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파시즘은 정말 그렇게 작동하는가 — 제이슨 스탠리의 《How Fascism Works》 비판


제이슨 스탠리의 《How Fascism Works》가 제시하는 파시즘의 10가지 요소가 가진 언어 중심적 한계와 보수주의를 파시즘으로 과잉 확장하는 오해를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연구와 비교 분석합니다.

제이슨 스탠리의 책과 파시즘 체크리스트, 의회와 대중선동을 상징하는 정치철학 일러스트

제이슨 스탠리의 《How Fascism Works》 비판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본 제목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책 제목과 부제가 바뀌어 있는 느낌입니다.

파시즘은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입니다. 파시즘을 비판하는 책을 다시 비판하면, 자칫 파시즘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은 별로 관련도 없는 것을 파시즘으로 비난하기 전까지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엄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파시즘이라는 말이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욕설로 변해버리면, 우리는 정작 파시즘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제이슨 스탠리의 《How Fascism Works》는 이런 위험을 경고하려는 책입니다. 그는 파시즘을 이미 완성된 독재체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도 파시즘 정치의 언어와 기술에 조금씩 침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탠리가 제시하는 파시즘 정치의 열 가지 요소는 신화적 과거, 선전, 반지성주의, 비현실성, 위계질서, 피해자 의식, 법과 질서, 성적 불안, 농촌과 전통적 중심지의 이상화, 공공재와 노동조합의 해체입니다. 출판사 역시 이 책을 이러한 열 가지 기둥을 통해 우파 정치인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분석한 책으로 소개합니다.

처음 보면 이 목록은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위대한 과거의 회복을 약속했고, 반대자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으며,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대학과 언론을 공격했고, 지도자를 민족의 운명과 동일시했습니다. 파시즘이 사람들의 불안, 굴욕감, 피해의식, 성적 공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설명도 충분히 타당합니다.

문제는 스탠리가 이러한 특징을 역사적 파시즘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개념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를 오늘날의 정치, 특히 미국과 유럽의 보수정치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확장합니다.

그 순간부터 파시즘의 경계는 지나치게 넓어집니다.

파시즘을 설명하는 책인가, 보수정치를 파시즘으로 만드는 책인가

스탠리는 ‘파시즘 체제’와 ‘파시즘 정치’를 구분합니다.

파시즘 체제는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민족을 대표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반면 파시즘 정치는 그런 체제가 완성되기 전에도 존재할 수 있는 언어와 선동의 기술입니다. 어떤 국가가 아직 파시즘 국가가 아니더라도 파시즘 정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탠리 자신도 “국가가 파시즘 국가가 아니더라도 파시즘 정치로 고통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일견 합리적입니다. 파시즘이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정치도 처음에는 선거와 언론, 법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파시즘 체제가 수립되기 전의 징후를 연구할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파시즘 정치’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넓히면 거의 모든 보수정치가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전통을 긍정하면 신화적 과거입니다.
치안을 강조하면 법과 질서 정치입니다.
대학을 비판하면 반지성주의입니다.
이민을 제한하면 타자에 대한 공포입니다.
가족과 성규범의 변화를 우려하면 성적 불안입니다.
복지 의존을 비판하면 파시즘적 노동윤리입니다.
지방과 농촌의 소외를 말하면 심장부의 신화입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파시즘과 보수주의를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보수주의자도 전통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한다고 반드시 과거의 민족적 순수성을 복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범죄와 치안을 우려한다고 국가폭력을 숭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학이나 언론의 편향을 비판한다고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민정책의 비용과 사회통합 문제를 제기한다고 특정 민족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파시스트가 사용하는 말을 다른 정치세력도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공통된 특징과 동일한 정치현상은 다릅니다

스탠리의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가 반복됩니다.

  1. 역사적 파시스트는 특정한 정치 언어를 사용했다.
  2. 현대의 우파 정치인도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3. 따라서 그 언어는 파시즘 정치의 일부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파시스트는 민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족을 강조하는 모든 사람이 파시스트인 것은 아닙니다. 파시스트는 범죄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범죄 증가를 우려하는 모든 정치가 파시즘인 것은 아닙니다. 파시스트는 가족의 가치를 말할 수 있지만,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시민이 파시스트는 아닙니다.

모든 파시스트가 A라는 특징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A라는 특징을 가진 모든 사람이 파시스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How Fascism Works》는 이러한 구분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책의 열 가지 요소는 파시즘에서 실제로 발견되지만, 파시즘에만 고유한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신화적 과거는 공산주의와 민족해방운동에서도 나타납니다. 선전과 거짓말은 모든 권위주의 체제가 사용합니다. 반지성주의는 우파 대중운동뿐 아니라 혁명적 좌파 운동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피해자 의식과 적대적 집단 구분은 현대의 정체성 정치 전반에 존재합니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 노동의 미덕, 성규범을 둘러싼 갈등 역시 파시즘에만 특유한 현상이 아닙니다.

파시즘을 정의하려면 이런 일반적인 정치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들이 어떤 정치적 구조와 목적을 향해 결합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파시즘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정치운동입니다

파시즘 연구자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을 말과 이념의 목록으로만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파시즘이 사회적 위기 속에서 등장하고, 대중운동으로 성장하며, 기존 보수 엘리트와 결합해 권력을 획득하고, 국가기관을 장악한 뒤 급진화하거나 전통적인 권위주의로 변하는 과정을 분석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파시즘의 다섯 단계’는 파시즘을 정적인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정치적 발전 과정으로 다룹니다.

팩스턴의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단순히 거친 말을 사용하는 정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파시즘에는 대중적 민족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당 조직과 거리의 폭력조직이 있습니다.
기존 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 있습니다.
전통 엘리트와의 불안정한 연합이 있습니다.
민주적 자유의 폐기가 있습니다.
반대파에 대한 물리적 정화가 있습니다.
내부의 적을 제거하고 외부로 팽창하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파시즘의 핵심은 어떤 정치인이 전통이나 범죄를 언급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상상하고, 지도자가 그 공동체의 의지를 독점하며, 반대자를 정당한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이물질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파시즘을 판별할 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 그 정치세력은 자유로운 권력교체를 인정하는가?
  • 반대파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가?
  •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허용하는가?
  • 정치적 폭력을 정당한 수단으로 사용하는가?
  • 국가와 지도자를 동일시하는가?
  • 개인의 권리를 민족이나 집단의 목적에 종속시키는가?
  •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추방해야 할 존재로 보는가?

이런 제도적·행동적 기준이 없다면 파시즘은 단지 불쾌한 정치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스탠리는 왜 제도보다 언어를 보는가

스탠리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어와 선전, 인식론을 연구해온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그가 파시즘을 정치적 언어와 인식 구조의 문제로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파시즘 정치가 사회를 ‘우리’와 ‘그들’로 분리하고, 공통의 사실을 붕괴시키며, 국민이 객관적 제도보다 지도자의 말에 의존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이 설명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상대방의 시민권과 기본적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하고, 최소한의 공통 사실도 공유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거짓말의 목적도 특정한 거짓을 믿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체념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론, 법원, 학자, 행정기관을 모두 불신하면 결국 자신이 충성하는 지도자나 진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스탠리의 분석은 상당히 유용합니다.

그러나 언어에 집중할수록 정치적 맥락과 실제 결과가 사라집니다.

정부의 통계를 비판하는 것과 통계 작성기관을 폐쇄하는 것은 다릅니다. 대학의 편향을 비판하는 것과 학문의 자유를 제거하는 것은 다릅니다. 언론 오보를 비판하는 것과 언론사를 폐쇄하거나 기자를 투옥하는 것은 다릅니다. 선거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과 선거에 패배한 뒤 권력교체를 거부하는 것도 다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제도에 대한 비판이 곧 제도 파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도의 오류를 비판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합니다.

스탠리의 기준은 이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좌파 권위주의에는 왜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가

피터 러들로가 제기한 중요한 비판은 스탠리의 분석이 우파 권위주의에는 민감하지만 좌파 권위주의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는 점입니다. 러들로는 스탠리가 보수주의, 인종주의, 포퓰리즘, 권위주의를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모으면서도, 좌파의 권위주의적 정치에는 같은 분석을 충분히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스탠리가 제시하는 파시즘 정치의 기술은 좌파 정치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좌파 운동도 신화적 과거를 만듭니다. 과거의 순수한 공동체나 식민지 이전의 조화로운 사회를 상상하기도 하고, 반대로 혁명 이후 도래할 완전한 미래를 약속하기도 합니다.

좌파 정치도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억압자와 피억압자, 진보와 반동, 인민과 인민의 적이라는 구분은 전형적인 집단정치의 언어입니다.

좌파 운동도 반지성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학문적 증거나 통계가 정치적 목적과 충돌할 때 그것을 지배계급의 지식, 식민주의적 과학, 억압자의 언어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피해자 의식을 동원합니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피해자 집단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그 대표성을 바탕으로 반대 의견을 부도덕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좌파도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폭력이다”, “중립은 가해자의 편이다”라는 문장은 사람들에게 진영 선택을 강요합니다.

좌파 혁명정권 역시 언론을 통제하고 대학을 숙청하며, 반대자를 제거하고, 지도자를 숭배하고, 공식적인 진실을 강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파시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파시즘에만 고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스탠리가 발견한 것은 파시즘의 독특한 작동 방식이라기보다 "권위주의적 집단정치 전반의 작동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보다 《권위주의적 정치선동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더 정확했을 것입니다.

‘우리와 그들’은 파시즘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탠리에게 파시즘 정치의 핵심은 사회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어느 정도 경계를 만듭니다. 정당은 자신과 상대를 구분하고, 국가는 시민과 비시민을 구분하며, 법은 합법과 불법을 구분합니다. 정치적 판단은 무엇을 지킬 것인지, 어떤 행동을 허용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분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입니다.

민주주의의 경계는 원칙적으로 가변적입니다. 오늘의 반대자가 내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정책에 반대하더라도 시민의 권리는 유지됩니다. 정치적 패배는 인간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뜻하지 않습니다.

파시즘의 경계는 다릅니다. 그들은 반대자를 경쟁자가 아니라 배신자, 기생충, 오염물질로 봅니다. 상대는 설득하거나 선거에서 이길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존재가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스탠리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렇게 되면 국경, 시민권, 범죄, 사회적 의무를 논하는 정상적인 정치까지 파시즘적 배제의 언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법과 질서는 파시즘의 증거인가

스탠리의 분류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법과 질서’입니다.

역사적 파시즘은 분명 법과 질서의 언어를 이용했습니다.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고 주장하고, 범죄와 도덕적 타락을 과장하며, 강력한 지도자만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법과 질서 자체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기도 합니다.

국가가 폭력과 범죄를 통제하지 못하면 약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봅니다. 재산권과 신체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시민의 자유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법치주의는 권위주의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자의 자의적 통치를 제한하는 장치입니다.

따라서 파시즘적 법질서와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권력자에게도 같은 법을 적용합니다.
  • 파시즘적 질서는 지도자의 의지를 법보다 위에 둡니다.
  •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합니다.
  • 파시즘적 질서는 국가나 민족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킵니다.
  •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범죄행위에 책임을 묻습니다.
  • 파시즘적 질서는 특정 집단의 존재 자체를 범죄화합니다.

이 구분 없이 ‘법과 질서’를 파시즘의 징후로 제시하면 정상적인 국가 기능을 요구하는 시민까지 의심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반지성주의라는 편리한 방패

대학과 전문가에 대한 공격도 스탠리가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입니다. 파시즘이 독립적인 지식기관을 불편해한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는 정부의 공식 서사에 도전하는 학자, 언론인, 연구기관을 억압하려 합니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도 오류와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대학은 특정 이념에 편향될 수 있습니다. 연구는 재현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실을 잘못 보도할 수 있습니다. 행정기관은 정치적 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합의가 충분한 근거 없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험주의와 과학적 검증의 일부입니다.

반지성주의는 전문가가 틀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지식 자체가 불필요하며 지도자의 직관이나 대중의 분노가 증거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학의 편향을 비판하는 것과 대학을 없애려는 것은 다릅니다.
과학자의 오류를 검증하는 것과 과학을 음모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언론 오보를 지적하는 것과 모든 언론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스탠리의 설명은 이 경계를 충분히 세밀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존 지식기관을 비판하는 정당한 행위까지 파시즘 정치의 전조로 해석될 위험이 있습니다.

피해자 의식도 한쪽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스탠리가 가장 잘 포착한 요소 중 하나는 피해자 의식입니다.

권력을 가진 다수집단도 자신을 피해자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변화하고 기존 규범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실제 생존을 위협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무시당하고 밀려난다고 느낍니다. 정치인은 이 감정을 이용해 “당신의 나라를 빼앗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통찰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피해자 정치 역시 우파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현대의 진보정치 또한 집단적 피해의식을 강력한 정치 자원으로 사용합니다. 과거의 피해를 현재 구성원 전체의 도덕적 지위로 확장하고, 피해자 집단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비판에서 면제되기도 합니다.

집단의 피해가 실제라고 해서 그 집단의 모든 주장이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집단이 다수이거나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해서 그들이 느끼는 문화적 상실감이 모두 허위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과 책임입니다.

  • 누가 무엇을 했는가?
  • 어떤 권리가 침해되었는가?
  •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가?
  • 누가 그 피해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파시즘이 피해자 의식을 이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자 의식을 이용한다고 모두 파시즘인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말하면 파시즘인가

스탠리는 파시즘이 신화적인 과거를 만든다고 봅니다. 파시즘은 과거에 민족이 순수하고 위대했으나 외부인과 내부의 배신자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합니다. 지도자는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파시즘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과거를 중시하는 이유와 파시즘이 과거를 이용하는 이유는 다릅니다.

보수주의자는 과거가 완벽해서 지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유지된 제도와 관습에는 우리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진적 해체보다 점진적 개혁을 선호합니다.

반면 파시즘은 실제 과거를 보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를 선택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혁명국가를 만들려 합니다. 파시즘의 과거는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전체주의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화입니다.

이 점에서 파시즘은 보수주의라기보다 혁명적입니다.

파시즘은 기존의 의회, 법률, 계급질서, 종교기관, 지역공동체를 그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모두 국가의 목적에 복종시킨다. 전통은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재료가 됩니다.

따라서 과거를 긍정한다는 공통점만으로 보수주의와 파시즘을 연결하는 것은 피상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경험의 축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민족적 재탄생을 위한 신화로 사용하는가입니다.

파시즘의 경제와 국가 동원이 빠져 있습니다

역사적 파시즘은 단순한 문화적 편견이나 우익 선동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와 사회 전체를 하나의 목표 아래 동원하려는 정치체제였습니다.

파시즘 체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자율적 조직을 억제하고 국가가 중재하는 조합주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시민사회와 경제조직은 독립성을 잃고 국가 목적에 종속되었습니다. 교육, 문화, 청소년 조직, 언론, 노동, 기업이 모두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총동원적 성격은 파시즘과 일반적인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전통적 보수주의는 국가 밖의 자율적인 제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가족, 교회, 지역공동체, 기업, 사적 결사체가 국가와 별개의 권위를 가진다고 봅니다. 파시즘은 이런 중간조직을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지도자와 국가에 복종시킵니다.

스탠리의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구조와 사회동원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대신 인종, 성, 도시와 농촌, 언어와 심리적 불안에 분석의 중심이 놓입니다.

그 결과 파시즘은 국가와 사회를 강제로 통합하는 전체주의적 프로젝트라기보다, 편견과 불안감을 동원하는 우파 정치의 한 유형처럼 보입니다.

파시즘은 전통 보수주의의 극단이 아닙니다

현대 정치담론에서는 파시즘을 보수주의가 계속 오른쪽으로 이동했을 때 도달하는 최종 단계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보수주의와 파시즘의 구분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우파적이지만 보수주의자는 아닙니다파시즘은 그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에서 다룬 분석과 일관됩니다. 파시즘은 전통의 보존이 아닌 국가권력을 통한 신질서 창조를 추구한 혁명적 우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보수주의의 관계는 더 복잡합니다.

파시스트는 기존 보수 엘리트와 협력했습니다. 공산주의와 혁명을 두려워한 보수 정치인들이 파시스트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팩스턴의 연구가 강조하듯 파시즘이 권력을 얻는 과정에는 기존 엘리트와의 협력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협력했다고 같은 사상은 아닙니다.

  • 보수주의는 질서와 연속성을 중시합니다.
  • 파시즘은 국가적 재탄생을 위한 혁명을 추구합니다.
  • 보수주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정치의 한계를 강조합니다.
  • 파시즘은 지도자의 의지로 새로운 인간과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보수주의는 사회의 자율적 중간조직을 중시합니다.
  • 파시즘은 모든 조직을 국가의 목적에 동원합니다.
  • 보수주의는 권력을 경계하고 분산시키려 합니다.
  • 파시즘은 권력을 지도자에게 집중합니다.
  • 보수주의는 경험과 관습을 존중합니다.
  • 파시즘은 신화와 의지를 앞세웁니다.

파시즘은 보수주의적 언어를 차용할 수 있지만, 그 정치적 방식은 오히려 사회공학적이고 혁명적입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보수주의와 파시즘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이 책의 장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고 《How Fascism Works》가 가치 없는 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언어와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쉽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경제정책이나 헌법 조항만으로 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모욕감, 상실감, 성적 불안, 집단적 자부심, 두려움과 분노가 정치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정치지도자는 이런 감정을 조직해 지지자에게 적을 제공합니다.

스탠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위험을 잘 설명합니다.

  • 지도자가 자신만이 진정한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
  • 반대파를 정당한 경쟁자가 아니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
  • 사실을 검증하는 독립기관을 공격하는 것
  • 사회적 불안을 소수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것
  • 자신이 다수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해자로 행동하는 것
  • 성적·문화적 변화를 국가의 생존 위기로 과장하는 것

이런 현상은 실제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책은 이러한 선동의 언어를 경계하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파시즘의 완전한 분석이라기보다 권위주의적 선동의 위험을 설명하는 입문서로 읽어야 합니다.

좋은 경고문이지만 나쁜 판별기

《How Fascism Works》의 문제는 경고가 틀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경고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데 있습니다.

스탠리가 지적하는 정치기술은 실제로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 기술 대부분은 파시즘에만 고유하지 않습다. 민주주의자도 과거를 말하고, 보수주의자도 법질서를 말하며, 사회주의자도 피해자 의식을 동원하고, 공산주의자도 반지성주의와 선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어떤 정치세력이 스탠리의 열 가지 항목 가운데 몇 가지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파시즘을 판단하려면 수사법과 함께 제도적 행동을 보아야 합니다.

  • 정치적 폭력을 조직하는가?
  • 선거 패배와 권력교체를 거부하는가?
  • 반대파의 시민권을 부정하는가?
  • 사법부와 언론을 지도자에게 종속시키는가?
  • 사회 전체를 국가 목적에 동원하려 하는가?
  • 법적 제한 없이 내부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면 ‘파시즘’이라는 판정은 정치적 분석이 아니라 도덕적 낙인이 되기 쉽습니다.

결론

제이슨 스탠리의 《How Fascism Works》는 파시즘의 역사와 제도를 깊이 설명하는 책은 아닙니다. 현대 우파 정치의 언어 속에서 파시즘과 닮은 요소를 찾아내고 경고하는 정치비평서에 가깝습니다.

책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파시즘적 선동이 과거의 신화, 피해자 의식, 성적 불안, 반지성주의와 적대적 집단 구분을 이용한다는 점을 쉽고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이 아니라 공통의 사실과 상대방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문화 위에 서 있다는 점도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파시즘의 특징과 파시즘에만 고유한 특징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수사와 제도를 혼동하고, 보수주의와 파시즘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며, 같은 권위주의적 기술이 좌파 정치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 결과 파시즘을 정확하게 식별하기보다, 현대의 보수정치를 파시즘의 전조로 해석하는 체크리스트가 되기 쉽습니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강력합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전통을 말한다고 파시즘은 아닙니다.
국경을 말한다고 파시즘은 아닙니다.
범죄와 질서를 말한다고 파시즘은 아닙니다.
대학과 언론을 비판한다고 파시즘은 아닙니다.

파시즘은 단지 불쾌한 말이나 강경한 정책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민족의 의지를 독점하고, 개인과 사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며, 반대자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만들고, 정치적 폭력을 통해 새로운 국가와 인간을 창조하려는 전체적 정치운동입니다.

이 구분을 잃는 순간 파시즘 비판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해집니다. 모든 것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면, 결국 아무것도 정확하게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련 태그:
← 정원 첫 화면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