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흔히 엄격함을 보수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권위, 절제, 복종, 훈육, 금욕 같은 말이 나오면 그것을 보수주의의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규범을 중시하지만, 규범 자체를 숭배하는 사상은 아닙니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경험주의에 기초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가족은 왜 필요한가,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상상력과 놀이와 온기는 왜 삶에 필요한가, 전통은 어떤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는가를 묻습니다. 보수주의는 추상적 이념보다 누적된 경험을 신뢰합니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러나 인간이 규범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압니다.
반면 규범주의는 다릅니다. 규범주의는 삶에서 규범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잊고, 삶이 규범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규범이 어느 순간 인간을 꺾는 도구가 됩니다. 가족은 온기의 장소가 아니라 감옥이 되고, 종교는 위로가 아니라 통제가 되며, 훈육은 성장의 길이 아니라 생명력을 말려 죽이는 방식이 됩니다.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는 바로 이 문제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보수주의의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수주의의 껍데기를 쓴 규범주의가 어떻게 삶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따뜻한 세계와 차가운 세계
《화니와 알렉산더》의 초반부에는 에크달 가문의 세계가 나옵니다. 그곳은 완벽한 도덕의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허영도 있으며, 실수도 하고, 때로는 방탕합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는 온기가 있습니다. 식탁이 있고, 연극이 있고, 웃음이 있고, 아이들의 상상력이 있습니다. 가족은 느슨하지만 살아 있습니다.
이 세계는 질서정연한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의 결함 속에서도 사랑을 느끼며, 삶의 다채로움을 경험합니다. 전통이 있다면 이런 것이 전통입니다. 완벽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게 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에드바르드 베르게루스 주교의 집이 있습니다. 그는 루터교 주교입니다. 그 집은 깨끗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종교적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생명의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통제의 질서입니다.
주교의 집에는 웃음이 없습니다. 이야기와 상상력이 없습니다. 아이의 거짓말은 단순한 장난이나 상상력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가 되고,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집은 검소하지만 차갑고, 규율은 분명하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이것이 규범주의의 특징입니다. 규범주의는 삶을 정리하지만, 삶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주교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에드바르드 주교는 보수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종교를 말하고, 권위를 말하고, 절제를 말하고, 복종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외피를 쓴 규범주의자입니다.
보수주의는 가족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교는 가족을 감옥으로 만듭니다.
보수주의는 아이의 성장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교는 아이의 상상력을 죄로 만듭니다.
보수주의는 종교적 위로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주교는 종교를 통제의 도구로 만듭니다.
보수주의는 삶의 연속성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교의 질서는 삶을 말려 죽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반보수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수주의가 지키려는 실제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식은 지키지만 목적을 잃었습니다. 규범은 남았지만 인간은 사라졌습니다.
보수주의는 삶에서 규범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규범주의는 삶이 규범에 복종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차이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보수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가들이 고안해 낸 추상적 도덕주의와 설계주의적 오만을 비판했습니다. 혁명가들은 머릿속으로 완벽한 도덕의 설계도를 그린 뒤, 현실의 불완전한 인간들을 그 질서 아래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습니다. 에드바르드 주교의 통제 역시 이 점에서 보수주의가 아니라 추상적 도덕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인간을 차가운 규율의 틀 안에 맞추려 합니다. 보수주의는 현실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안고 가며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보호하려는 경험주의의 산물이지, 박제된 규율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독단주의가 아닙니다.
경험주의 없는 규범은 껍데기다
보수주의가 경험주의에 기초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보수주의는 인간을 추상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충동적이고, 쉽게 흔들리고, 자기 욕망을 고귀한 말로 포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따뜻함과 놀이와 상상력과 애착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경험을 무시한 규범은 인간을 지키지 못합니다.
주교에게는 이 경험주의가 없습니다. 그는 현실의 인간을 보지 않습니다. 그는 규범만 봅니다.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가족이 어떤 온기를 필요로 하는지, 상상력이 왜 삶에 필요한지, 슬픔과 기쁨이 어떻게 인간을 지탱하는지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를 말하지만, 인간을 모릅니다.
도덕을 말하지만, 아이를 모릅니다.
신앙을 말하지만, 삶을 모릅니다.
이런 규범은 보수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형식입니다.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권위, 삶을 이해하지 않는 질서, 인간을 보지 않는 규범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규범주의입니다.
보수주의가 전통을 중시하는 이유는 전통이 오래되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래 살아남은 것에는 대개 어떤 경험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예절, 종교, 공동체, 의례는 인간이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규범주의자는 이 기원을 잊습니다. 그는 전통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인간이 전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순간 전통은 지혜가 아니라 폭력이 됩니다.
아이의 상상력은 왜 중요한가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알렉산더의 상상력은 단순한 장난이 아닙니다. 아이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견딥니다. 죽음, 두려움, 억압, 어른들의 거짓말, 가족의 변화 같은 것을 아이는 있는 그대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규범주의자는 이것을 위험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은 규범의 언어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습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어른의 권위가 닿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주교는 바로 그 공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는 아이의 상상력을 죄로 만들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상상력을 꺾는 것은 단지 아이의 거짓말을 바로잡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세계를 견디는 방식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보수주의자는 아이의 상상력을 무조건 방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성장에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규율만이 아닙니다. 이야기, 놀이, 온기, 보호,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훈육은 훈육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규범주의자는 자기 자신도 잃는다
규범주의의 문제는 타인만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규범주의자는 결국 자기 자신도 잃습니다. 그는 규범을 통해 자기 내면을 보려 하지 않고, 규범 뒤에 숨습니다. 자신의 두려움, 욕망, 분노, 권력욕을 도덕의 언어로 포장합니다.
이 점에서 규범주의자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는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선하다고 믿습니다. 자신은 질서를 세우고 있고,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있으며, 신앙을 지키고 있고, 가정을 바로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노골적인 악인은 알아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선한 말로 포장된 권위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규범주의자는 타인을 지배하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처벌하면서도 그것을 훈육이라고 부르며, 생명력을 꺾으면서도 그것을 질서라고 부릅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이런 자기기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고귀한 언어로 포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규범 자체도 자기기만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역설을 모르면 보수주의는 쉽게 규범주의로 타락합니다.
보수주의자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보수주의자가 지켜야 할 것은 규범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규범이 지키려 했던 삶입니다.
가족을 지킨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형식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족 안의 온기, 책임, 돌봄, 기억, 연속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종교를 지킨다는 것은 종교적 권위를 보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위로와 의미를 주는 능력을 지키는 것입니다. 훈육을 지킨다는 것은 아이를 복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입니다.
규범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규범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규범이 인간을 살리지 못하고 말려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수주의의 규범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껍데기입니다.
《화니와 알렉산더》가 보여주는 악은 무질서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질서의 이름으로 삶을 말려 죽이는 악입니다. 보수주의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만능주의만이 아닙니다. 규범을 신성화한 나머지 인간을 잃어버리는 규범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삶을 본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추상적 규범보다 삶을 먼저 봅니다. 삶에서 규범이 나왔고, 규범은 다시 삶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규범은 폭력이 됩니다.
사람들은 주교의 엄격함을 보고 보수주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경험주의 없는 규범주의자입니다. 그는 인간을 보지 않고 규범만 봅니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깨끗하지만 차갑고, 질서 있지만 죽어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수주의는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규범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알기에 규범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실수하고, 거짓말하고, 욕망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인간은 사랑받고, 놀고,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온기가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는 규범과 온기 사이의 균형을 찾는 태도입니다. 규범 없는 온기는 방종이 되기 쉽고, 온기 없는 규범은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화니와 알렉산더》는 후자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그 영화 속 주교의 집은 보수주의의 집이 아니라 규범주의의 감옥입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그 감옥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감옥으로부터 삶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보수주의자는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규범이 지키려 했던 삶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참고문헌
- Bergman, Ingmar. (1983). Fanny and Alexander: A Film. Pantheon Books.
- Bergman, Ingmar. (1988). The Magic Lantern: An Autobiography. Translated by Joan Tate. Viking.
- Bergman, Ingmar. (1982). Fanny and Alexander [Film]. Svenska Filminstitutet.
- Edmund Burke. (1790).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