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들의 침묵》은 단순한 연쇄살인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할 때, 그리고 정체성과 도덕과 몸의 경계를 모두 상대화할 때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세 인물이 있습니다. 클라리스 스털링, 한니발 렉터, 그리고 버팔로 빌입니다. 클라리스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사람입니다. 렉터는 악인이지만 인간의 본질을 잔인할 정도로 꿰뚫어 보는 사람입니다. 반면 버팔로 빌은 자기 자신을 만들지 못하고 타인의 몸을 훔쳐 자신을 재구성하려는 사람입니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버팔로 빌이 단순한 괴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극단적 상대주의가 인간의 몸 and 정체성에 적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악몽입니다. 본질은 없고, 경계는 억압이며, 정체성은 조립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순간, 타인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 재료가 됩니다.
나방은 왜 중요한가
《양들의 침묵》에서 나방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버팔로 빌은 피해자의 입속에 나방 번데기를 넣습니다. 영화 포스터에서도 나방은 클라리스의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 나방은 흔히 “death’s-head hawkmoth”, 즉 등에 해골 같은 무늬가 있는 죽음의 머리 나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방은 영화에서 변신과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나방이 중요한 이유는 나방이 완전변태 곤충이기 때문입니다. 나방의 생활사는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으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성장이나 옷 갈아입기가 아닙니다. 번데기 안에서 애벌레의 많은 조직은 분해되고, 성충 원기라는 세포 집단이 그 재료를 이용해 전혀 다른 몸을 만들어 냅니다.
물론 애벌레의 모든 구조가 완전히 액체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구조와 성충 원기는 남아 성충의 몸을 조직합니다. 그러나 완전변태가 기존 몸의 해체와 새로운 몸의 재구성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점이 버팔로 빌에게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히 다른 옷을 입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방처럼 완전히 변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변태와 버팔로 빌의 변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자연의 변태는 내부 설계도에 따른 생명 과정입니다. 애벌레 안에는 이미 성충이 될 가능성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버팔로 빌에게는 그런 내부의 성숙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길러내지 못합니다. 대신 타인의 피부를 훔쳐 외부에서 자신을 꿰매려 합니다.
이것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버팔로 빌은 변태하는 것이 아니라 변태를 흉내 냅니다. 그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탈합니다.
포스터 속 달리의 해골
영화 포스터의 나방도 중요합니다. 포스터 속 나방의 몸에 있는 해골 이미지는 단순한 해골 무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바도르 달리와 사진가 필립 할스먼의 1951년 작품 〈In Voluptas Mors〉를 변형한 이미지입니다. 이 작품은 여러 명의 여성 누드가 해골 모양을 이루도록 배치된 사진입니다. Artsy는 이 작품을 “Voluptuous Death”로 설명하며, 누드 여성들이 섬뜩한 해골 형태를 이루도록 배열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 이미지는 《양들의 침묵》의 핵심 상징을 한 장면에 압축합니다.
나방은 변신을 뜻합니다. 해골은 죽음을 뜻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만든 해골은 타인의 육체가 하나의 이미지와 기호로 재배열되는 세계를 뜻합니다.
버팔로 빌의 범죄는 바로 이 이미지의 현실화입니다. 그는 여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감당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성의 외피를 자기 변신의 재료로 삼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악의 문제입니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변화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몸과 삶을 자기 결핍을 메우는 재료로 삼는 순간, 그 욕망은 악이 됩니다.
달리의 해골이 소름 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각각의 여성은 독립된 인격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해골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기 위해 배치됩니다. 몸은 기호가 되고, 인격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버팔로 빌의 세계입니다.
극단적 상대주의의 괴물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던은 어려운 철학 용어라기보다, 극단적 상대주의에 가깝습니다. 진실도 상대적이고, 도덕도 상대적이고, 정체성도 상대적이며, 결국 인간의 본질이나 선악의 기준까지 해체된다고 보는 태도입니다.
이 관점에서 버팔로 빌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괴물입니다. 그는 자기 몸과 자기 존재를 하나의 주어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바꿀 수 있고, 조립할 수 있고, 다른 것의 표면을 가져와 새로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변화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은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내면의 성찰과 도덕적 책임 없이 외부의 껍데기만 갈아입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버팔로 빌"**은 타인의 피부를 입으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괴물 같은 은유입니다. 본질은 없고, 경계는 억압이며, 정체성은 조립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순간, 인간은 타인마저 자기 정체성의 재료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피부를 입는다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를 바꾼다고 인간이 선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고, 표지를 바꾸고, 외피를 바꾼다고 내면의 공허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양들의 침묵》의 공포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변신”의 꿈을 보여주지만, 그 변신이 내부의 성숙이 아니라 외부의 약탈일 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악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렉터는 왜 상대주의자가 아닌가
흥미롭게도 한니발 렉터는 악인이지만 상대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잔혹하고 위험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질을 믿습니다. 그는 사람의 말보다 욕망을 봅니다. 이름보다 결핍을 봅니다. 사회적 포장보다 내면의 충동을 봅니다.
렉터에게 인간은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욕망, 수치심, 허영, 공포, 상처, 폭력성 같은 깊은 구조가 있습니다. 렉터는 그것을 너무 잘 봅니다.
그래서 렉터는 버팔로 빌과 반대편에 있습니다. 버팔로 빌은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렉터는 “너는 이미 네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렉터는 WASP적 교양의 비틀린 잔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련된 말투, 고급 취향, 예술적 감각, 지적 우월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양은 더 이상 도덕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문명화된 야만입니다. 야만이 문명을 파괴한 인물이 아니라, 문명이 도덕을 잃고 야만으로 변한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렉터는 몰락한 중심부의 악입니다. 반면 버팔로 빌은 해체된 주변부의 악입니다. 하나는 도덕을 잃은 교양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을 잃은 변신 욕망입니다.
클라리스는 무엇을 듣는가
클라리스 스털링은 이 둘과 다릅니다. 그녀는 이론으로 악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고통에 응답합니다. 그녀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 들었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단순한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존재를 외면하지 못하는 윤리의 시작입니다.
클라리스에게 피해자는 담론이 아닙니다. 피해자는 실제 사람입니다. 고통은 해석 이전에 존재합니다. 살인은 언어 이전에 악입니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면,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클라리스는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이름과 표면과 언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녀는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어둠 속에서 피해자를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버팔로 빌을 멈춥니다.
영화의 진짜 대립은 렉터와 버팔로 빌의 대립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대립은 버팔로 빌과 클라리스의 대립입니다. 버팔로 빌은 타인의 몸을 자기 변신의 재료로 삼습니다. 클라리스는 타인의 고통을 듣고 그를 구하려 합니다. 하나는 타인을 소비하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응답합니다.
가짜 변태와 진짜 윤리
나방의 완전변태는 생명의 과정입니다. 애벌레의 몸은 해체되고, 성충의 몸은 내부 설계에 따라 재구성됩니다. 그것은 성장입니다. 그것은 자연입니다.
그러나 버팔로 빌의 변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타인의 몸을 훔쳐 새로운 자신을 만들려 합니다. 그는 변태하는 것이 아니라 변태를 흉내 냅니다. 그는 나방이 아니라 나방의 상징에 사로잡힌 인간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껍데기 정체성 비판과 연결됩니다. 정체성은 단순한 표지가 아닙니다. 이름, 언어, 의상, 피부, 기호를 바꾼다고 인간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에는 내면의 성숙이 필요합니다. 도덕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을 때 정체성은 인격이 아니라 의상이 됩니다. 그리고 타인은 이웃이 아니라 옷감이 됩니다.
《양들의 침묵》은 바로 그 공포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타인의 피부를 입고 다른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의 피부를 입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변신은 성장도 해방도 아닙니다. 그것은 악의 모방일 뿐입니다.
다음에는 화해가 필요하다
《양들의 침묵》은 어두운 영화입니다. 여기에는 타인의 고통을 먹고 자기 욕망을 완성하려는 인간이 나옵니다. 교양은 도덕을 잃었고, 정체성은 껍데기로 무너졌으며, 몸은 기호와 재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부 이런 세계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클라리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듣습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다시 인간이 되려면, 먼저 타인을 재료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피부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필요한 영화는 화해의 영화입니다. 《양들의 침묵》이 타인의 몸을 훔치는 악을 보여준다면, 《스모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윤리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타인의 피부를 입으려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영화입니다.
악은 타인을 재료로 삼는 데서 시작됩니다. 화해는 타인을 이야기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진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가 힘을 얻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근대의 질서가 너무 많은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문명, 하나의 정상성, 하나의 도덕, 하나의 중심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삶의 가치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성의 경험, 하층민의 경험, 이민자의 경험, 지방의 경험, 소수자의 경험, 패배자의 경험은 오랫동안 중심의 언어 바깥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 질서를 의심하고, 감추어진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시도는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하나의 절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모든 판단이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중심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곧 모든 것이 똑같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가 개연론입니다.
개연론은 인간이 절대적 확실성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그럴듯한 것과 덜 그럴듯한 것, 더 인간적인 것과 덜 인간적인 것, 더 책임 있는 것과 덜 책임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빛의 정확한 속도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우리가 관측한 결과인 2.99792458 × 1010 cm/sec 라는 것으로 충분히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타인의 피부를 벗겨 입는 것은 악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듣고 구하려는 것은 선에 가깝습니다. 이것 역시 완전한 형이상학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눈을 갖지 못했지만, 인간의 눈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 상대주의는 절대주의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판단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개연론은 다릅니다. 개연론은 겸손하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완전한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개연성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만한 사람을 알아봅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덜 잔인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양들의 침묵》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공포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너머의 길도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그 길은 절대적 진리의 복귀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듣고, 더 그럴듯한 선을 선택하며, 완전하지 않은 인간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인정하는 길입니다.
참고문헌
- 조너선 드미 (감독). (1991).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영화]. 오라이온 픽처스.
- 웨인 왕 (감독). (1995). 《스모크》 (Smoke) [영화]. 미라맥스.
- 필립 할스먼 & 살바도르 달리. (1951). 《In Voluptas Mors》 [사진].
- Artsy. “Salvador Dalí & Philippe Halsman: In Voluptas Mors.” Artsy 작품 소개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