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우리나라 보수정당의 대통령은 보수주의자였을까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과 이명박을 동일한 보수주의의 기준으로 살펴보고, 보수정당의 대통령과 철학적 보수주의자가 같은 말인지 묻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층위에 뿌리내린 나무를 함께 가꾸는 20·30대와 역대 대통령의 실루엣

한국에서는 보수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보수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대통령과 보수주의자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보수주의는 단순한 반공이나 친기업,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회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경계하고, 검증된 제도와 헌법적 절차, 개인의 권리와 재산, 질서와 공동체의 연속성, 점진적 변화를 중시하는 입헌적 보수주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한국 보수가 역사적으로 국가건설과 반공, 산업화를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연합이 이런 보수철학과 얼마나 일치했는지를 묻기 위한 기준입니다.

물론 보수주의 안에도 여러 흐름이 있습니다. 헌법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보수주의만이 아니라 전통적 공동체와 도덕을 강조하는 전통주의, 국가질서와 안보를 앞세우는 권위주의적 보수, 무너진 옛 질서를 되돌리려는 반동주의도 보수의 이름으로 등장해 왔습니다. 다만 이 글은 그 모두를 같은 의미의 보수주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통을 지키겠다는 목표가 같더라도 헌법을 중단하고 권력을 집중하며 위로부터 사회를 다시 설계한다면, 그것은 입헌적 보수주의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이러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되 입헌성, 점진성, 권력에 대한 회의를 공통의 평가 기준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보수주의를 평가하려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바꾸려 했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헌법과 절차를 존중했는가, 국가가 사회를 중앙에서 설계하려 했는가, 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했는가, 현실의 실패를 보고 정책을 수정했는가를 같은 기준으로 물어야 합니다.

이 글은 한국 보수정치의 서로 다른 형성 단계를 보여주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과 이명박을 대표 사례로 살펴봅니다. 네 사람만으로 모든 보수정권을 최종 판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부정치와 민주화 이행을 함께 살펴야 하고, 박근혜와 윤석열은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과 파면이라는 헌정사적 쟁점을 중심으로 검토해야 하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룹니다. 따라서 이 글의 결론은 한국의 모든 보수정권에 대한 최종 판정이 아니라, 네 대표 사례를 통해 보수정당의 집권과 철학적 보수주의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았음을 살펴본 결과입니다.

이승만은 공화국을 만든 급진적 국가건설자였다

이승만은 오늘날 한국 보수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출발부터 일관된 보수주의자였다기보다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만들려 한 국가건설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왕정과 신분질서를 보존하려 한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공화국과 국민국가를 만들고,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보통선거를 통해 전통사회를 빠르게 바꾸려 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지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그가 미국에서 교육받으며 접한 지적 환경도 오늘날 한국에서 생각하는 보수주의와는 달랐습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당시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훗날 민주당 대통령이 됐고, 이승만은 윌슨이 내세운 공화주의와 민족자결주의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와 기독교 사회개혁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육과 국민국가, 사회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진보주의 시대의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의 미국 인맥 전체가 민주당계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인맥은 정당보다 개신교와 독립운동,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공화당 인사들과도 접촉했습니다. 윌슨 행정부도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 한국 독립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실제 외교정책으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상적 영향과 정당의 정치적 지원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공화국을 세웠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집권 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권력 제한과 헌법적 절차를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에 맞서 국가의 생존과 질서를 지키려 했다는 점은 보수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공화국의 절차를 일관되게 존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전통적 질서를 보존한 보수주의자라기보다 훗날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 한 대한민국을 건설한 인물이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그 국가를 보존하려 했지만, 그 방법까지 입헌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보수주의자보다 국가주의적 개발주의자였다

박정희 역시 처음부터 철학적으로 일관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사정변과 국가개조,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국가의 의지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가는 경제의 중심적이고 지시적인 역할을 맡았고, 점진적 변화보다 계획과 동원을 중시했습니다. 이는 보수적 회의주의보다 국가주의적 사회공학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경제와 안보를 직접 다루면서 현실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기술과 자본, 시장, 관료조직과 기업가의 능력은 구호나 의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기업과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고 정책을 수정한 점에서는 경험을 통해 학습한 정치가였습니다.

로버트 콩퀘스트의 제1법칙으로 흔히 인용되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는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이 말은 경제와 안보를 직접 경험한 박정희가 왜 구호보다 능력과 결과를 중시하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현실주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곧 보수주의자가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 육성에서도 국가가 정치와 산업의 방향을 정하고 사회를 동원하려는 태도는 계속됐습니다. 박정희는 반공과 질서, 국가의 연속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헌법적 절차와 점진적 변화, 국가설계에 대한 회의라는 기준에서는 보수주의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해석의 여지는 있습니다. 유신체제를 서구식 자유보수주의가 아니라 국가를 확대된 가족처럼 보고 위계와 의무, 지도자의 책임을 중시한 유교적 질서관의 현대적 변형으로 해석한다면, 박정희는 권위주의적 전통주의 보수를 시도한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국가가 필요에 따라 전통을 골라 새 질서를 설계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유신은 이미 존재하던 관습과 중간공동체를 점진적으로 보존했다기보다 헌법을 바꾸고 권력을 집중해 국민과 산업을 국가 목표에 맞추려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통치 방식은 버크적 전통주의보다 국가주의적 사회공학에 더 가까웠다는 평가가 남습니다.

박정희는 진보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이동했다기보다, 강한 국가개조론자가 시행착오를 통해 시장과 기업의 현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된 개발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김영삼은 보수연합을 이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다

김영삼은 보수정당의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민주화운동과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 속에서 형성됐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에 맞선 야당 지도자였고, 3당 합당을 통해 보수정당 연합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집권 뒤에는 그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추진해온 민주화와 개혁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과거청산은 권위주의 체제의 인적·제도적 기반을 빠르게 제거한 개혁이었습니다. 변화의 속도만 보면 점진적 보수주의보다 리버럴 개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반보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군부 사조직을 해체하고 문민통제를 회복하며 공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은 헌법적 질서와 제도를 복원하는 개혁이기도 합니다. 보수주의가 기존의 모든 권력관계를 보존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교조 해직교사의 특별채용은 그의 정치철학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989년 당시 교사들이 사실상의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는 것과 법률상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국·공립 교원에게는 국가공무원법 제66조가 적용됐고, 사립학교 교원도 사립학교법의 준용 규정에 따라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교원의 노동운동을 금지한 당시 법률이 국제법 존중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헌법재판소도 사립학교 교원의 노동운동 금지와 면직 규정을 합헌으로 판단했습니다. 서울고법 1992. 2. 14. 선고 89구16296 판결, 헌법재판소 1991. 7. 22. 89헌가106 결정

전교조 결성대회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준비위원회’가 주최했습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준비조직이나 임의단체로 남지 않았습니다. 위원장을 선출하고 결성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이 정식 노동조합임을 선언했습니다. 1989년 전교조 결성 기록 따라서 쟁점은 그 단체가 현실에 존재했느냐가 아니라, 당시 법으로 성립할 수 없었던 노동조합의 지위를 의도적으로 주장했느냐였습니다.

전교조 측은 교원노조를 금지한 법률 자체가 노동3권과 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법적 지위에 대한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당시 법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변경하려는 의식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일부 판결이 개별 교사의 활동 정도와 징계 수위 사이의 비례성을 문제 삼았더라도, 전교조를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원노조가 법률상 인정된 것은 1999년 교원노조법이 제정된 뒤였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정리한 교원노조 법제의 연혁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전교조 관련 해직교사들을 권위주의 시대의 피해자이자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재평가해 특별채용했습니다. 당시 법에 따른 원직복직이라기보다 새로운 정치적 평가에 따라 교직 진입을 다시 허용한 조치였습니다.

잘못된 법은 절차를 거쳐 장래를 향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질서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행위까지 나중의 도덕적 기준으로 복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영삼은 이 사안에서 법질서의 연속성보다 민주화운동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화해를 우선했습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보다 리버럴 개혁가에게 가까운 판단이었습니다.

김영삼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습니다. 다만 그의 개혁 가운데 일부는 보수주의와 대립했다기보다 권위주의가 훼손한 헌정질서를 회복하려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명박은 시장친화적 개발주의자였다

이명박은 자유시장과 기업에 우호적이었고 성공한 기업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업가와 보수주의자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의 대표적 성과인 청계천 복원사업은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서울의 공간을 바꾸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기존 상인의 이전과 생계, 오랫동안 형성된 고객과 거래망의 상실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습니다. 협의와 이전대책이 존재했다고 해도 대규모 공익사업의 편익과 개인이 부담한 비용이 공평했는지는 별도로 물어야 합니다. 서울시도 복원 뒤 남은 문제와 개선 과제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 자료

이명박의 통치방식은 청계천 하나에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747 성장 공약, 대운하 구상과 4대강 사업에도 국가와 도시를 거대한 프로젝트로 보고 목표와 일정, 성과를 중심으로 개조하려는 경영자적 태도가 드러났습니다.

보수주의자는 공익사업의 성과만큼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개인의 재산과 생계, 지역의 자생적 질서와 절차를 중시해야 합니다. 이명박은 시장을 신뢰했지만 변화의 규모와 속도에는 신중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정부를 말하면서도 국가가 주도하는 대형 사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명박은 고전적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시장친화적 개발주의자이자 기술관료형 경영자에 가까웠습니다.

한국에는 보수정권은 있었지만 보수주의 정권은 드물었다

이승만은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만든 국가건설자였지만 집권 뒤에는 그 공화국의 절차를 훼손했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와 안보의 현실을 배우며 실용적으로 변했지만 국가가 사회를 설계하고 동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김영삼은 보수연합을 이끌고 집권해 권위주의의 유산을 해체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습니다.

이명박은 시장을 지지했지만 국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를 선호한 개발주의적 경영자였습니다.

이들을 모두 보수정당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보수정당 대통령들은 하나의 보수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건국·산업화·민주화·개발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수행하며 부분적으로 보수적 선택을 했던 혼합적 정치가들이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정당도 철학적으로 일관된 조직이라기보다 반공, 산업화, 시장경제, 지역연합, 관료집단과 민주화 세력 일부가 결합한 정치연합이었습니다. 따라서 보수정당의 집권과 철학적 보수주의 정권의 등장은 구분해야 합니다.

새로운 한국 보수주의는 이제 태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철학적 보수주의의 형성이 늦어진 이유를 단순히 버크나 오크숏을 충분히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보수주의는 외국에서 완성된 이론을 번역해 들여온다고 곧바로 뿌리내리는 사상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오랜 시간 지켜온 제도와 생활방식, 성공과 실패의 기억을 실제로 축적한 뒤에야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말할 수 있는 경험의 철학입니다.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인 보수주의 교과서를 먼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영국의 의회와 법, 관습과 중간공동체가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영국의 역사적 경험을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한국의 출발점은 달랐습니다. 식민지배로 전통적 질서와 주권이 단절됐고, 해방 직후에는 안정된 공화국과 정당체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분단과 전쟁이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막연한 인본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좌파와 사회공학자들에 대응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치의 첫 과제는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신중하게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보존할 국가를 만들고 생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빈곤 탈출과 산업화가 필요했고, 다시 권위주의를 끝내고 민주적 헌정질서를 세우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인은 국가건설·전쟁·산업화·독재·민주화와 세계화를 한 세대가 겹칠 만큼 빠르게 통과했습니다. 반공과 성장, 정권 수호가 오랫동안 보수의 거의 전부처럼 받아들여진 것은 이런 역사적 순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제한하고 검증된 제도를 지키며 변화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철학은, 정작 지켜야 할 제도와 경험이 충분히 축적된 뒤에야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경험은 국가를 세우는 일만큼 자신이 만든 헌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박정희의 경험은 빈곤을 극복할 국가역량의 필요성과 함께, 성과를 이유로 권력의 제한을 없애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김영삼의 경험은 권위주의의 유산을 해체하는 개혁이 필요하면서도 도덕적 명분이 법질서의 연속성을 대신할 수 있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이명박의 경험은 시장과 효율을 말하는 정부도 거대한 개발사업을 통해 개인의 재산과 자생적 질서를 침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차례의 대통령 파면은 보수정당의 집권과 헌법을 보수하는 일이 결코 같은 뜻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남겼습니다.

이 교훈들은 버크의 문장을 한국 정치에 옮겨 적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직접 성공하고 실패하며 치른 비용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쟁 이후 70여 년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에는 지켜야 할 헌법과 선거, 재산과 시장, 행정 경험과 시민사회, 가족과 생활양식이 축적됐습니다. 동시에 권위주의와 국가주도 개발, 포퓰리즘과 탄핵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이 새로운 보수주의의 중심에서는 이제 20·30대 보수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20·30대 전체가 보수화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세대 안에 존재해 왔지만 기존 정당의 언어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젊은 보수 시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가장 직접적인 징후는 2026년 6·3 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뒤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시작된 항거입니다. 현장 보도에 따르면 이 집회는 특정 정당이나 기존 보수단체의 동원보다 20·30대 보수 청년들의 자발적 참여로 먼저 형성됐습니다. 이들은 잠실 개표소 앞을 지키며 투표 절차의 문제를 밝히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장년층과 기존 정치세력이 합류했지만, 그 출발과 초기 질서를 만든 주축은 이들이었습니다.

아직 법원이나 선거기관의 최종 판단으로 선거 전체의 부정이 확정된 것은 아니므로, 글은 부정선거를 이미 입증된 사실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실제 사태를 계기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투표와 개표의 전 과정을 국민이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 시민의 항거 자체는 분명한 정치적 사실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정당성은 권력기관이 믿으라고 명령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검증을 통해 성립합니다.

이 항거가 보수주의적 행동이 되는가, 급진적 행동주의가 되는가는 요구의 내용과 방법에 달려 있습니다. 증거의 공개와 독립적인 조사, 법적 구제와 투·개표 절차의 개선을 요구한다면 무너진 신뢰를 절차를 통해 회복하려는 보수적 행동입니다. 반대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모든 선거의 정당성을 미리 부정하고 법적 판단과 검증 절차마저 거부한다면, 그것은 지켜야 할 제도를 함께 무너뜨리는 급진주의에 가까워집니다. 의심하지 말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지만, 의심만으로 판결해서도 안 됩니다.

더 중요한 점은 깨어난 20·30대 보수가 과거 보수집회의 관성과 거리를 두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거대한 이념 구호를 앞세우기보다 6·3 선거의 구체적인 문제와 재선거 요구에 집중하려 했고, 집회가 다른 정치적 상징과 주장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것은 낡은 반공 구호나 과거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공정한 규칙, 참정권, 권력기관의 설명 책임을 요구하는 새로운 보수의 모습입니다.

물론 20·30대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대상은 그 세대 전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깨어나고 있는 보수 시민들입니다. 올림픽공원에서 나타난 이들의 행동은 젊은 보수가 더 이상 기성 보수정당의 수동적 지지층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하며 직접 행동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의 주체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한국 보수주의의 성패는 이 항거를 일회적 분노나 진영 대립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선거의 투명성과 검증 가능성을 높이는 입헌적 제도로 발전시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제 한국 보수는 단순한 반공과 성장주의를 넘어설 조건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헌법을 훼손하지 않고, 시장을 옹호하면서도 정경유착을 변호하지 않으며, 공동체를 중시하면서도 국가가 개인의 삶을 설계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는 보수주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은 외국 보수사상의 복제물이 아닙니다. 건국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성공과 파면을 모두 겪은 대한민국의 기억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보수주의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철학적 보수주의는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 늦음은 반드시 결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를 빌려 만든 보수주의가 아니라, 이제야 축적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보수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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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evelopedia, “Export Promotion and Korea’s Government-Led Industrialization (1960s–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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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사립학교법 제55조, 제58조 제1항 제4호에 관한 위헌심판」(89헌가1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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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2024헌나8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

아주경제, 「‘시위대 아니라 유권자’…참정권 외치던 개표소 앞 커진 ‘부정선거’ 목소리」, 2026.

조선비즈, 「‘재선거만 외치자’던 올림픽공원 집회…2030 빠지자 ‘부정선거’ 구호 커졌다」, 2026.

뉴시스, 「밤 되자 2030 대거 합류…‘투표용지 부족’ 시위 2만명 집결」,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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