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강욱·최강혁의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에는 봉수 씨와 진봉 씨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이 등장합니다. 책 소개에 따르면 두 사람은 50대 동갑내기이며, 각각 보수와 진보의 세계관และ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이 인물들은 정말 보수와 진보의 객관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어떻게 상상하고, 동시에 자신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일까요.
봉수 씨와 진봉 씨: 가상 인물로 본 대조
"봉수 씨"는 보수입니다. 그는 종로에서 금수저로 태어났고, 부모의 도움을 받아 강남의 건물주가 되었으며, 아들은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근본적 불안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안정된 자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고, 그 지위는 다시 자녀에게 이전될 수 있습니다. 영국식 맞춤 정장, 옥스퍼드 구두, 격식과 질서에 대한 선호는 그가 기존 질서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변화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봉 씨"는 진보입니다. 그는 흙수저로 태어났고, 은행원 생활을 거쳐 뒤늦게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나이 50이 다 되어서야 서울에 아파트를 마련했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불안과 압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정장보다 검정 터틀넥과 청바지를 선호합니다. 격식과 권위에 편안하게 기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삶은 봉수 씨와 달리 처음부터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진보성은 삶의 고생과 사회적 감수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 대비는 매우 선명합니다. "보수"는 금수저 건물주이고, "진보"는 흙수저 출신 노력가입니다. "보수"는 물려받은 사람이고, "진보"는 올라온 사람입니다. "보수"는 질서의 수혜자이고, "진보"는 불공정한 조건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보수"는 격식과 안정에 기대고, "진보"는 자율성과 자기 형성을 중시합니다.
선명한 대비와 진보의 도덕적 상상력
바로 이 점에서 이 대목은 보수와 진보의 실제 차이를 설명하기보다, 진보주의자의 "도덕적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도에서 보수주의자는 단순히 다른 정치적 철학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기존 질서의 혜택을 누려 온 사람, 부모 세대의 자산을 물려받은 사람, 사회 구조의 불공정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는 단순히 복지나 평등 정책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불리한 조건을 견뎌 낸 사람, 자기 노력으로 삶을 만든 사람, 그래서 사회 구조의 불공정성을 더 잘 아는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한국 진보 엘리트가 자주 사용하는 "자기 서사"와도 닿아 있습니다. 진보는 자신을 약자의 편에 선 사람, 불공정한 질서를 비판하는 사람, 사회적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는 사람, 가진 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람, 기존 질서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상상되기 쉽습니다. 이때 보수주의자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도덕적으로 이미 한 단계 낮은 위치에 놓입니다. 그는 틀린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현실의 단순화가 가리는 다채로운 실상
그러나 이 구도는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실제 보수주의자 중에는 봉수 씨 같은 금수저 건물주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가난한 보수주의자도 있고,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보수주의자도 있으며, 국가나 제도의 보호보다 가족, 책임, 자립, 질서, 공동체를 더 신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보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질서"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약자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책임과 가족의 안정이 사회를 지탱한다고 믿기 때문에 보수가 됩니다.
반대로 진보주의자 역시 모두 진봉 씨 같은 흙수저 출신 노력가는 아닙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진보주의는 고학력 전문직, 대도시 중산층, 문화 엘리트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약자의 편에 선 사람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교육, 언어, 문화자본, 직업 안정성 면에서 상당한 특권을 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진보주의자의 자기 이미지는 때로 자신의 특권을 가리는 기능을 합니다. 자신들은 약자를 대변한다고 믿지만, 정작 자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보수 성향의 서민을 무지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정치 성향은 계급 경험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봉수 씨와 진봉 씨의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동시에 진보주의자가 가진 가장 익숙한 도덕적 구도를 드러냅니다. 보수는 가진 자의 세계관이고, 진보는 고생한 자의 감수성이라는 구도입니다. 보수는 상속된 질서이고, 진보는 노력으로 얻은 정의감이라는 구도입니다.
하지만 정치 성향은 그렇게 단순히 계급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봅니다. 보수는 질서, 안정, 책임, 지속성, 가족, 공동체, 위험 관리에 더 큰 가치를 둘 수 있습니다. 진보는 평등, 변화, 자율성, 불공정의 교정, 기존 권위에 대한 의심에 더 큰 가치를 둘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이기적이고 다른 한쪽이 전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닙니다. 두 입장은 서로 다른 위험을 보고, 서로 다른 비용을 우선적으로 계산합니다.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배치하는 일의 위험성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중요한 질문은 “봉수 씨는 왜 보수이고 진봉 씨는 왜 진보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봉수 씨처럼 상상하고, 자기 자신을 진봉 씨처럼 상상하는가. 왜 보수는 특권의 언어로, 진보는 고생과 정의감의 언어로 배치되는가. 이 배치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치적 판단입니다.
결국 이 사례는 보수와 진보를 설명하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진보주의자의 자화상을 분석하는 자료입니다. 진보주의자는 자신을 불공정한 세계를 더 잘 아는 사람으로, 보수주의자를 기존 질서의 혜택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보수주의자도 고생을 하고, 진보주의자도 특권을 누립니다. 보수주의자도 "정의"를 말하고, 진보주의자도 자기 이익을 지킵니다.
정치적 이해는 상대를 도덕적으로 배치하는 순간부터 어려워집니다. 봉수 씨와 진봉 씨의 이야기는 그래서 좋은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출발점입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묻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 자체가 이미 진보주의자의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