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의 글에서는 늑대가 개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늑대의 사냥 본능과 영역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본능이 행동을 즉시 지배하는 힘이 약해졌습니다.
개는 낯선 인간을 보자마자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대신, 인간의 표정과 손짓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능과 행동 사이에 짧은 틈이 생기자 늑대에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정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손가락은 단순히 움직이는 신체가 아니라 멀리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위협적인 소음만이 아니라 허용과 금지, 칭찬과 경고를 전달하는 정보가 되었습니다.
본능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조금 벗어나자 개의 세계는 오히려 넓어졌습니다.
인간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가축화는 인간이 선해진 과정이 아닙니다. 공격성과 두려움, 성적 경쟁과 집단의식이 사라진 과정도 아닙니다.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달라지고, 같은 집단 안에서 충동적인 공격을 억제하는 능력이 증가한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큰 집단을 만들고, 낯선 사람과 협력하며, 지식을 세대에 걸쳐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반응적 공격성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인간이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먼저 같은 편끼리 싸우지 않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우리’ 밖에 언제나 적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한 공격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친화성은 인간의 세계를 넓혔습니다
브라이언 헤어는 인간의 성공을 단순히 큰 뇌나 높은 지능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상대의 의도를 읽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먼저 영리해진 뒤 협력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영리해도 지식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낯선 사람을 모두 경쟁자나 침입자로 본다면 공동의 언어와 규칙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피려면 먼저 상대를 즉각적인 위협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친화성은 지능의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친화성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는 것만으로는 문명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관찰하고 배우며, 조금씩 개선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대부분 개인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사이를 이동하면서 축적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 문명의 기원에는 천재의 지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오래 바라보고 기꺼이 따라 해보는 친화성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공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화로운 동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리처드 랭엄은 공격성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반응적 공격성입니다. 모욕이나 위협을 받았을 때 분노하여 즉시 폭발하는 공격입니다. 감정이 뜨겁고 충동적이며 충분한 계획 없이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는 선제적 공격성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시간과 방법을 선택하며, 다른 사람과 공모하여 실행하는 공격입니다.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는 차갑고 계획적인 폭력입니다.
인간은 침팬지에 비해 일상적인 반응적 공격성이 낮은 편입니다. 서로 부딪히거나 음식을 빼앗겼다고 해서 매번 치명적인 싸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낯선 사람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자신이 싫어하는 이웃과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제적 공격성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무기를 만들고, 동맹을 구성하며, 공격 대상의 행동을 미리 관찰합니다. 전쟁과 처형, 암살과 정치적 숙청은 순간적인 분노만으로는 실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억제하고 역할을 나누며 계획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함이 가진 역설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온순해졌기 때문에 더 잘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협력 능력을 이용하여 더 큰 폭력도 조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축화는 폭력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폭력을 줄이고 차가운 폭력을 조직했습니다.
폭군은 어떻게 제거되었는가
침팬지 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강하고 동맹이 많은 수컷이 다른 개체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약한 개체가 혼자 저항하면 쉽게 제압당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누가 반복해서 폭력을 휘둘렀는지, 누가 약속을 어겼는지, 누가 다른 사람의 재산과 배우자를 빼앗았는지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약한 사람도 여러 사람이 연합하면 강한 폭군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무기와 계획, 기습을 이용하면 육체적인 힘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에게서 새롭게 등장한 힘은 약함이 아니라 연합이었습니다.
고립된 개인으로는 폭군을 이길 수 없지만, 언어와 신뢰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은 폭군보다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가장 강한 한 사람보다 여러 사람이 동의한 규칙이 더 큰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법과 도덕, 정치의 오래된 기원이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가축화는 약자를 제거한 과정이 아닙니다. 개별적으로는 약한 사람들이 연합하여 지나치게 공격적인 강자를 통제한 과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은 새로운 폭군이 될 수 있습니다
폭군을 제거한 집단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합니다.
누가 폭군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행동을 처벌해야 합니까.
처벌의 강도는 누가 결정합니까.
집단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위험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집단의 힘이, 시간이 지나면서 규범을 어기는 사람과 불쾌한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폭군에게 지배받던 사회는 여러 사람이 함께 행사하는 도덕적 권력에 지배받게 됩니다.
자기가축화된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피고, 좋은 평판을 얻으려 노력하며,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민감성은 협력에 필수적입니다.
누군가 약속을 어기고도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협력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의 규칙을 반복해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판에 대한 민감성은 동조 압력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집단은 사람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데서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말을 사용하고, 올바른 감정을 표현하며, 올바른 의견에 동의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폭군을 몰아낼 능력을 얻었지만, 그 능력은 반대자를 폭군으로 규정하여 몰아내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응적 공격성의 감소는 ‘우리’의 확대와 다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응적 공격성이 줄어드는 것과 ‘우리’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반응적 공격성의 감소는 같은 집단 안에서 사소한 자극에 즉시 폭발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집단 밖의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기 집단 안에서는 온순하고 협력적이면서도, 집단 밖의 사람에게는 매우 잔혹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민끼리는 법과 절차를 지키면서도, 변방의 민족과 이교도, 적국의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규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질서와 외부에 대한 적대는 얼마든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내부의 높은 협력과 조직력은 외부를 더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로마가 좋은 사례입니다.
로마인은 시민 사이의 갈등을 법과 절차로 처리하고, 거대한 행정과 군사조직을 운영했습니다. 개인과 부족이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영역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법과 시민권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밖의 변방 민족과 정복 대상에게는 매우 잔혹한 폭력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공격성이 없는 문명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내부의 공격성을 더 강한 법과 국가 안에 묶었고, 그 조직력을 외부를 향한 정복에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반응적 공격성의 감소는 인간을 보편적으로 평화롭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같은 편끼리 더 오래 협력하고, 더 큰 집단을 조직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누구까지 포함하는가였습니다.
‘우리’ 밖에 적이 있다면 공격성은 남습니다
인간은 집단을 만들면서 안전을 얻었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규칙을 따며, 같은 신과 조상을 공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서로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단이 강해질수록 경계도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와 그들, 시민과 야만인, 신자와 이교도, 동지와 반역자가 나뉘었습니다.
집단 내부에서는 공격성을 억제하면서도, 집단 밖에는 늘 적이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격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억제된 공격성은 집단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내부에서는 법과 예절을 지키면서도, 외부의 적에게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제 적이 존재합니다. 공동체를 공격하거나 영토와 재산을 빼앗으려는 상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방어와 공격 능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 적과 상상된 적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집단을 결속하려는 지도자는 위협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정치운동은 반대자를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적이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적은 집단을 쉽게 결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같은 집단 안의 갈등은 외부의 적이 등장하면 잠시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만을 잊고 지도자를 따르며, 공격적인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우리 밖에 언제나 적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공격성을 제거하지 못한 채, 공격할 대상을 계속 바꾸게 됩니다.
로마와 게르만의 차이
로마와 변방의 게르만 집단을 비교할 때도 이 관점이 필요합니다.
로마가 평화롭고 게르만인이 본질적으로 폭력적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마 역시 정복전쟁과 노예제, 처형과 학살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개인과 친족집단이 직접 행사하던 폭력을 국가와 군대, 재판과 행정의 통제 아래 두는 데 더 앞서 있었습니다.
반면 변방의 여러 게르만 집단에서는 친족의 복수와 전사의 명예, 직접적인 힘의 균형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중앙의 법과 재판보다 자신의 친족과 전사집단이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우열이 아니라 문명화의 단계 차이로 보아야 합니다.
로마인의 공격성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개인과 작은 집단의 충동적 폭력이 더 큰 제도 속에 들어갔습니다.
게르만 집단도 이후 왕국과 법, 교회와 행정제도를 만들면서 폭력을 점차 더 큰 질서 안에 묶었습니다.
문명의 역사는 평화로운 민족이 폭력적인 민족을 대체한 역사가 아닙니다.
공격성을 가진 인간이 그 공격성을 더 큰 질서와 규칙 안에 조금씩 가두어온 역사입니다.
이슬람의 정복과 질서
초기의 이슬람 세력도 강한 정복과 팽창을 통해 거대한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이를 단순히 공격적인 종교의 등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정복의 폭력과 이후 제국 운영의 질서는 함께 존재했습니다.
정복집단은 계속 약탈만 해서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도시와 농업, 상업과 세금을 유지하려면 무제한적인 폭력을 줄이고 예측 가능한 법과 행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초기의 공격적인 팽창은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과 상업, 법과 학문을 가진 제국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공격성이 완전히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제국 내부의 여러 집단 사이에서는 질서와 관용이 확대될 수 있지만, 외부의 적과 이교도, 반란 세력에게는 강한 폭력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로마와 이슬람 제국 모두 같은 문제를 보여줍니다.
내부의 질서가 외부에 대한 관용을 자동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같은 편끼리 싸우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원래 다른 편이었던 사람도 반드시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만으로도 강력한 국가와 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야 서로 다른 집단이 같은 법과 절차 아래 공존할 수 있습니다.
문명은 ‘우리’를 넓히는 과정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는 단순히 공격성이 감소한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부르는 범위가 조금씩 넓어진 데 있습니다.
처음의 ‘우리’는 가족과 친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부족과 도시, 왕국과 민족, 종교공동체와 국가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위가 커질 때마다 새로운 경계가 생겼습니다.
가족끼리는 협력하지만 다른 가족과 싸웠고, 같은 부족끼리는 협력하지만 다른 부족을 공격했습니다. 같은 국가의 시민은 법의 보호를 받았지만, 외국인은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확대는 한 번에 이루어진 보편적 진보가 아닙니다.
더 큰 내부집단을 만들면서 더 큰 외부집단을 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민족국가는 부족전쟁을 줄였지만 국가 간 전쟁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종교는 서로 다른 부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지만 이교도와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문명의 다음 단계는 단순히 더 큰 집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 밖의 사람을 모두 적으로 보지 않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관계의 충돌도 남고 경쟁도 계속됩니다.
중요한 변화는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상하고 견제하며 같은 규칙 아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보는 데 있습니다.
문명은 차이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차이가 적대와 살해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보수주의는 공격성을 억제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보수주의의 심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는 공격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공격성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보수주의는 자신의 공격성과 욕망, 정의감과 분노를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성향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절차를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법과 관습, 재판과 의회, 권력분립과 표현의 자유는 인간이 선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분노와 확신을 정당화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보수주의자는 변화가 언제나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변화시키려는 사람 역시 공격성과 욕망,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도 반대자를 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미래를 안다고 믿는사는 타인의 선택과 반대를 장애물로 여기기 쉽습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의 역할은 인간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공격성을 정의와 진보, 국가와 종교의 이름으로 마음껏 사용할 수 없도록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보수주의는 공격할 힘이 없는 사람의 사상이 아닙니다.
공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질서와 절차 아래 두려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보수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격성이 모두 충분히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보수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민족과 종교,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통과 질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분노와 지배욕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보수주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와 문명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앞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등과 정의를 말하면서 반대자를 무지하고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교육과 검열, 도덕적 비난을 통해 교정하거나 배제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격성은 보수와 진보 어느 한쪽에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공격성의 형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욕을 받자마자 폭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차분하게 동맹을 만들고 상대를 사회적으로 제거합니다.
전자는 반응적 공격성을 사용하고, 후자는 선제적 공격성을 사용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공격성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밀의 자유론이 필요한 이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제2장은 이 문제를 정확히 다룹니다.
밀은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을 갖더라도,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킬 권리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이 옳더라도 반론과 충돌하지 않으면, 그 의견은 근거를 잃고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교리가 됩니다.
이 논리는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제어장치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단순히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위험하다고 느끼고, 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밀의 자유론은 이 충동을 막습니다.
반대 의견은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시험하는 존재입니다.
이점에서 밀의 자유론은 보수주의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밀은 진보적 자유주의자였지만, 인간의 확신을 의심하고 반대자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사회공학적 충동에 대한 강한 제동장치입니다.
보수주의가 지켜야 하는 것은 모든 과거의 관습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사회 전체의 정답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원칙입니다.
사회공학은 적을 만들어냅니다
사회공학자는 인간이 환경과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법과 교육, 경제적 유인과 사회적 규범은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문제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시도 자체가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미리 정하고, 모든 사람을 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도에 저항하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반대자의 의견을 검토하기보다 무지와 편견, 거짓 정보와 낡은 교육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이때 상대는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 됩니다.
더 나아가 교정에 저항하면 공동체의 발전을 방해하는 적이 됩니다.
사회공학은 단순히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반대가 정당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설득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하거나 재교육해야 할 장애물로 보는 순간, 사회공학은 인간의 선제적 공격성을 사용할 명분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직업과 평판을 빼앗고, 발언권을 제한하며,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공격성이 육체를 향했다면, 현대의 공격성은 사회적 존재를 향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천천히 퍼지는 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주의는 이미 완성된 정치이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공격성을 법과 절차, 관용과 자기절제 아래에 놓는 과정입니다.
고대의 로마인은 변방의 부족보다 폭력을 제도 안에 더 많이 묶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로마 역시 매우 잔혹했습니다.
중세의 왕국은 친족 간 복수를 왕의 재판 아래로 옮겼지만, 종교적 이견을 처형했습니다.
근대 국가는 종교전쟁을 줄였지만 민족주의적 총력전을 조직했습니다.
현대 민주국가는 권력교체를 선거로 처리하지만, 여전히 반대자를 도덕적으로 제거하려는 충동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완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폭력이 부족의 규칙으로, 부족의 폭력이 국가의 법으로, 국가의 폭력이 헌법과 권리의 제한 아래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범위도 조금씩 넓어졌습니다.
다른 종교와 민족, 다른 계급과 의견을 가진 사람도 반드시 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수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주의자는 공격성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격할 수 있어도 공격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도 상대를 제거하지 않고, 법과 절차 안에서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보수주의는 아직 인류 전체에 충분히 퍼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축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기가축화는 어느 순간 완성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공격성이 모든 인간에게서 같은 속도로 줄어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단마다, 시대마다, 개인마다 충동과 폭력을 억제하는 정도는 달랐습니다.
인간은 먼저 같은 편끼리 싸우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집단 밖에 언제나 적이 있다고 믿는 한 공격성은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내부의 평화와 외부의 적대는 함께 존재했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법과 예절을 지키면서도, 외부의 적에게는 정복과 학살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축화는 공격성을 없앤 과정이 아니라, 공격성을 집단의 경계에 따라 배분한 과정이었습니다.
문명의 첫 번째 단계는 같은 편끼리 싸우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원래 다른 편이었던 사람도 반드시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만으로도 강력한 국가와 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야 서로 다른 집단이 같은 법과 절차 아래 공존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이 두 번째 과정과 연결됩니다.
보수주의는 모든 경계를 없애자는 사상이 아닙니다. 현실의 위험과 집단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경계 밖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제거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고, 그가 같은 법을 지키는 한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주의는 완성된 순종이 아닙니다.
인간의 공격성을 질서 속에 묶고, ‘적’의 범위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아직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분노에 휩싸여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도 남아 있고, 차분한 얼굴로 집단을 조직하여 반대자를 제거하는 사람도 남아 있습니다.
자기가축화의 첫 단계가 순간적인 폭발을 줄이는 것이었다면, 다음 단계는 계획된 공격성까지 자유와 법, 관용과 절차 아래에 놓는 것입니다.
문명은 공격할 힘을 잃은 상태가 아닙니다.
공격할 힘을 가지고도, 상대를 반드시 적으로 만들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는 그 방향으로 천천히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과거의 정복전쟁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너는 정말로 그것이 자랑스럽냐"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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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angham, Richard. The Goodness Paradox: The Strange Relationship Between Virtue and Violence in Human Evolution. Pantheon Book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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