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 ①] 보수주의자는 왜 헤게모니를 원하지 않는가](/_next/image?url=%2Fimages%2Fwhy-conservatism-does-not-seek-hegemony.png&w=3840&q=75)
1. 보수주의는 산처럼 남고, 진보주의는 물처럼 흐른다
보수주의는 산과 비슷합니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머뭅니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산은 오랜 시간 동안 마을의 방향을 정하고 물길을 나누며 숲과 토양을 지탱해 왔습니다.
진보주의는 물과 비슷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으며, 좁은 틈으로 스며들고 때로는 기존의 제방을 무너뜨립니다. 한 시대의 진보 사상이 힘을 잃으면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물러난 자리에는 신좌파가 등장했고, 계급투쟁의 언어가 약해지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정체성 정치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사상은 내용도 다르고 때로는 서로 모순됩니다. 초기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객관적인 법칙이 있다고 믿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와 거대서사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웠지만, 후기의 진보 사상은 계급보다 성별, 인종, 문화, 젠더와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상들 사이에는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을 바꾸려 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법률 몇 개를 고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무엇을 정의롭다고 생각하는지, 누구를 피해자로 보고 누구를 가해자로 보는지, 어떤 말을 정상적인 표현으로 인정하는지까지 바꾸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헤게모니를 추구했습니다."
2. 권력보다 더 깊은 권력
헤게모니는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거나 정권을 잡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권은 몇 년마다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상식과 도덕적 언어를 지배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그 영향력은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어떤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규정하고, 어떤 표현을 혐오로 규정하며, 특정 집단을 역사적 가해자로 설명하는 기준이 사회 전체에 받아들여진다면 이미 중요한 승부는 끝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강제로 명령받지 않아도 스스로 그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학교는 그 기준에 따라 가르치고, 언론은 그 기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기업은 그 기준에 따라 광고와 인사 정책을 바꿉니다. 법원과 행정기관도 결국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헤게모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직접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무엇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를 먼저 결정하는 힘입니다. 어떤 문제를 불평등으로 부를 것인지, 어떤 차이를 차별로 해석할 것인지, 어떤 갈등을 억압이라고 규정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일단 이런 정의가 사회의 상식이 되면, 그다음의 정치적 결론은 상당 부분 자동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진보주의는 이 점을 비교적 일찍 이해했습니다. 정치권력은 문화적 권력 위에 세워지므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도덕적 직관을 장악하면 선거에서 잠시 패배하더라도 사회가 움직이는 방향 자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이 중요한 문제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3. 보수주의자는 왜 헤게모니를 경계하지 않았는가
보수주의자가 헤게모니 경쟁에서 뒤처진 이유를 흔히 무능이나 전략 부족에서 찾곤 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조직적이고 영리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애초에 사회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일하려는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역사관, 같은 도덕관, 같은 정치적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가치와 생활방식을 가질 수 있으며, 법을 지키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주의자에게 사회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가족, 학교, 시장, 종교, 지역공동체, 직업집단이 서로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복잡한 생태계에 가깝습니다. 가족은 애정과 책임의 원리로 움직이고, 시장은 교환과 경쟁의 원리로 움직입니다. 학문은 사실과 검증을 추구하고, 법은 절차와 권리를 다룹니다. 이 모든 영역을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 통일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학교가 특정 이념의 전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가르치면 되고,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고,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며, 기업은 제품을 만들면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순진함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고유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진보주의자는 모든 제도 안에서 권력관계를 찾아내며 사적인 것도 정치적이라고 말하지만, 보수주의자는 모든 제도가 정치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며 정치가 침범해서는 안 되는 사적인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헤게모니에 관심이 적었던 것은 단순히 싸움에서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모든 사람의 의식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리트리버는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리트리버와 늑대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리트리버는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안정되어 있으면 굳이 모든 구성원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먹이와 안전이 확보되고 서로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상대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는지, 자신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인정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의 사회관도 이와 비슷합니다. 상대가 법을 지키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져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올바른 의식을 가져야 사회가 유지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늑대적 정치운동은 다릅니다. 늑대에게 세상은 공존하는 생활공간이 아니라 서열과 지배를 둘러싼 투쟁의 공간입니다.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복종하는지가 전적으로 중요합니다. 상대가 중립을 선언해도 그대로 믿지 않으며, 중립 역시 기존 지배질서를 돕는 방관 행위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모든 관계가 권력관계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 남성과 여성, 교사와 학생, 의사와 환자, 다수와 소수, 언어와 지식까지도 모두 권력으로 치환됩니다. 권력이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가 침투해서는 안 되는 사적 영역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권력이라면 모든 것이 투쟁의 대상이 되고, 그 투쟁에는 필연적으로 적이 필요해집니다.
5. 늑대는 잡아먹을 명분을 찾는다
동물은 먹이를 먹기 위해 도덕적 명분을 만들지 않지만, 인간의 정치운동은 다릅니다. 사람을 공격하고 배제하며 재산과 권리를 빼앗으려면, 먼저 그것을 정당화할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상대를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착취자, 반동, 특권집단, 가부장적 지배자, 혐오세력으로 규정해야 비로소 상대에 대한 공격이 방어로 보이고, 권력을 빼앗는 일이 지배가 아니라 해방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늑대가 잡아먹을 명분을 찾는다는 말의 정치적 의미입니다. 먼저 먹잇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거나 굴복시키고 싶은 대상을 정한 뒤 그 대상을 공격해도 되는 도덕적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그 대상은 부르주아와 지주였습니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순히 견해가 다른 시민이 아니라 역사의 진행을 가로막는 반동이 되었고, 그들의 재산과 권리를 빼앗는 일은 강탈이 아니라 착취의 종식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후의 급진적 사상에서도 억압의 주체와 피해의 주체를 설정해 사회를 두 진영으로 나누고, 자신의 권력 획득을 지배가 아닌 해방이라 부르는 비슷한 구조가 반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적을 규정하고 그 배제를 해방으로 바꾸는 문법을 계급 이론으로 정교화한 사상이 바로 다음 글에서 살펴볼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하느냐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현실의 불의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지만, 그 불의를 해결하는 것과 사회 전체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재구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구체적인 부당행위를 교정하는 데는 증거와 절차가 필요하지만, 한 집단 전체를 구조적 가해자로 규정하면 개별적 증거는 부차적이 됩니다. 그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책임의 근거가 되면서, 이때의 도덕은 폭력을 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폭력을 허가하는 면허가 됩니다.
6. 물은 지나가도 물길은 남는다
진보주의 사상은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이 다음 시대에는 낡은 이론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과거보다 줄었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학계에서 전성기를 지난 사조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사상이 만든 지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흘러가지만 물길은 남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이론은 약해졌지만 사회를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남았으며, 계급이라는 말 대신 인종, 성별, 젠더, 정체성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은 덜 사용되지만, 객관적 진리를 권력의 산물로 의심하고 발언자의 정체성에 따라 말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태도는 남아 있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일부 이론은 비판받았지만, 가족과 성관계와 언어를 정치적 권력의 문제로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제도 속에 깊게 고착되었습니다.
과거의 사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퇴적되었으며, 새로운 사상이 그 위를 흐르며 이전의 개념과 전략을 재활용합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의 역사는 단순히 사상이 교체된 역사가 아니라,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언어가 교체된 역사"입니다.
7. 산은 물이 자신을 깎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안다
산은 물과 경쟁하지 않으며 물이 흘러간다고 해서 물을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산은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한 지형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자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신이 상대의 생각을 통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도 자신을 통제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학교와 언론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상대도 그것을 중립적인 제도로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운동은 중립적인 공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세계관이 지배하지 않는 영역은 아직 해방되지 않은 영역이며,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제도는 기존 권력에 봉사하는 기득권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주의자의 무관심은 관용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에게 점령 가능한 빈 공간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대학과 언론, 출판과 문화, 학교와 행정기관에서 한쪽의 세계관이 우세해진 뒤에야 보수주의자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상대가 문제를 정의하는 언어와 도덕적 기준을 장악한 뒤입니다. 보수주의자가 항의하면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라 불리고, 기존 기준을 지키려 하면 특권을 방어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며, 정치화를 반대하면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지배질서를 옹호한다고 비판받게 됩니다. 산은 그대로 있었지만 산을 설명하는 지도는 이미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8. 보수주의자는 늑대가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보수주의도 헤게모니를 추구해야 할까요? 진보주의가 학교와 언론과 문화를 장악했다면, 보수주의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보수주의는 자신이 비판하던 그 운동과 정확히 같아지게 됩니다.
보수주의의 목표는 진보적 헤게모니를 보수적 헤게모니로 바꾸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교사와 언론인과 예술가가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사회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일하려는 또 다른 지배 시도일 뿐입니다. 리트리버는 늑대를 이기기 위해 스스로 늑대가 될 필요가 없지만, 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것은 하나의 올바른 사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사상도 교육과 언론과 행정과 학문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다원주의입니다. 학교에서는 정치적 신념보다 지식과 사실을 가르쳐야 하고, 대학에서는 결론의 도덕성보다 논증과 증거를 평가해야 하며, 언론에서는 기사와 의견을 구분해야 하고, 법률은 집단의 정체성보다 개인의 행위와 책임을 다루어야 합니다.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은 허용하되 어느 한쪽도 심판과 선수의 지위를 동시에 차지하지 못하게 차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수주의가 헤게모니 경쟁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이고 문명적인 방식입니다.
결론: 리트리버의 약점
보수주의자의 가장 큰 약점은 악해서가 아니라, 상대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으므로 상대도 공존을 원할 것이라고 믿고, 자신이 모든 생활영역을 정치화하지 않으므로 상대 역시 정치와 사생활의 경계를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사람에게 공존은 잠정적인 휴전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중립적인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아직 장악하지 못한 제도만이 존재합니다. 보수주의자는 이 치명적인 차이를 너무 늦게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늑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수주의의 장점은 인간을 완성하거나 사회를 하나의 목적 아래 통일하려 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점을 버리고 또 다른 헤게모니를 만든다면 보수주의가 존재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집니다.
필요한 것은 포식성이 아니라 경계심입니다. 산은 물의 흐름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물이 산을 깎고 마을을 휩쓸기 시작할 때는 제방을 세워야 합니다. 리트리버는 늑대처럼 사냥할 필요는 없지만, 늑대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꼬리를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보수주의는 헤게모니를 원하지 않지만, 헤게모니를 원하는 사상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 [시리즈] 보수주의는 산처럼 남고, 진보주의는 물처럼 흐른다
- [1편] 보수주의자는 왜 헤게모니를 원하지 않는가 (현재 글)
- [2편]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적을 만들었는가
- [3편] 사람이 넘쳐나던 시대의 사상
- [4편] 그람시는 왜 공장보다 학교를 보았는가
- [5편] 페미니즘은 어떻게 사생활을 정치화했는가
- [6편]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적을 만들었는가
- [7편]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는가
참고문헌
-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
- Michael Oakeshott, Rationalism in Politics and Other Essays, Liberty Fund, 1991.
- Roger Scruton, How to Be a Conservative, Bloomsbury Publishing, 2014.
- Friedrich A. Hayek, 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