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연재] 본 글은 실리콘밸리 자본을 지렛대 삼아 미국의 사회·문화적 담론을 재설계하는 로렌 파월 잡스의 영향력 모델을 추적하는 3부작 기획의 일부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아내가 아니라, 진보 권력의 설계자
"로렌 파월 잡스"는 대중에게 주로 스티브 잡스의 아내이자 그가 남긴 유산의 상속자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녀를 단지 화려한 유산의 상속인으로만 한정해서 바라본다면, 오늘날 미국 정계와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권력의 동학을 완전히 놓치게 됩니다. 로렌 파월 잡스는 단순한 자산가가 아닙니다. 그녀는 천문학적인 실리콘밸리 기술 자본을 지렛대 삼아 교육, 이민, 기후변화, 시민사회, 그리고 주류 미디어를 관통하는 미국 진보 엘리트 카르텔의 최상위 설계자이자 후원자입니다.
그녀의 영향력 행사 모델의 중심에는 유한회사(LLC) 구조로 설립된 "에머슨 컬렉티브"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전통적인 비영리 자선 재단이 아닙니다. 자금 기부, 벤처 벤처투자, 정치 로비, 그리고 미디어 기업 인수를 한데 융합하는 기묘한 하이브리드 비즈니스 모델을 택하고 있습니다. 에머슨 컬렉티브는 교육 격차 해소, 기후 위기 대응, 이민제도 개혁 등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아이디어와 자본을 융합하는 임팩트 투자 기관임을 자처합니다. 그리고 목적 지향적인 사회적 기업가와 혁신가들에게 전략적으로 자본을 투입한다고 홍보합니다.
이러한 수식어들은 지극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덕주의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과거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전통적인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자신들의 원죄를 씻기 위해 병원, 도서관, 미술관 등 물리적인 벽돌 건물을 짓는 데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실리콘밸리 출신의 진보 억만장자들은 사회 제도의 방향성, 국경의 가치관, 기후 담론, 그리고 그것들을 설명하는 언론의 서술 구조에 지분을 투자합니다. 그들은 물리적 하드웨어가 아니라, 대중이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정신적 운영체제(OS)'를 직접 소유하고 설계하고자 합니다.
로렌 파월 잡스가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단지 대선 후보에게 후원금을 쪼개어 건네는 평범한 정치 기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진보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정당화하는 '담론 인프라' 그 자체의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배후의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The Atlantic을 산다는 것의 의미
2017년 에머슨 컬렉티브는 미국의 유서 깊은 지식지인 "더 애틀랜틱"의 과반 지분을 전격 인수하여 소유권을 확보했습니다. 1857년에 창간되어 16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더 애틀랜틱은 워싱턴과 뉴욕의 고학력 중산층, 연방 공무원, 대학교수와 오피니언 리더들이 탐독하는 미국 리버럴 진보 엘리트 담론의 본산과도 같은 상징적 매체였습니다.
이 인수는 단순한 미디어 투자 딜이 아닙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창출된 막대한 IT 버블 자본이 워싱턴의 심장부인 정치적 지식인 공론장을 사유화한 역사적 이정표입니다.
미디어 소유는 신발 공장이나 반도체 공장을 사들이는 것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미디어는 단순한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인지, 어떤 정치인이 우리 사회에 위험하고 파괴적인 인물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 운동이 고결한 도덕성을 지녔는지를 감별하는 사회적 '감별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애틀랜틱을 소유했다는 것은 잡지사의 지분 증서를 가졌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미국 영어를 사용하는 고학력 지식인 계층이 매일 아침 소비하고 인용하는 문장의 테두리를 장악했음을 의미합니다.
후보보다 강력한 것은 담론의 지배자다
일회성 선거 기부금은 선거철이 지나면 휘발됩니다. 후보는 당선될 수도 있고 낙선할 수도 있으며, 정권의 색깔은 4년마다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담론 체계는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장기적인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진짜 권력은 나를 대변해 줄 후보자를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 교양 있고 정당하며 어떤 주장이 반지성적이고 야만적인지를 가르는 공론장의 경계선을 소유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로렌 파월 잡스가 소유한 더 애틀랜틱은 바로 이 장기적인 지적 권력의 보루입니다. 그녀가 기자실에 전화를 걸어 특정 기사 헤드라인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정교한 통제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억만장자의 자본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고고한 지적 저널리즘 생태계를 통째로 먹여 살리는 순간, 그 생태계 소속 필자들은 알아서 후원자의 정치적 세계관을 세련되게 변호하는 언어를 생산해 냅니다. 독자들은 이를 '공정하고 독립적인 정통 언론의 목소리'로 소비하지만, 그 무대의 막 뒤에는 사적 자본의 기획이 단단히 버티고 있습니다.
여기에 진보 엘리트들의 지독한 위선과 정파적 이중잣대가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억만장자 루퍼트 머독이 월스트리트 저널을 사거나 폭스뉴스를 지배할 때, 진보 진영은 즉시 "자본이 민주적 언론을 오염시킨다"고 맹비난합니다. 일론 머스크가 X를 인수했을 때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념적 가치관을 대변해 주는 진보 억만장자가 더 애틀랜틱이나 워싱턴 포스트(제프 베이조스 소유)를 집어삼킬 때는 "저널리즘의 품격을 구원한 숭고한 자선 활동"이라고 화려하게 찬양합니다. 돈의 크기와 소유의 본질은 동일한데도, 내 편의 자본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선한 기부이고 남 편의 자본은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독약이라는 주장이야말로 그들의 모순을 극명히 드러냅니다.
에머슨 컬렉티브와 실리콘밸리식 진보의 본질
로렌 파월 잡스의 에머슨 컬렉티브는 일반적인 기부금 집행 단체가 아닌 사설 정책 플랫폼이자 투자회사입니다. 이는 교육, 이민, 기후 분야의 벤처 기업 투자를 통해 이윤을 내는 동시에, 그 자금으로 민주당 성향의 정치 광고와 시민사회 단체를 직접 후원합니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모델은 전통적인 자선 재단이 받아야 하는 법적 규제와 세무 공개 의무로부터 교묘하게 빗겨 나가 있습니다.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비와 투자를 제약 없이 변칙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전천후 영향력 머신입니다.
이 실리콘밸리식 진보는 노동자의 삶을 걱정하는 전통적 진보가 아닙니다. 샌더스식의 좌파 사회주의와도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세상을 마치 자신들이 코딩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처럼 내려다봅니다. 교육 제도는 시 주정부의 관료제 대신 테크 기술로 다시 설계할 수 있고, 이민은 다양성 지표와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리소스의 배분 문제이며, 기후는 녹색 자본 투자와 기술 혁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엘리트주의적 관점입니다.
하지만 이 플랫폼 진보주의의 치명적인 덫은 선출되지 않은 기술 귀족들이 자신들의 막대한 상속 자본을 활용해 시민들의 공적 영역에 직접 침투해 자신들의 비전을 일방적으로 주입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을 지배하는 권력자로 인식하지 않고, 사회의 비효율을 해결해 주는 선한 '문제 해결사(Problem solver)'로 낭만화합니다.
과거의 모든 군주와 제국들 역시 자신들의 정복 행위를 야만에 대한 문명화의 숭고한 혜택이라고 선전했습니다. 현대의 테크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계도적 권력 행사를 '사회적 임팩트(Social Impact)'라는 이름으로 세탁해 대중을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Emerson Collective라는 이름은 우연한 브랜드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국 지식인 전통의 가장 고상한 이름 중 하나인 랄프 월도 에머슨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이름을 통해서 자기신뢰, 시민적 책임, 도덕적 개인주의, 지적 독립성의 이미지를 빌려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에머슨은 The Atlantic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했습니다. 로렌 파월 잡스의 조직이 훗날 The Atlantic을 인수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미국 진보 엘리트가 자신을 어떤 전통 속에 놓고 싶은지를 보여줍니다.
결론: 품격의 기준을 장악한 보이지 않는 권력
현대의 엘리트 권력은 무장한 군인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검열관의 무식한 가위질 대신, 저널리즘 지원, 기후변화 대응, 다양성 존중이라는 고결하고 선한 형용사들을 앞세워 조용히 다가옵니다.
하지만 선한 단어의 장막 뒤에 숨은 자본 권력의 지배력은 비판하기가 훨씬 까다롭습니다. 그 누구도 양질의 시사 보도나 공익적 환경 캠페인을 겉으로 대놓고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로렌 파월 잡스는 잡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평범한 부망인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 유산을 이용하여 진보 리버럴 엘리트 계층의 담론 생산 공장을 직접 사들인 똑똑한 지적 설계자입니다.
그녀의 더 애틀랜틱 인수는 단순히 잡지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재계 소식이 아니라,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세상을 합리화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장착하는 지식의 공장이 어떻게 사적 자본의 기획 아래 편입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생생한 증거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는 공적 단어를 지배하고 품격의 경계선을 규정하는 권력이야말로, 법과 총칼보다 더 오래 공론장을 통제하는 진정한 지배의 얼굴입니다.
참고 자료
- The New York Times, “Laurene Powell Jobs’s Emerson Collective Acquires Majority Stake in The Atlantic,” 2017.
- NPR, “The Atlantic Sold to Laurene Powell Jobs’ Emerson Collective,” 2017.
- Vox, “Silicon Valley’s New Philanthropy: How Laurene Powell Jobs’ LLC Model Bypasses Charity Rules,” 2019.
- The Washington Post, “The Power of Laurene Powell Jobs: Inside Her Quiet Mission to Shape Democratic Politics and Media,”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