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분노를 비교할 때 단순히 “양쪽 모두 과격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어느 진영에나 극단주의자는 있습니다. 어느 대통령에게나 협박은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표현이 어떤 위치에서 나왔는가, 그리고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입니다.
같은 “kill”이라는 단어라도, 한쪽에서는 극단주의자의 위협으로 취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항문화나 풍자의 일부처럼 소비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대의 “Kill Bush” 표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향한 “Kill Obama” 위협, 그리고 캐시 그리핀이 트럼프의 잘린 머리 모형을 들고 찍은 사진은 이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세 사례를 나란히 놓고 보면, 리버럴의 분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Kill Bush는 캠페인 상품처럼 소비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 시기, 특히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반부시 정서는 매우 강했습니다. 부시는 많은 리버럴과 좌파 문화권에서 단순한 보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전, 테러와의 전쟁, 애국법, 관타나모, 종교 우파, 미국식 제국주의의 상징처럼 소비되었습니다.
그 결과 부시에 대한 반대는 정책 비판을 넘어 도덕적 혐오의 언어로 번졌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Kill Bush” 문구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어떤 정신 이상자나 극단주의자가 대통령에게 보낸 은밀한 협박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Kill Bush”는 티셔츠, 인터넷 상품, 반전 이미지, 풍자적 표현의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2003년 Fox News 보도에 따르면, 보스턴의 그래픽 아티스트 마라트 린딘은 CafePress에서 “Kill Bush” 티셔츠를 판매하려 했고, 그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살해가 아니라 선거에서 부시를 몰아내자는 뜻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CafePress는 고객 불만을 이유로 해당 상품을 삭제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이 아무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논란은 있었습니다. 삭제도 있었습니다. Secret Service가 개입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2006년 캘리포니아의 14세 학생 줄리아 윌슨은 MySpace에 부시 사진 위에 “Kill Bush”라고 쓰고 칼이 손을 찌르는 그림을 올렸다가 Secret Service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폭력적이지 않고 이라크전에 반대했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Kill Bush는 단지 고립된 범죄 위협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반전·반부시 문화 속에서 상품과 풍자와 캠페인 언어처럼 소비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 살해 위협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부시를 끝내자”는 뜻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명이 문제입니다. 대통령에게 “kill”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그것을 폭력적 분노가 아니라 정치적 풍자나 반전 저항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리버럴 분노의 특징입니다. 분노을 분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저항, 풍자, 반전, 양심, 표현의 자유라고 부릅니다.
Kill Obama는 극단주의자의 위협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오바마에게도 살해 위협은 있었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오바마는 후보 시절부터 여러 위협에 노출되었습니다. Reuters는 2007년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활동하던 시기 이미 Secret Service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오바마에 대한 웹사이트와 편지 위협이 있었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2008년에는 백인우월주의 성향의 두 남성이 오바마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PBS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흑인을 대량 살해한 뒤 오바마를 최종 목표로 삼으려는 계획을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2011년에는 오스카 오르테가-에르난데스가 백악관에 총격을 가한 뒤 오바마 암살 시도 혐의로 기소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오바마는 백악관에 없었지만, 이 사건은 명백히 수사와 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례들은 보수 진영 또는 극우 진영에도 매우 위험한 분노와 폭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Kill Bush와 비교할 때 성격이 다릅니다.
Kill Obama는 대체로 극단주의자의 위협, 인종주의적 증오, Secret Service 수사, 범죄 가능성의 문제로 다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정상적 정치문화의 일부로 소비되지 않았습니다. 티셔츠 캠페인이나 반권위적 풍자의 미학으로 정당화되기보다는, 위험한 위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Kill Obama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일탈로 분류되었습니다. 반면 Kill Bush는 반부시 문화권에서 상품, 풍자, 반전 표현처럼 등장했습니다. 한쪽은 위험한 극단주의자의 언어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저항문화의 과격한 표현으로 완충되었습니다.
캐시 그리핀은 트럼프의 잘린 머리 모형을 들었습니다
트럼프 시대에 들어오면 이 문제는 더 노골적인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코미디언 "캐시 그리핀"의 사진입니다.
2017년 5월, 캐시 그리핀은 사진작가 타일러 실즈가 촬영한 사진에서 피가 묻은 트럼프의 잘린 머리처럼 보이는 모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 사진은 공개 직후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CNN은 그리핀을 새해맞이 방송 공동 진행자 자리에서 퇴출했습니다. Time은 CNN이 그리핀과의 계약을 종료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온라인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익명의 극단주의자가 어두운 게시판에 올린 글도 아니었습니다. 유명 코미디언이 전문 사진작가와 함께 만든 이미지였습니다. 즉 폭력적 상징이 "코미디, 예술, 풍자, 연예 문화의 형식"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그리핀은 즉각 역풍을 맞았습니다. 사과도 했고, CNN에서도 퇴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두고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후의 해석입니다. 그리핀은 나중에 사과를 철회했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ABC 계열 보도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미안하지 않다고 말하며, 분노는 자신이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더 나아가 자신이 “ahead of its time”, 즉 시대를 앞섰다는 식으로 말한 보도도 나왔습니다. New York Post는 2026년 인터뷰를 인용해 그리핀이 자신은 이제 “uncanceled”되었고, 그 사진이 시대를 앞섰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트럼프의 잘린 머리 이미지는 정상적인 정치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통령의 신체적 제거를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살해 위협”이라는 언어로만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풍자의 한계”, “코미디의 경계”, “예술 표현”, “표현의 자유”라는 논쟁으로 옮겨갔습니다.
바로 이 이동이 중요합니다. 리버럴의 분노는 폭력적 상징을 만들어도, 그것이 예술과 풍자의 형식을 취하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같은 “분노”라도 사회적 처리 방식이 다릅니다
이제 세 사례를 비교하면 차이가 보입니다.
| 사례 | 표현의 형태 | 사회적 처리 방식 |
|---|---|---|
| Kill Bush | 티셔츠, 인터넷 상품, 반전 풍자, MySpace 이미지 | 반부시·반전 문화 안에서 소비되었고, 일부는 풍자·저항으로 해명됨 |
| Kill Obama | 암살 위협, 백인우월주의 음모, 총격 사건, Secret Service 수사 | 극단주의·인종주의·범죄 위협으로 다루어짐 |
| 캐시 그리핀의 트럼프 머리 사진 | 유명 코미디언과 사진작가의 시각 이미지 | 비판과 제재를 받았지만, 동시에 풍자·예술·표현의 자유 논쟁으로 이동 |
여기서 핵심은 “누가 더 나쁜가”가 아니라. 핵심은 "분노가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가"입니다.
오바마를 향한 살해 위협은 대체로 위험한 극단주의로 불렸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다루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부시를 향한 Kill Bush 표현은 반전 문화와 반부시 상품의 형태로 등장했고, 트럼프의 잘린 머리 이미지는 예술과 코미디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즉 보수 쪽의 과격 표현은 쉽게 극단주의로 명명됩니다. 그러나 리버럴 쪽의 과격 표현은 종종 다른 이름을 얻습니다. 그것은 저항이 됩니다. 풍자가 됩니다. 예술이 됩니다. 양심이 됩니다. 표현의 자유가 됩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에게 “죽여라”는 말을 쓰는 것, 대통령의 잘린 머리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단순한 정책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적대감이 폭력적 상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리버럴은 왜 쉽게 분노하는가
리버럴은 스스로를 관용적이고 이성적이며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들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는 분노하고 혐오하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문화의 장면을 보면 이 설명은 자주 흔들립니다.
리버럴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매우 쉽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단순한 반박에 머물지 않습니다. 상대를 틀린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으로 상상합니다.
부시는 전쟁범죄자처럼 묘사되었습니다. 트럼프는 파시스트나 독재자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그다음부터는 과격한 표현도 쉽게 정당화됩니다. “Kill Bush”는 반전의 언어가 되고, 트럼프의 잘린 머리 이미지는 풍자의 언어가 됩니다.
이것이 리버럴 분노의 위험한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분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쉽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폭력적 상징으로 나타나도, 그것을 도덕적 저항이나 예술적 표현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결론
Kill Bush와 Kill Obama를 단순히 같은 종류의 표현으로 묶으면 안 됩니다. 둘 다 “kill”이라는 단어를 포함할 수 있지만, 사회적 맥락은 달랐습니다.
Kill Obama는 주로 극단주의자의 위협, 인종주의적 증오, 범죄 가능성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반면 Kill Bush는 반전·반부시 문화 안에서 티셔츠와 인터넷 상품, 풍자적 표현으로 소비되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시대에는 캐시 그리핀의 잘린 머리 사진처럼, 대통령에 대한 폭력적 상징이 코미디와 예술의 형식으로까지 등장했습니다.
이 세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리버럴은 보수주의자를 분노의 정치라고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는 순간 매우 쉽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분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항이라고 부릅니다. 풍자라고 부릅니다.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표현의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죽이라는 문구가 상품처럼 소비되고, 대통령의 잘린 머리 이미지가 코미디와 예술의 이름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분노가 폭력적 상징으로 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례들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분노의 정치는 보수주의자만의 문제인가?
적어도 Kill Bush와 캐시 그리핀의 사례를 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리버럴은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다만 그 분노를 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