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 안의 파벌, 정치적 진영 싸움, 온라인 커뮤니티의 집단공격을 두고 우리는 종종 “야만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다시 문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칼과 도끼로 나타나던 인간의 집단성이 오늘날에는 다른 수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일까요.
마틴 스코세이지의 《갱스 오브 뉴욕》은 흔히 미국의 어두운 역사, 법과 질서가 정착되기 전의 야만적인 시대를 보여주는 영화로 소개됩니다. 영화 속 뉴욕은 피와 진흙으로 뒤덮여 있고, 갱단은 거리의 지배권을 두고 무기를 휘두릅니다. 경찰과 정치인과 범죄조직의 경계도 흐릿합니다.
그러나 영화 속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편리한 경계를 긋게 됩니다.
그들은 폭력적이었고 우리는 평화롭습니다.
그들은 민족과 종교를 앞세웠고 우리는 보편적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우두머리에게 충성했지만 우리는 법과 제도를 따릅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곧게 발전해 왔다는 휘그적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과 제도일지도 모릅니다.
《갱스 오브 뉴욕》은 야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동물성이 훨씬 직접적으로 사회와 정치를 구성하던 시대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물성과 야만성은 다릅니다
Michael Lundblad는 동물성과 야만성을 구별합니다.
동물성은 본능, 생존, 경쟁, 성욕, 충동, 집단성처럼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관련됩니다. 반면 야만성은 특정 인간집단을 문명 발달의 낮은 단계에 배치하는 도덕적 판단입니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공격하고 먹고 경쟁합니다. 그렇다고 동물이 고통을 즐기는 도덕적 악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만인’은 인간이면서도 자기통제 능력이 부족하고 잔혹함을 즐기며 문명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Lundblad가 분석한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서 이 차이는 인종적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백인 남성의 폭력은 순간적인 격정이나 동물적 본능으로 설명되어 어느 정도 이해되거나 감형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흑인 남성의 폭력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고통을 즐기는 야만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동물성은 때로 변명이 되었고, 야만성은 특정 집단을 단죄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 구별을 《갱스 오브 뉴욕》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사람들이 잔혹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문명 이전의 야만인으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원래 존재하는 집단성, 영역성, 충성, 경쟁, 보호와 복수의 성향이 제도의 중개 없이 직접 드러나는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빌 더 부처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연기한 빌 더 부처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입니다. 그는 잔혹하고 폭력적이지만 무질서한 광인은 아닙니다.
빌은 자기 영역을 지키고, 위계를 세우고, 충성을 요구하며, 배신을 처벌합니다. 약한 적은 경멸하지만 용감한 적은 존중합니다. 프리스트 밸런을 죽였지만 그의 용기를 기억하고 해마다 기립니다. 암스테르담에게서 재능과 강인함을 발견하자 그를 자기 곁에 두고 후계자처럼 대합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짐승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명예와 충성, 보호와 보복을 규정하는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빌의 도덕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자기 집단 안에서는 보호자이지만 집단 밖의 사람에게는 잔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집단적 동물성이 흔히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동물은 모든 개체에게 똑같이 친절하지 않습니다. 집단 내부에서는 협력하고 희생하면서도, 경계 밖의 경쟁자에게는 공격적일 수 있습니다. 보호와 폭력은 반드시 반대되는 본능이 아닙니다. 자기 무리를 보호하려는 성향이 바로 외부 집단을 공격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빌 더 부처는 문명에 도달하지 못한 야만인이 아닙니다. 그는 국가보다 집단이 가까웠던 시대의 정치적 동물입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연기가 특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빌을 단순한 악당으로 연기하지 않습니다. 빌에게는 영역을 차지한 우두머리의 자신감, 경쟁자를 살피는 포식자의 집중력, 자기 집단을 유지하는 지도자의 책임감이 함께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이민자와 젊은 경쟁자에게 밀려날 수 있다는 늙은 우두머리의 불안도 보입니다.
그가 자신들을 ‘Native Americans’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Native American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뜻하지 않습니다. 빌과 그의 집단은 먼저 태어난 미국계 백인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새로 들어온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보다 자신들이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먼저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논리인 동시에 영역을 선점한 집단의 오래된 주장입니다.
파이브 포인츠는 무질서가 아니라 대체 질서였습니다
파이브 포인츠에는 국가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오늘날처럼 개인의 일상적인 삶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정치조직과 연결되어 있었고, 소방대는 공공기관인 동시에 거리조직이었습니다. 복지제도는 미약했고, 일자리와 주거와 법적 보호는 개인이 속한 집단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가 치안과 복지, 취업과 행정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 자리를 가족, 교회, 민족공동체, 갱단과 정치조직이 채웠습니다.
누가 나에게 일자리를 구해주는가.
누가 가족을 보호해 주는가.
누가 굶을 때 음식을 가져다주는가.
누가 체포되었을 때 경찰과 이야기해 주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추상적인 시민권보다 실제로 나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는 집단에 충성합니다. 그 충성은 시민의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에서 생깁니다.
빌 더 부처는 이 제도적 공백을 공포와 보호, 명예와 보복으로 장악한 비공식 통치자입니다. 그는 범죄자인 동시에 거리의 치안과 질서를 결정하는 권력자입니다.
그의 권력은 법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가에서 나옵니다.
태머니 홀과 기계정치의 기원
영화에서 인간의 집단성을 조직하는 것은 갱단만이 아닙니다. 태머니 홀은 새로 도착한 이민자들에게 음식과 일자리, 법률적 도움과 행정적 편의를 제공합니다. 그 대가는 표와 정치적 충성입니다.
빌 더 부처가 공포와 보호로 거리를 지배했다면, 태머니 홀은 후견과 배분으로 선거구를 지배합니다.
빌은 배신자를 직접 처벌합니다.
태머니 홀은 일자리와 지원에서 배제합니다.
빌은 거리와 술집을 장악합니다.
태머니 홀은 선거구와 행정조직을 장악합니다.
빌은 개인적인 충성을 요구합니다.
태머니 홀은 집단적인 투표를 요구합니다.
하나는 칼을 든 우두머리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과 일자리, 공천과 행정서비스를 매개로 한 기계정치입니다. 인간의 동물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더 정교하게 조직된 것입니다.
기계정치를 단순히 부패와 후진성으로만 설명하면 그 역사적 기원을 놓치게 됩니다.
공적 복지가 없던 시절, 태머니 홀은 이민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보호망이었습니다.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해주었고, 그 대가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매표이자 부패이지만, 당시의 이민자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지켜주는 정치적 계약이기도 했습니다.
정치기계는 시민이 추상적인 정책을 비교해 선택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보호와 자원을 제공하는 조직과 유권자가 충성을 교환하는 제도입니다.
이 구조는 현대 정치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정당은 태머니 홀처럼 겨울철 석탄이나 식량을 직접 나눠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특정 지역과 계층, 직능집단을 보호한다고 약속하고, 예산과 자리와 정책을 배분하며 장기적인 정치적 충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유권자 역시 언제나 보편적인 국가정책만 보고 투표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 지역을 챙기는가.
누가 우리 집단의 이익을 지켜주는가.
누가 우리 편을 공직에 앉히는가.
누가 상대 진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가.
현대인은 부족정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부족적 충성과 호혜를 정당과 선거와 행정 속으로 옮겼습니다.
오늘날의 기계정치는 19세기 뉴욕과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폭력과 노골적인 매표는 줄었고, 법적 절차와 복지제도가 훨씬 정교해졌습니다. 그러나 자원과 보호를 충성과 교환하는 구조, 집단을 조직해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에는 태머니 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왜 그 시대에는 동물성이 직접 드러났는가
19세기 중반의 뉴욕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인구학적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출산율이 높았고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많은 아이가 태어났지만 질병과 영양 부족으로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성인도 감염병과 산업재해, 폭력에 쉽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족은 정서적 공동체인 동시에 노동력이고 보험이며 노후보장이었습니다.
인구구조도 지금보다 훨씬 젊었습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온 이민자를 비롯해 수많은 젊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일 안정적인 일자리와 주거, 복지와 교육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생존경쟁은 은유가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를 빼앗기면 굶을 수 있었습니다.
거리를 빼앗기면 장사와 주거를 잃을 수 있었습니다.
집단에서 배제되면 법적 보호까지 잃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집단은 취향이 아니라 생존 장치입니다.
출산율이 높았다는 사실 하나가 폭력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출산과 고사망, 젊은 인구구조와 빈곤, 대규모 이민과 약한 공적 안전망이 한꺼번에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이 조건에서는 인간의 집단성이 훨씬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충성은 미덕이기 전에 생존전략입니다.
배신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집단 전체에 대한 위협입니다.
영역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사는 공간입니다.
정치적 패배는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잃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속 폭력을 단순한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충분한 설명일까요.
그들의 폭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미개함도 아닙니다. 인간의 오래된 사회적 성향이 그 시대의 환경과 만나 나타난 결과입니다.
연방군의 함포가 의미하는 것
영화의 마지막에 빌과 암스테르담의 결투는 징병거부 폭동과 연방군의 포격 속에 묻혀버립니다.
이 장면을 갱단의 폭력보다 더 거대한 국가폭력이 등장한 순간으로만 읽으면 영화의 역사적 층위가 단순해집니다.
빌과 암스테르담의 싸움은 파이브 포인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둘러싼 지역적 영역투쟁입니다. 그러나 징병거부 폭동은 남북전쟁, 계급갈등, 이민자의 시민권, 흑인과 백인 노동자의 경쟁이라는 미국 전체의 모순이 폭발한 사건입니다.
가난한 이민자는 미국인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전쟁에는 동원됐습니다. 부자는 돈을 내고 징병을 피할 수 있지만 빈민은 전쟁터로 가야 합니다. 그 분노는 전쟁을 일으킨 정치권력이 아니라 더 가까이 있고 더 약한 흑인에게 향하기도 합니다.
연방군의 포격은 단순히 더 강한 폭력이 약한 폭력을 제압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지배하려 했던 작은 정치세계가 남북전쟁과 대규모 이민, 계급갈등이라는 더 큰 역사 속에 휩쓸리는 장면입니다.
빌과 암스테르담은 파이브 포인츠의 주인을 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싸우는 동안 파이브 포인츠가 속한 미국 자체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도덕적으로 패배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를 가능하게 했던 인구와 정치와 권력의 조건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빌 더 부처보다 나은가
오늘날 거리에서 정당과 민족집단이 도끼를 들고 선거구를 차지하려 싸우는 일은 드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동물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동물성을 직접적인 육체적 폭력으로 표현할 이유가 줄었습니다.
경찰과 법원은 사적 보복을 대신합니다.
복지와 보험은 가족과 민족공동체의 보호 기능을 일부 대신합니다.
노동시장은 개인이 조직을 바꾸며 생존할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선거는 권력투쟁을 정해진 절차 안에서 반복하게 합니다.
문명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기보다 그 본성이 표현되는 비용과 보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집단을 만들고 자기편을 보호하며 상대편을 위협으로 봅니다. 정치적 진영, 지역, 직장, 학교, 팬덤, 온라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사람에게 정체성과 보호를 제공합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칼과 주먹 대신 인사권, 법적 절차, 여론, 공천, 예산과 온라인 집단행동이 동원됩니다.
이것들을 빌의 칼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법과 선거와 행정은 실제 폭력을 줄였고, 권력에 이의를 제기할 통로도 만들었습니다. 제도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분명히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사용하는 인간의 성향까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절차는 갈등을 평화롭게 처리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상대 집단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이 빌 더 부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칼을 들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칼을 들어야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칼을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야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오래된 얼굴
《갱스 오브 뉴욕》을 미국의 어두운 역사라고 부르면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미개했고 우리는 문명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집단에 매달렸고 우리는 독립적인 개인입니다.
그들은 폭력에 의존했고 우리는 절차를 따릅니다.
그러나 영화는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출산과 사망이 모두 많았고, 생존이 어려웠으며, 국가보다 가족과 민족과 거리조직이 더 가까운 보호망이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환경에서 인간의 동물성은 충성, 보호, 영역, 복수, 폭력과 기계정치의 형태로 직접 나타났습니다.
빌 더 부처는 사라진 야만인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이 집단을 만들고 영역을 지키며 보호와 충성을 교환하는 오래된 성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태머니 홀 역시 사라진 정치의 화석이 아닙니다. 보호와 자원을 제공하고 충성을 얻는 기계정치의 구조는 오늘날에도 더 세련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빌 더 부처보다 더 좋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칼을 금지하고, 경쟁과 충성과 복수를 법과 선거와 조직의 절차 안에 가두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제도는 인간의 동물성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피를 요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반대로 제도가 약해지고 생존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은 다시 가족과 지역과 종교와 정치적 진영에 강하게 의존합니다. 자기편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고, 보호를 대가로 충성을 바치게 됩니다.
《갱스 오브 뉴욕》은 우리가 극복한 과거의 야만이 아닙니다.
제도의 외피가 얇았던 시대에 인간의 동물성이 어떤 모습으로 사회와 정치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빌 더 부처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생생한 이유는 그가 사라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명 이전의 괴물이 아니라, 문명 아래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오래된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