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발언이 아니었는데도 분노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흔히 분노한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변화에 불안해하고, 낯선 것에 쉽게 자극받으며, 권위와 질서를 앞세워 타인을 억압하려 한다는 식입니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더 관용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며,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보면 이 구도는 쉽게 흔들립니다. 캠퍼스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공간에서 보수적 연사나 비주류 학자들은 반복적으로 강연을 방해받고, 초청 취소 요구를 받고, 때로는 물리적 공격까지 당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실제로 혐오발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려던 것은 혐오 선동이 아니라 정책 주장, 통계 해석, 문화 비판, 표현의 자유, 범죄와 경찰 문제, 성차에 대한 논의, 대학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보적 학생운동은 이런 주장들을 쉽게 혐오, 폭력, 안전 위협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분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의 평범한 정치적 주장이나 학문적 논쟁에 쉽게 분노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의견을 반박해야 할 주장으로 보지 않고, 캠퍼스에서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보았습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의 《나쁜 교육》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주제는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불편한 말과 해로운 말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불쾌하게 느끼는 말을 실제 위해로 해석하고, 반대 의견을 심리적 안전을 해치는 폭력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이트와 루키아노프가 말하는 세 가지 잘못된 믿음도 이 문제와 연결됩니다. 첫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약하게 만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 항상 자신의 감정을 믿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셋째,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의 싸움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세 가지 믿음이 결합하면, 자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말은 곧 해로운 말이 됩니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끼면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됩니다. 이때 분노는 너무 쉽게 정당화됩니다.
2015년 예일대의 핼러윈 의상 논쟁은 이런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에리카 크리스타키스는 학생들에게 핼러윈 의상에 대해 지나치게 세세한 규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학생들이 때로는 불쾌하거나 도발적인 표현을 스스로 판단할 여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였습니다.
이것은 혐오발언이 아니었습니다. 특정 집단을 비하하거나 폭력을 선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인지 묻는 교육적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메일은 거센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학생들은 크리스타키스 부부가 기숙사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건은 진보적 학생들이 실제 혐오발언이 아닌 말에도 쉽게 분노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불편한 질문이 정체성 공격처럼 받아들여졌고, 교육적 문제 제기가 학생들의 안전을 해치는 사건처럼 해석되었습니다.
2017년 미들베리 칼리지에서 벌어진 찰스 머리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의 연구와 주장은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이라면 그의 주장을 듣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학생들이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머리는 강연을 하려고 했지만 학생들의 구호와 방해로 정상적인 강연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별도 공간에서 생중계 방식으로 대담을 진행하려 했지만, 그것도 방해를 받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머리와 토론 진행자였던 앨리슨 스탱어 교수는 군중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스탱어 교수는 목을 다치고 뇌진탕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같았습니다. 학생들은 머리의 주장을 논쟁적 주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존재 자체를 위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물리적 피해를 입은 사람은 머리와 그와 대화하려던 교수였습니다. 말이 폭력이라고 주장한 쪽에서 실제 폭력이 나온 것입니다.
UC 버클리의 마일로 이아노풀로스 강연 취소 사건도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물론 마일로는 도발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표현 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도발적 발언에 대한 정상적인 대응은 반박, 질문, 토론, 공개 비판이어야 합니다. 버클리대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학생들 사이에 섞여든 외부 인사를 포함한 검은 복장의 일부 참가자들이 시설을 파손하고 불을 질렀고, 결국 행사는 안전 문제로 취소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진보적 분노는 자신을 혐오에 맞선 저항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발언의 반박이 아니라 발언 기회의 제거였습니다. 이것은 관용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분노입니다.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의 헤더 맥도널드 사건은 더 분명한 사례입니다. 맥도널드는 경찰과 범죄 통계에 대해 보수적 견해를 가진 논객입니다. 그가 말하려던 것은 인종 혐오나 폭력 선동이 아니었습니다. 경찰, 범죄, 인종 문제에 대한 통계와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의 강연을 막기 위해 강연장 입구를 봉쇄했습니다. 청중은 강연장에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강연은 빈 방에서 생중계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혐오발언”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보수적 범죄 통계 해석도 혐오로 불리고, 경찰 옹호도 혐오로 불리며, 기존 진보 서사와 맞지 않는 주장은 캠퍼스에서 제거해야 할 말처럼 취급됩니다.
에버그린 주립대의 브렛 와인스타인 사건은 이 문제가 보수주의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와인스타인은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보 성향의 생물학 교수였습니다. 그러나 백인 학생과 교직원에게 하루 동안 캠퍼스를 떠나라는 방식의 “Day of Absence” 변경에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인종차별적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종을 이유로 특정 집단에게 캠퍼스를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와인스타인은 안전 문제 때문에 캠퍼스 밖에서 수업을 해야 했고, 결국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진보적 분노가 실제 혐오발언이 아닌 것까지 혐오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진보 내부의 합리적 이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의 여러 사건들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빌 크리스톨은 강연 중 아이스크림 파이를 맞았습니다. 팻 뷰캐넌은 샐러드 드레싱을 맞았습니다. 앤 쿨터는 커스터드 크림 파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리처드 펄은 신발을 맞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보수 진영의 인물들이었고, 이들에 대한 공격은 종종 심각한 폭력이라기보다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처럼 소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분명합니다. 보수주의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몸에 무언가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말에 대한 반응이 말이 아니라 물리적 모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공격은 진보 진영 안에서 충분히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모순입니다. 진보적 캠퍼스 문화는 마이크로어그레션, 문화적 전유, 무심한 표현, 불편한 농담, 정체성에 대한 암시적 모욕에는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작은 말의 뉘앙스까지도 피해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실제로 강연을 방해받고,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물리적 공격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민감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작은 무례는 폭력의 언어로 설명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을 향한 실제 방해와 공격은 폭력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진보적 분노의 특징입니다. 자신의 감정은 피해의 증거로 받아들이지만, 반대자가 당한 피해는 정의로운 항의의 부작용 정도로 취급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밀은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갖고 있고 단 한 사람만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발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틀렸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더 분명히 이해할 기회를 얻고, 그가 맞았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All Minus One》은 바로 이 밀의 주장을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게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은 《나쁜 교육》의 부속편은 아니지만,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나쁜 교육》이 왜 오늘날 대학 캠퍼스에서 반대 의견을 견디지 못하는 문화가 생겼는지를 설명한다면, 《All Minus One》은 왜 단 한 사람의 반대 의견이라도 침묵시켜서는 안 되는지를 밀의 논리로 보여줍니다.
대학은 불편한 생각을 제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불편한 생각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반대 의견을 듣는 것이 학생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 의견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문화가 학생을 약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캠퍼스의 일부 진보 성향 활동가 역시 반대 의견 앞에서 분노하고, 때로는 발언 기회를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선택된 사건만으로 진보주의자 일반이 보수주의자보다 더 쉽게 분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례들의 의미는 어느 한 진영의 타고난 성격을 입증하는 데 있지 않고, 분노와 비관용을 보수만의 특성으로 돌리는 단순한 서사를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혐오발언이 아닌 것을 혐오발언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혐오발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편한 주장을 폭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폭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강연을 막고, 연사를 위협하고, 청중의 출입을 봉쇄하고, 사람에게 물건을 던지는 행동은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폭력적 행동입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는 본질적으로 더 분노한다”는 말은 이 캠퍼스 사건들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건들은 안전과 피해의 언어도 반대 의견을 침묵시키는 명분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보수의 분노는 질서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진보의 분노는 피해자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둘 다 분노입니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더 쉽게 정당화된 것은 진보의 분노였습니다. 그것은 혐오에 맞선 정의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혐오가 아닌 의견까지 혐오로 규정하고 몰아낸 분노였습니다.
참고문헌
- Greg Lukianoff and Jonathan Haidt,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 Penguin Press, 2018.
- John Stuart Mill, On Liberty, Chapter II, 1859.
- Heterodox Academy, All Minus One: John Stuart Mill's Ideas on Free Speech Illustrated, 2018.
- Time, A Costume Drama at Yale, 2015년 11월 10일.
- Middlebury College, Video Recording of Charles Murray and Prof. Allison Stanger, 2017년 3월.
- Middlebury College, Middlebury College Completes Sanctioning Process for March 2 Disruptions, 2017년 5월 23일.
- UC Berkeley, Yiannopoulos event canceled, 2017년 2월 1일.
- UC Berkeley, Campus condemns violence, defends free speech, 2017년 2월 2일.
- Claremont McKenna College, Blockade FAQ,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