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연재] 본 글은 실리콘밸리 자본을 지렛대 삼아 미국의 사회·문화적 담론을 재설계하는 로렌 파월 잡스의 영향력 모델을 추적하는 3부작 기획의 일부입니다.
로렌 파월 잡스와 책임지지 않는 선한 권력
"로렌 파월 잡스"가 주도하는 현대 자선 제국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던져야 할 핵심적인 질문은,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에 돈을 쥐여주었는가 하는 지출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지점은 그녀가 어떤 법적 방식을 통해 그 자금과 영향력을 사회에 관철시키고 있는가 하는 구조적 작동 원리입니다. 그녀는 미국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연방정부의 엄격한 상속세 및 기부금 세무 규제를 받는 고전적인 비영리 자선 재단을 설립하는 낡은 경로를 걷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에머슨 컬렉티브"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영리 "유한회사"인 LLC(Limited Liability Company)를 설립해 교육, 주류 언론 소유, 이민 제도 개입, 환경 기술 벤처 투자, 그리고 정당의 정책 로비 네트워크를 하나의 거대한 이윤·영향력 생태계로 엮었습니다.
정치 성향에 무관하게 부유한 기득권층이 교육 개혁을 지원하거나 언론 매체의 재정을 보전해 준 사건은 오랜 역사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로렌 파월 잡스가 제시하는 이 LLC 자선 모델은 단순한 기부나 자선 행위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자선과 투자, 공적 대의와 사적 이윤, 그리고 세련된 진보적 사회 운동과 기득권의 사적 담론 통제 권력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이전에 없던 교활한 권력 플랫폼의 출현입니다.
과거의 자선은 건물을 남겼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록펠러, 카네기, 포드, 멜론 등 미국 자본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도금시대의 재벌들 역시 자신들의 가혹한 축재 방식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피하고 세금 회피 및 명예 확보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들의 자선 동기 역시 순수한 이타주의라기보다는 부의 세습 정당화와 가문 평판 세탁이라는 사적 욕망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이 낡은 자선 방식에는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 공공을 위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영구적인 물리적 인프라를 건설해 대중에게 제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는 전국의 시골 마을마다 공공 도서관 건물을 지어 기부했고, 록펠러는 대학을 설립하거나 공공 종합병원을 건설해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그들의 돈은 기부자의 손을 떠나는 즉시 공적인 소유물이나 비영리 교육 법인이라는 엄격한 제도권 시설로 이전되었습니다.
반면 현대 실리콘밸리 테크 귀족들이 이끄는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는 사회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 별반 취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건물보다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는 "담론"의 경로를 통제하고자 합니다. 낙후된 지역에 학교 건물을 증축해 주는 대신, 교육과정에 개입해 교실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평가할지 규정하려 듭니다. 신문기자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격려하는 대신, 아예 시사 잡지나 일간지 언론사를 자회사로 통째로 인수해 지배 구조를 장악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자신들이 디자인한 시스템대로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LLC라는 면죄부: 세무 규제와 법망을 우회하는 유연성
에머슨 컬렉티브가 공익재단(Foundation)이 아닌 영리 유한회사(LLC)로 등록된 것은 고도로 계산된 기획의 산물입니다. 미국 세법상 비영리 자선 재단은 자금 유입과 지출 내역을 매년 연방 국세청(IRS)에 상세히 보고해야 하고, 정치인에 대한 직접적 기부나 특정 입법 로비 활동에 자금을 투입하는 행위가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됩니다.
하지만 영리 유한회사인 LLC 구조로 자선 단체를 위장해 놓으면 상황이 완전히 바뀝니다. 에머슨 컬렉티브는 영리 회사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연간 자금 흐름과 투자처를 대중에 낱낱이 공개할 법적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기부하고 싶을 때는 기부하고, 마음에 드는 실리콘밸리 친환경 테크 벤처 기업에 투자해 사적 이윤을 회수하고 싶을 때는 투자하며, 정파적 언론사인 "더 애틀랜틱"의 지분을 인수해 언론 권력을 소유할 수도 있고, 민주당 대선 캠프의 입법 로비 자금을 아무런 공시 의무 없이 무제한으로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자선, 영리 투자, 그리고 정치 로비를 무제한으로 변형해 가며 수렴하는 괴물 같은 권력 구조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옹호하는 진보 엘리트들은 자선이라는 명분하에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난제들을 해결하려면 관료적인 기부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며 자선과 영리 투자가 한데 어우러져 시너지를 내는 혁신적인 모델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찬양하는 그 '유연성'과 '혁신'은, 민주주의의 감시 시스템이 미작동하는 불투명한 무법의 회색지대입니다. 공적 영향력의 행사가 개인의 밀실에서 영리 비즈니스와 기부를 교묘히 오가는 동안, 대중은 이 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정책이 로비로 채택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선출되지 않은 사적 정책 플랫폼의 정당성 위기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감이나 대통령, 의회의 정치인들을 주기적인 선거라는 엄격한 채널을 통해 심판하고 견제합니다. 만일 공립학교의 교육 행정이 엉망이거나 언론사의 보도가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면, 유권자들은 교육감을 교체하거나 소비자 운동을 통해 비판을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렌 파월 잡스처럼 천문학적인 유산 자본을 토대로 미국의 고등학교를 뜯어고치고, 대형 언론사의 논조를 관리하며, 미국 민주당의 기후 및 이민 정책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는 사적 유한회사는 그 누구도 선거를 통해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교육 개혁 실험이 실패해 학교의 학업 성취도가 망가지더라도, 그들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지 않습니다. 그저 "해당 프로젝트는 종료되었으며 새로운 임팩트 투자를 모색하겠다"며 다른 사업체로 이동하면 그만입니다. 실패의 가혹한 비용은 실험 대상이 된 교사들과 서민의 자녀들이 치르지만, 소유권과 영향력은 고스란히 억만장자 가문의 손에 고결한 자선이라는 명분으로 그대로 보존됩니다.
이것이 현대 진보 엘리트 권력이 도달한 극단적 형태의 이중성입니다. 겉으로는 복지 강화와 평등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며 상대 우파 진영의 자금 정치를 타락이라고 매도하지만, 본인들 스스로는 자본과 결탁한 가장 강력하고 폐쇄적인 유한회사(LLC)를 차려놓고 국가의 공적 정책 의사결정의 브레인 역할을 사유화하고 있습니다.
결론: 자선의 마스크를 쓴 불투명한 지배 권력
부유한 개인들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부를 베풀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나서는 것 자체는 권장받을 만한 선행입니다. 진짜 심각한 쟁점은, 그 자선 자본의 힘이 교육 제도의 내용, 언론의 논조 형성, 이민과 환경이라는 국가 공동체 전체의 운명이 걸린 핵심 의제들의 향방과 '조건'을 좌우할 때 발생합니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시끄러우며 대단히 느린 합의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번거롭고 느린 절차만이, 선출되지 않은 소수 기득권층의 탐욕과 독선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입니다.
로렌 파월 잡스의 에머슨 컬렉티브 모델은 그 귀찮은 민주적 합의와 공시 책임의 굴레를 세련되게 회피한 채, '임팩트 혁신'이라는 아름다운 장신구를 걸치고 미국의 공론장을 은밀하게 종속시키고 있는 사적 자본 권력의 위선적인 민낯입니다.
좋은 의도로 위장된 불투명한 억만장자의 자금력이 공교육과 미디어의 방향타를 거머쥐고 흔들 때, 이를 더 이상 순수한 자선이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책임지지 않는 지배 권력입니다.
참고 자료
- The New York Times, “Laurene Powell Jobs’s Emerson Collective Acquires Majority Stake in The Atlantic,” 2017.
- Vox, “Silicon Valley’s New Philanthropy: How Laurene Powell Jobs’ LLC Model Bypasses Charity Rules,” 2019.
- The Washington Post, “The Power of Laurene Powell Jobs: Inside Her Quiet Mission to Shape Democratic Politics and Media,” 2020.
- Inside Philanthropy, “How Philanthropic LLCs Are Rewriting the Rules of Giving and Influence,”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