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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전쟁은 누구를 ‘우리’ 밖에 세우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통해 전쟁이 타인을 ‘우리’의 경계 밖에 놓는 방식과, 그 경계가 무너질 때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지옥의 묵시록》: 전쟁은 누구를 ‘우리’ 밖에 세우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은 흔히 전쟁의 광기나 문명의 허약함을 다룬 영화로 해석됩니다.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을 베트남전쟁으로 옮겨온 작품인 만큼, 문명인이 밀림에 들어가 야만인으로 변해가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읽으면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됩니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문명의 외피를 벗으면 야만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을 수행하는 문명사회가 누구를 자신의 ‘우리’ 안에 포함하고, 누구를 그 경계 밖에 남겨두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쟁은 상대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자신과 같은 ‘우리’로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집니다.

킬고어 중령은 왜 서핑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

영화 전반부를 지배하는 빌 킬고어 중령은 헬리콥터 부대를 이끌고 베트남 마을을 공격합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해안 마을을 폭격한 뒤, 파도가 좋다는 이유로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에게 서핑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아침에 풍기는 나팜탄 냄새가 좋아.”

이 장면은 흔히 킬고어의 광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킬고어는 단순한 광인도, 인간성이 결여된 괴물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는 좋은 지휘관입니다. 부하의 용기를 인정하고, 유명한 서퍼를 보호하며, 위험한 전투에서는 누구보다 앞에 섭니다. 그는 활기차고 낙천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전형적인 미국 군인입니다.

문제는 그의 인간성이 작동하는 범위입니다.

킬고어에게 미군 병사는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트남인은 적군, 민간인, 마을 주민, 사상자 같은 범주로만 존재합니다. 베트남인의 죽음은 그의 도덕적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을이 불타는 동안에도 파도를 볼 수 있습니다.

잔혹함은 반드시 인간성을 잃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성을 자기편에게만 적용해도 충분히 잔혹해질 수 있습니다.

전쟁은 ‘우리’의 경계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료, 같은 국민처럼 자신이 ‘우리’라고 느끼는 사람의 고통에는 강하게 반응합니다. 반면 그 경계 밖의 사람은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외국인, 적군, 난민, 현지인, 사상자 같은 추상적인 범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전쟁은 이 구분을 더욱 강화합니다.

자기편 병사 한 명이 죽으면 그의 이름과 가족, 고향과 어린 시절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적군 수백 명이 죽으면 전과나 통계로 발표됩니다. 자기편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상대편의 죽음은 작전 결과입니다.

베트남전쟁도 베트남인이 미국인의 ‘우리’ 바깥에 머무는 동안에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은 자신들의 아들과 남편이 베트남에 가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에 살고 있던 베트남인의 삶은 좀처럼 같은 무게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마을은 누군가가 태어나고 자라고 가족을 이루는 생활공간이 아니라, 작전지역이나 적의 근거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한 사람씩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인식이 유지되는 동안 전쟁은 미국인의 일상과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이 베트남인의 얼굴을 미국 가정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이전 전쟁과 달리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미국인의 가정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부상당한 아이와 불타는 마을, 울고 있는 부모와 도망치는 주민의 모습이 반복해서 방송되었습니다. 베트남인은 더 이상 지도 위의 표적이나 사상자 숫자로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아이를 보호하고, 가족을 잃고, 공포 속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트남인이 미국인의 완전한 ‘우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추상적인 타자로만 남아 있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고통이 미국인의 도덕적 시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전쟁은 이전처럼 지속되기 어려워졌습니다.

군사적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전쟁을 감당하는 비용은 급격히 커졌습니다. 상대가 단순한 적이 아니라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통받는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폭격과 학살은 더 이상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작전으로만 남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조금씩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전쟁의 정당성은 흔들립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윌러드

윌러드 대위가 커츠 대령을 제거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도 문명에서 야만으로 퇴행하는 과정이라기보다, 미국인의 시야 밖에 놓여 있던 전쟁의 실체로 접근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출발점에는 군사 브리핑과 문서, 명령과 계급이 있습니다. 전쟁은 정돈된 언어로 설명됩니다. 커츠는 명령체계를 이탈한 장교이고, 윌러드의 임무는 그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을 올라갈수록 그런 설명은 힘을 잃습니다.

누가 지휘하는지도 모르는 전투가 이어지고, 미군은 목적도 알지 못한 채 총을 쏩니다. 조명과 음악, 플레이보이 공연과 서핑 같은 미국 문화가 밀림 한가운데에 잠시 등장하지만 곧 사라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전쟁을 정당화하던 언어가 아니라, 전쟁이 실제로 만들어낸 시체와 공포입니다.

밀림은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미국 본토의 인식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입니다. 미국 사회가 자기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결과를 직접 보지 않아도 되는 장소입니다.

윌러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야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문명이 감추고 있던 결과를 향해 다가갑니다.

커츠는 진실을 본 사람인가

커츠 대령은 미군의 엘리트였습니다. 육사 출신의 장교였고, 뒤늦게 특수전 훈련까지 받아 현장에 들어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명령하면서도, 승리에 필요한 잔혹함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대규모 폭격과 살상을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면서, 현장의 지휘관이 직접 잔혹한 방법을 선택하면 비도덕적이라고 단죄했습니다.

커츠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의 밀림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현대전이 감추고 있던 폭력이 더 이상 보고서와 통계 뒤에 숨지 않습니다. 잘린 머리와 시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커츠가 진실을 보았다고 해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베트남인을 미국인의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적의 의지와 잔혹함을 인정했지만,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또 다른 폐쇄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보호하고, 경계 밖의 사람은 죽여도 되는 왕국입니다.

커츠는 국가의 위선을 벗어났지만, 그 자리에 자신의 절대적 판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전쟁의 거짓말을 폭로했지만, 폭력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폭력을 숨기지 않고 직접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커츠와 킬고어는 정말 반대인가

표면적으로 킬고어와 커츠는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입니다.

킬고어는 군복을 입고 합법적인 명령을 수행합니다. 커츠는 군의 통제를 벗어나 개인 왕국을 세웁니다. 킬고어의 폭력에는 헬리콥터와 무전기, 작전명과 음악이 붙어 있습니다. 커츠의 폭력에는 피와 시체, 잘린 머리가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과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편의 충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지만, 경계 밖의 인간에게는 가혹합니다.

차이는 폭력의 도덕적 구조가 아니라 표현 방식에 있습니다.

킬고어는 폭력을 문명의 언어로 감춥니다. 커츠는 그 언어를 제거합니다.

킬고어는 전쟁을 즐거운 모험처럼 만들고, 커츠는 전쟁을 피와 공포의 의식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자신과 같은 ‘우리’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 공포, 그 공포”

커츠가 죽어가며 남기는 말은 “그 공포, 그 공포”입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고, 전쟁의 잔혹함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만든 왕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커츠는 전쟁의 거짓말을 벗겨낸 끝에 어떤 순수한 진실이나 고귀한 영웅주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나누고, 경계 밖의 인간을 제거하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커츠는 미국의 위선을 거부했지만, 그 자신도 더 넓은 ‘우리’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국가의 경계를 벗어난 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더 좁고 폭력적인 경계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그의 공포였을지도 모릅니다.

코폴라는 왜 이 영화를 만들었는가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보여주려 한 것은 단순히 전쟁이 나쁘다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나쁘다는 말만으로는 이처럼 기괴하고 매혹적인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전쟁이 어떻게 하나의 사회 안에서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전쟁터의 군인은 모두 광인이 아닙니다. 본국의 시민도 모두 잔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아끼며, 자기 공동체 안에서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전쟁은 벌어집니다.

그 이유는 인간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성이 적용되는 범위가 좁기 때문입니다. 자기편의 고통은 생생하지만, 경계 밖의 고통은 추상적입니다. 자기편의 죽음은 비극이고, 상대편의 죽음은 전황입니다.

코폴라는 이 심리적 분리를 관객이 직접 경험하게 만듭니다.

헬리콥터 공격 장면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흥분되게 촬영되어 있습니다. 관객은 바그너의 음악과 헬기의 움직임에 매료됩니다. 마을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면서도 잠시 킬고어의 시선으로 전쟁을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습니다.

코폴라는 관객에게 전쟁을 멀리서 비판할 안전한 위치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장관으로 소비하게 만든 뒤, 그 매혹 자체가 무엇을 지워버렸는지 묻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

베트남전쟁이 지속되기 어려워진 것은 단순히 미군의 사상자가 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베트남인의 얼굴이 미국인의 가정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더 이상 완전히 낯선 타인의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그들’과 ‘우리’의 구분을 필요로 합니다. 상대가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전쟁은 군사적으로 가능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물론 모든 베트남인이 미국인의 진정한 ‘우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공동체 의식은 그렇게 쉽게 확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완전히 비인간적인 대상으로 남겨둘 수 없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 명의 아이가 불에 타고 달아나는 장면은 수천 명의 사상자 통계보다 강합니다. 숫자는 경계 밖에 둘 수 있지만, 얼굴은 쉽게 밀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명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우리’라는 감각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가족과 공동체, 국가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요구는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문명의 역할은 모든 사람을 같은 가족처럼 느끼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명은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친밀하게 느끼지 못하며, 우리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최소한의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전쟁에서도 포로를 죽이지 말아야 하고, 민간인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의 생명을 단순한 통계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경계 안에서 강하게 작동합니다. 법과 절차는 그 감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최소한의 억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문명은 ‘그들’을 모두 ‘우리’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들이 우리의 ‘우리’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이든 해도 되는 상태를 막습니다.

전쟁의 진짜 경계

《지옥의 묵시록》이 보여주는 지옥은 밀림 자체가 아닙니다.

그 지옥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우리’ 밖에 놓고, 그들의 고통을 보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킬고어가 나팜탄 냄새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정상적인 괴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불타는 마을의 사람들이 그의 도덕적 세계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커츠는 그 폭력을 직접 보았지만, 더 넓은 인간 공동체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낡은 경계를 부순 뒤 자신만의 더 잔혹한 경계를 세웠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이 미국인의 ‘우리’ 바깥에 머무는 동안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이 미국인의 가정 안으로 들어오고, 베트남인의 얼굴이 적군이나 사상자 숫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인간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점차 지속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전쟁을 끝내는 것은 언제나 군사적 패배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이 보이고,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도덕적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전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될 수 없습니다.

《지옥의 묵시록》은 문명인이 밀림에서 야만인으로 변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문명사회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우리’ 바깥에 세워두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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