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강욱의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아주 잘 드러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보수와 진보가 균형 잡힌 토론과 경쟁으로 세상을 지탱하고 발전시켜야 된다는 뜻에서 흔히 인용되는 문구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입니다. 1994년 고故 리영희 선생의 평론집 제목으로 쓰인 이 문장은 이제 아득히 그리워지고 만 청년 시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은 그 시대 온 나라에 뻗어 있던 맹목적 반공과 수구적 행태를 질타하기 위해 책에 이런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이 흐른 2024년 말, 대한민국에 위헌적 계엄이 있었습니다. 집권당 구성원들의 수구적이고 극단적인 발언이 계엄의 뒤를 이었습니다. ‘타당한 근거가 없다’라고 여러 차례 판결로 확인된 부정선거론을 열심히 주장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희대의 반민주적 대통령은 ‘계몽’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강변했고, 추종자들은 그의 진심에 감동받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때아닌 부정선거론, 난데없는 중국 혐오와 친미·친일 사대주의, 법원을 때려 부수는 폭력과 극언. 이들이 자칭 ‘보수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확증편향과 망상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는데 웃어넘길 수도 없고,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도대체 외면할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보수로 자임하는 집권당 고위 인사와 국회의원들은 “지금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냐, 좌파 독재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라고 돌아가며 못된 힘을 보탰습니다. 기괴하다 못해 웃프고 참담합니다. 헌법을 헌신짝 취급한 그들은 고뇌하지 않았고, 성찰하지 않았고, 반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여전히 보수랍니다. 리 선생의 꾸짖음이 아직도 우리 하늘을 맴돌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입니다. 진짜 보수인 우리 봉수 씨 입장에서 보면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시작부터가 좀 특이한 문구로 시작합니다.
1.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한계와 선택적 인본주의
최강욱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리영희의 문장을 균형의 상징처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 인용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리영희가 좌파였느냐 우파였느냐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가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인간 파괴의 사건을 충분히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았느냐입니다.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폭행당하고, 가족과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지식인과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고발하게 되었으며, 학문과 문화의 축적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이념의 이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인간 파괴였습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감각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국가와 이념의 도구가 되어도 되는가. 정치적 열정이 개인의 존엄을 짓밟아도 되는가. 혁명이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답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를 단순히 “좌우 균형”의 상징으로 호출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맹목적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문화대혁명이라는 인간적 참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냉정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중국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고통을 이념적 해석 속에 너무 쉽게 흡수했다는 데 있습니다.
최강욱의 글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리영희의 문장을 빌려 보수를 꾸짖지만, 정작 그 문장의 배경에 있는 인물의 한계는 보지 않습니다. 만약 민주주의와 헌법, 인간의 존엄을 말하려면, 먼저 어떤 이념이든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수의 폭력은 비판하면서, 진보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에는 관대해지는 태도는 인본주의가 아닙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진정한 균형의 언어가 되려면, 그 균형은 좌파와 우파 사이의 기계적 균형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준은 인간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가, 아니면 이념과 권력의 이름으로 인간을 희생시키는가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강욱의 인용은 처음부터 불안합니다. 그는 리영희의 문장을 균형의 상징으로 가져오지만, 정작 리영희가 충분히 보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고통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좌파의 실패라서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했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국가든 혁명이든, 민주주의든 정의든, 그 어떤 이름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면허가 될 수 없습니다.
2. 중국에 대한 경계는 “혐오”가 아닙니다
최강욱은 보수의 대외 인식을 두고 “난데없는 중국 혐오와 친미·친일 사대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지나치게 거칠고 부정확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정당한 위험 인식"을 "혐오라는 감정"으로 바꿔 부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오류입니다.
혐오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을 그 자체로 미워하고 배척하는 감정입니다. 반면 위험 인식은 어떤 국가, 권력, 제도, 행위가 실제로 나의 생명과 자유와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중국인을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은 혐오입니다. 그러나 중국 국가권력의 역사적 행위와 현재의 대외정책을 근거로 경계하는 것은 혐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안보 판단이고, 역사적 기억이며, 정치적 책임감입니다.
중국에 대한 한국 보수의 경계심은 허공에서 생긴 감정이 아닙니다.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과 유엔군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개입을 했습니다. 그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켰고, 수많은 한국인의 생명과 가족과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더구나 중국은 필요할 때는 “지원군”이라는 명칭 뒤에 숨지만,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논의에서는 스스로 당사자성을 주장해왔습니다. 전쟁의 책임을 말할 때는 지원군이라고 하고, 전쟁의 종결을 말할 때는 당사자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현재적 경험도 있습니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은 한국에 대해 사실상의 경제 보복을 가했습니다. 관광, 유통, 문화 콘텐츠, 기업 활동이 압박을 받았고, 한국 기업과 국민은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 갈등이 아니라, 한국이 안보상 필요에 따라 선택한 방어 체계에 대해 중국이 경제적 압박으로 대응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한국인이 중국 국가권력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은 “난데없는 혐오”가 아닙니다.
북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한반도 평화를 말하면서도 북한 체제의 생존을 사실상 떠받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를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충분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국 보수는 당연히 중국을 안보 위험 요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혐오가 아니라 현실 판단입니다.
홍콩과 위구르 문제도 있습니다. 홍콩의 자유가 급격히 축소되고, 위구르 지역의 인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깊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중국을 비판하는 이유는 중국인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입니다. 이 점에서 중국 비판은 반중 감정이 아니라 인본주의적 비판일 수 있습니다.
사이버와 기술 안보 문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선거 시스템, 통신망, 데이터, 첨단기술, 공급망은 이제 국가안보의 핵심입니다. 중국 기업과 기술이 국가권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작동한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중국 기술과 네트워크 장비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혐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안과 주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경계는 “난데없는 혐오”가 아닙니다. 한국전쟁에서의 군사 개입,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중국의 당사자성 주장, 사드 보복, 북한 문제, 홍콩과 위구르 인권 문제, 사이버·기술 안보 우려가 모두 누적되어 만들어진 정치적 판단입니다. 물론 중국인 개인에 대한 혐오나 인종적 적대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 국가권력과 중국 공산당 체제에 대한 비판을 곧바로 혐오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친미와 친일을 곧바로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대주의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강대국의 뜻을 자기 기준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동맹과 협력은 다릅니다.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것은 미국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북한 핵과 중국의 압박이라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생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일본과의 협력 역시 식민지 지배를 잊자는 뜻이 아니라, 북한 핵·미사일, 중국의 군사적 팽창, 공급망과 해양 안보라는 현실 속에서 검토해야 할 외교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최강욱이 이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에 대한 경계를 혐오로, 미국과 일본과의 협력을 사대주의로 바꿔 부릅니다. 그러나 외교와 안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과 이익의 문제입니다. 중국인을 미워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중국 국가권력의 역사적 책임과 현재의 위협을 경계하는 것은 혐오가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사대주의일 수 있지만, 한국의 생존과 자유를 위해 동맹과 협력을 선택하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결국 “난데없는 중국 혐오와 친미·친일 사대주의”라는 표현은 보수의 외교 인식을 제대로 비판한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잡한 역사와 안보 현실을 지우고, 상대의 판단을 도덕적으로 낙인찍는 문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최강욱은 보수의 정당한 위험 인식을 혐오라는 감정으로 치환합니다. 그렇게 하면 토론은 쉬워집니다. 상대의 근거를 검토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지하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병리화하는 방식입니다.
3. 동맹은 굴종이 아니며, 진정한 위협은 중국입니다
최강욱은 보수의 대외 인식을 두고 “친미·친일 사대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부정확합니다. 특히 “친미”를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 과정에서 한미동맹은 단순한 외교 노선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 경제, 기술, 교육, 제도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한국이 전쟁을 억제하고 경제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미동맹과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있었습니다.
물론 미국이 언제나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 조공을 요구하거나, 한국이 미국의 속국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한미관계에는 갈등과 압박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약과 동맹, 상호 이익, 제도적 협력의 형식을 취해왔습니다. 이것을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동맹과 굴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표현입니다.
사대주의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강대국의 뜻을 자기 기준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친미는 반드시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한국의 친미 노선은 미국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생존과 자유, 경제 발전과 안보를 위해 선택한 전략이었습니다. 한국이 미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자유시장과 국제무역 질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을 “친미 사대주의”라고만 부르는 것은 현실을 보지 않는 말입니다.
미국 역시 냉전 전략과 자국 이익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 질서와 안보 체제 안에서 성장의 공간을 얻었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에서 전쟁 억지력을 확보했고, 미국 시장을 활용해 수출산업을 키웠으며, 일정 기간 자국 산업을 보호하면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식민지적 수탈과는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구조만 놓고 보면, 한국은 미국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미국은 자국 시장을 열어주었고, 한국은 그 시장을 이용해 산업화를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 일방적 조공을 요구하지 않았고, 한국의 관세 장벽과 산업정책에 대해서도 상당 기간 눈감아주었습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일반적인 식민지 관계와는 반대로 한국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안보 우산을 활용해 성장한 셈입니다. 이런 관계를 무조건 “친미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현실을 보지 않는 표현입니다.
오히려 굴종적 태도를 요구해온 쪽은 중국에 가깝습니다.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로 개입해 전쟁을 장기화시켰고, 이후에도 한반도 문제에서 자신을 당사자로 주장해왔습니다. 사드 배치 때는 한국의 안보 선택에 대해 사실상의 경제 보복을 가했습니다. 한국이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방어 체계를 배치한 것인데, 중국은 그것을 문제 삼아 관광, 유통, 문화, 기업 활동을 압박했습니다. 이것은 동맹국 사이의 협의가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의 안보 선택을 통제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말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친미 사대주의가 아니라 "친중 사대주의"입니다. 중국의 압박에는 침묵하거나 이해하려 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하는 태도야말로 불균형합니다. 미국과 협력하는 것은 사대이고,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은 실용외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외교적 균형이 아니라 언어의 편향입니다.
일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거나 일본의 역사 책임을 부정하는 태도는 분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안보·경제 협력 전체를 “친일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중국의 군사적 팽창, 공급망 재편, 해양 안보를 고려할 때 한미일 협력은 현실적으로 검토해야 할 외교 전략입니다.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과 현재의 안보 협력을 선택하는 것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강욱의 “친미·친일 사대주의”라는 표현은 보수의 외교 인식을 제대로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동맹과 사대, 협력과 굴종, 역사 인식과 안보 현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을 가능하게 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일본과의 협력 역시 역사 문제를 덮자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 판단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국의 압박과 보복에는 관대하면서 미국과 일본과의 협력만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태도야말로 더 심각한 편향입니다.
4.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과 선택적 도덕주의의 위선
이런 표현을 보면 최강욱의 역사 인식이 어디에 서 있는지 드러납니다. 그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읽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맞게 읽습니다. 미국과의 협력은 사대주의로 부르고, 중국에 대한 경계는 혐오로 부릅니다. 그러나 같은 기준을 중국에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해 수많은 한국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한 사실,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의 안보 선택에 경제 보복으로 대응한 사실, 북한 문제에서 한국의 자유와 안전보다 중국의 전략적 이해를 우선해온 사실은 그의 문장 안에서 거의 사라집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 인식은 중국의 정치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의 압박은 이해해야 할 지정학적 현실이 되고, 한국의 대중 경계는 혐오가 됩니다. 미국의 도움과 시장 개방은 제국주의의 그림자처럼 해석되고, 중국의 강압은 균형 외교의 대상으로 포장됩니다. 미국과 협력하는 한국인은 사대주의자가 되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는 태도는 신중한 외교가 됩니다. 이것이 과연 균형 잡힌 역사 인식입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시각이 미국 내부의 극좌파가 미국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미국은 언제나 제국이고, 미국이 만든 자유무역 질서와 안보 질서는 언제나 지배의 장치입니다. 반대로 중국이나 사회주의 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루거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작용처럼 설명됩니다. 그래서 한국의 일부 진보 인사들은 한국인의 경험보다 중국의 관점과 미국 극좌파의 자기혐오적 역사관에 더 가까운 언어를 사용합니다.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흔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권력에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다른 한쪽의 권력에는 지나치게 적대적입니다. 미국의 문제는 구조적 악으로 해석하면서, 중국의 폭력과 압박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보수의 위험 인식은 혐오라고 부면서, 진보의 반미·친중 정서는 평화와 균형이라는 말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진짜 인본주의라면 기준은 하나여야 합니다. 미국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으면 미국을 비판해야 하고, 중국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면 중국을 비판해야 합니다.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왜곡하면 일본을 비판해야 하고, 북한이 주민을 억압하고 한국인을 위협하면 북한을 비판해야 합니다. 기준은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인간이어야 합니다. 국가와 이념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와 존엄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강욱의 문장은 균형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는 보수의 외교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정당한 위험 인식을 혐오와 사대주의라는 감정적 낙인으로 바꿉니다. 중국에 대한 경계는 혐오가 아니라 역사적 기억과 안보 판단일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협력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한국의 생존과 발전을 가능하게 한 전략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일본과의 협력 역시 역사 문제를 잊자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구분을 지웁니다. 미국은 사대의 대상, 일본은 친일의 대상, 중국 경계는 혐오의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도덕적 구도를 역사 위에 덮어씌우는 방식입니다. 결국 그의 글은 보수를 비판하는 글이라기보다, 진보가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온 반미·반보수·친중적 역사관을 반복하는 글에 가깝습니다.
5. 결론: 진짜 위선과 맞서야 할 때
앞으로 따져봐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 인권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기준을 모든 권력에 똑같이 적용해왔습니까. 미국의 잘못에는 엄격하면서 중국의 폭력에는 왜 관대했습니까. 일본의 역사 왜곡에는 분노하면서 북한과 중국의 인권 탄압에는 왜 말을 아꼈습니까. 보수의 위험 인식은 혐오라고 부르면서, 진보의 반미 정서는 왜 비판적 지성이라고 부릅니까.
이제 앞으로 이들의 위선은 하나하나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진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보편적 기준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선택적 기준을 적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말하면서 자기 편 권력의 폭력에는 눈을 감고,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반대편 시민의 의심과 불안을 망상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비판받아야 할 위선입니다.
최강욱은 이후에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갖게 되는 원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지면의 상당 부분을 보수 비난에 할애합니다. 그의 잘못된 역사관과 인식론적 문제가 반복되지만, 그 부분은 이 사이트에서 더 다룰 문제가 아니므로 이것으로 최강욱의 글에 대한 평가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