 해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권력욕을 권력욕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논문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권위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사람인가. 기존 질서를 공격한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적인 사람인가. 약자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인가.
Lichter와 Rothman의 대답은 회의적입니다. 어떤 급진주의는 권위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권위주의의 변형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종하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반항하는 권위주의입니다. 명령받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명령하려는 권위주의입니다. 전통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과 정의의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권위주의입니다.
그래서 급진주의를 평가할 때는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실제로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반대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부모와 가족과 전통 같은 중간 공동체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얼마나 인정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자유는 권위에 반대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자유는 자기 안의 권력욕까지 의심할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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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hter, S. Robert, and Stanley Rothman. “The Radical Personality: Social Psychological Correlates of New Left Ideology.” Political Behavior 4 (1982): 207–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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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ghaddam, Fathali M. “The Staircase to Terrorism: A Psychological Exploration.” American Psychologist 60, no. 2 (2005): 161–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