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보수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보수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대통령과 보수주의자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보수주의는 단순히 반공이나 친기업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회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경계하고, 검증된 제도와 헌법적 절차, 개인의 권리와 재산, 질서와 공동체의 연속성, 점진적 변화를 중시하는 정치철학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보수주의를 평가하려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바꾸려 했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헌법과 절차를 존중했는가, 국가가 사회를 중앙에서 설계하려 했는가, 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했는가, 현실의 실패를 보고 정책을 수정했는가를 같은 기준으로 물어야 합니다.
이 글은 그 기준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과 이명박을 살펴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박근혜 이후 대통령은 서로 다른 쟁점이 커서 뒤에서 평가 범위를 따로 밝히겠습니다.
이승만은 공화국을 만든 급진적 국가건설자였다
이승만은 오늘날 한국 보수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출발부터 일관된 보수주의자였다기보다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만들려 한 국가건설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왕정과 신분질서를 보존하려 한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공화국과 국민국가를 만들고, 농지개혁과 의무교육, 보통선거를 통해 전통사회를 빠르게 바꾸려 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지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그가 미국에서 교육받으며 접한 지적 환경도 오늘날 한국에서 생각하는 보수주의와는 달랐습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당시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훗날 민주당 대통령이 됐고, 이승만은 윌슨이 내세운 공화주의와 민족자결주의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와 기독교 사회개혁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육과 국민국가, 사회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진보주의 시대의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의 미국 인맥 전체가 민주당계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인맥은 정당보다 개신교와 독립운동,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공화당 인사들과도 접촉했습니다. 윌슨 행정부도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 한국 독립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실제 외교정책으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상적 영향과 정당의 정치적 지원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공화국을 세웠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집권 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권력 제한과 헌법적 절차를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에 맞서 국가의 생존과 질서를 지키려 했다는 점은 보수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공화국의 절차를 일관되게 존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전통적 질서를 보존한 보수주의자라기보다 훗날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 한 대한민국을 건설한 인물이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그 국가를 보존하려 했지만, 그 방법까지 입헌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보수주의자보다 국가주의적 개발주의자였다
박정희 역시 처음부터 철학적으로 일관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사정변과 국가개조,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국가의 의지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가는 경제의 중심적이고 지시적인 역할을 맡았고, 점진적 변화보다 계획과 동원을 중시했습니다. 이는 보수적 회의주의보다 국가주의적 사회공학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경제와 안보를 직접 다루면서 현실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기술과 자본, 시장, 관료조직과 기업가의 능력은 구호나 의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기업과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고 정책을 수정한 점에서는 경험을 통해 학습한 정치가였습니다.
로버트 콩퀘스트의 제1법칙으로 흔히 인용되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는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이 말은 경제와 안보를 직접 경험한 박정희가 왜 구호보다 능력과 결과를 중시하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현실주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곧 보수주의자가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 육성에서도 국가가 정치와 산업의 방향을 정하고 사회를 동원하려는 태도는 계속됐습니다. 박정희는 반공과 질서, 국가의 연속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헌법적 절차와 점진적 변화, 국가설계에 대한 회의라는 기준에서는 보수주의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진보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이동했다기보다, 강한 국가개조론자가 시행착오를 통해 시장과 기업의 현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된 개발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김영삼은 보수연합을 이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다
김영삼은 보수정당의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민주화운동과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 속에서 형성됐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에 맞선 야당 지도자였고, 3당 합당을 통해 보수정당 연합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집권 뒤에는 그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추진해온 민주화와 개혁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 과거청산은 권위주의 체제의 인적·제도적 기반을 빠르게 제거한 개혁이었습니다. 변화의 속도만 보면 점진적 보수주의보다 리버럴 개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반보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군부 사조직을 해체하고 문민통제를 회복하며 공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은 헌법적 질서와 제도를 복원하는 개혁이기도 합니다. 보수주의가 기존의 모든 권력관계를 보존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교조 해직교사의 특별채용은 그의 정치철학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989년 당시 교원노조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교사들의 집단행위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전교조는 이를 알면서도 노동조합의 존재를 주장했고 탈퇴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에 따른 파면과 해임은 당시 법질서 안에서는 의도적인 법 위반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이들을 단순한 법 위반자가 아니라 권위주의 시대의 피해자이자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재평가해 특별채용했습니다.
잘못된 법은 장래를 향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의도적 법 위반자를 정치적으로 복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영삼은 법질서의 연속성보다 민주화운동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화해를 우선했습니다. 이것은 보수주의보다는 리버럴 개혁가의 판단에 가깝습니다.
김영삼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습니다. 다만 그의 개혁 가운데 일부는 보수주의와 대립했다기보다 권위주의가 훼손한 헌정질서를 회복하려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명박은 시장친화적 개발주의자였다
이명박은 자유시장과 기업에 우호적이었고 성공한 기업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업가와 보수주의자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의 대표적 성과인 청계천 복원사업은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서울의 공간을 바꾸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기존 상인의 이전과 생계, 오랫동안 형성된 고객과 거래망의 상실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습니다. 협의와 이전대책이 존재했다고 해도 대규모 공익사업의 편익과 개인이 부담한 비용이 공평했는지는 별도로 물어야 합니다. 서울시도 복원 뒤 남은 문제와 개선 과제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 자료
이명박의 통치방식은 청계천 하나에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747 성장 공약, 대운하 구상과 4대강 사업에도 국가와 도시를 거대한 프로젝트로 보고 목표와 일정, 성과를 중심으로 개조하려는 경영자적 태도가 드러났습니다.
보수주의자는 공익사업의 성과만큼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개인의 재산과 생계, 지역의 자생적 질서와 절차를 중시해야 합니다. 이명박은 시장을 신뢰했지만 변화의 규모와 속도에는 신중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정부를 말하면서도 국가가 주도하는 대형 사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명박은 고전적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시장친화적 개발주의자이자 기술관료형 경영자에 가까웠습니다.
평가에서 제외한 대통령들
전두환과 노태우를 제외한 채 한국 보수정권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은 군부정치와 경제 안정, 민주화 이행이라는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하므로 별도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는 편이 적절합니다.
전두환은 물가 안정과 경제정책의 변화라는 측면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권위주의 통치 자체가 헌법적 연속성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와 충돌합니다. 노태우는 권위주의 체제의 후계자였지만 민주화된 헌법 안에서 통치했고,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처럼 현실 변화에 점진적으로 적응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군부 출신이지만 보수주의의 기준으로는 서로 다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박근혜 역시 경제민주화와 기초연금, 복지 확대를 받아들인 보수정당의 적응을 보여주는 동시에 탄핵이라는 헌정사적 결말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충분히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라기보다 별도의 분석이 필요한 인물입니다. 그 이후 대통령은 정치적 갈등이 너무 가까이 남아 있어 조금 더 역사적 거리를 두는 편이 좋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결론은 한국의 모든 보수정권에 대한 최종 판정이 아니라, 네 대통령을 통해 한국 보수정당과 철학적 보수주의가 일치하지 않았음을 살펴본 결과입니다.
한국에는 보수정권은 있었지만 보수주의 정권은 드물었다
이승만은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만든 국가건설자였지만 집권 뒤에는 그 공화국의 절차를 훼손했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와 안보의 현실을 배우며 실용적으로 변했지만 국가가 사회를 설계하고 동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김영삼은 보수연합을 이끌고 집권해 권위주의의 유산을 해체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가였습니다.
이명박은 시장을 지지했지만 국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를 선호한 개발주의적 경영자였습니다.
이들을 모두 보수정당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보수정당 대통령들은 하나의 보수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건국·산업화·민주화·개발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수행하며 부분적으로 보수적 선택을 했던 혼합적 정치가들이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정당도 철학적으로 일관된 조직이라기보다 반공, 산업화, 시장경제, 지역연합, 관료집단과 민주화 세력 일부가 결합한 정치연합이었습니다. 따라서 보수정당의 집권과 철학적 보수주의 정권의 등장은 구분해야 합니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이런 차이를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으로 기존 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한국 정치의 우선 과제는 점진적인 제도 보존보다 국가건설과 생존, 산업화였습니다. 반공과 정권 수호가 보수의 거의 전부처럼 받아들여지면서, 권력을 제한하고 검증된 제도를 지키며 변화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철학적 보수주의가 성장할 공간은 좁았습니다.
전쟁 이후 70여 년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에는 지켜야 할 헌법과 제도, 재산과 생활양식, 행정 경험과 시민사회가 축적됐습니다. 이제야 한국 보수는 단순한 반공과 성장주의를 넘어 무엇을 왜 지켜야 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보수정당의 정권은 여러 번 있었지만 철학적으로 분명한 보수주의 정권은 드물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한국적 보수주의가 완성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형성될 역사적 조건은 이제 비로소 갖춰지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Princeton Alumni Weekly, “Korean Leader Honored by Wilson School”, 2012.
K-Developedia, “Export Promotion and Korea’s Government-Led Industrialization (1960s–1970s)”.
대통령기록관, 「공직자 재산공개」.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박물관, 「상설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