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래된 영웅을 다시 대형 스크린으로 불러냈습니다. 전쟁과 괴물, 신들의 방해가 장대한 볼거리를 만들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정복보다 훨씬 소박한 목적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더 넓은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아내와 아들, 집과 왕국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영화는 원전의 사건과 인물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따라서 영화 속 오디세우스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완전히 같은 인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놀란이 다시 꺼낸 귀환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영웅이란 끝없이 자신을 확장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왼쪽부터 칼립소 역의 샤를리즈 테론,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제작자 에마 토머스, 오디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 사진: 대한민국 정부(KOREA.NET),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원본을 1200px로 축소해 WebP로 변환했으며, 변환본에도 같은 라이선스를 적용합니다.
정치사상은 어느 날 철학자의 책 속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이름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서로 다른 성격의 영웅을 이야기해 왔고, 고대 그리스에는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감정과 존엄을 배반하지 않는 영웅이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세계를 지키기 위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하는 영웅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리버럴은 아킬레우스의 덕목을 계승했고, 보수주의자는 오디세우스의 덕목을 계승했습니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현대 자유주의자였고 오디세우스가 보수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정치이론을 제시한 철학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심리의 오래된 원형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왜 싸우지 않았는가
아킬레우스는 그리스군에서 가장 강한 전사이지만,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자 전투를 거부합니다. 그리스군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사실도 그의 결정을 바꾸지 못하는데, 아킬레우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승리보다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렇다면 그 부당함이 바로잡히기 전까지 공동체에 협력하지 않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당하게 대우받았는가?
그에게 감정은 단순한 충동이 아닙니다. 분노는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는 증거이며, 그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곧 자신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분노로 인해 동료들이 죽고 전쟁이 불리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해서 개인에게 부당함을 참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오늘날 리버럴의 중요한 덕목, 곧 개인의 존엄과 자기표현, 진정성, 인정받을 권리, 부당한 권위에 대한 저항과 연결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의 관습이나 질서와 충돌하는 것도 감수하는 태도입니다. 요컨대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세계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세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왜 참았는가
오디세우스도 강한 전사이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전투력이 아닙니다. 그는 기다릴 줄 알고, 자신을 숨길 줄 알며, 상대의 약점을 관찰할 줄 압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행동을 분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당장 자신이 왕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구혼자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아내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고도 곧바로 칼을 뽑지 않고, 오히려 거지로 변장한 채 누가 자신에게 충성했는지, 누가 배신했는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아킬레우스였다면 모욕을 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의 즉각적인 해소가 아니며, 그의 질문은 다릅니다.
지금 이 행동은 결국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더라도 정당한 분노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모욕을 견디고 정체를 감추며,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 우회합니다. 정면으로 싸울 수 없을 때는 기다리고, 상대가 방심했을 때 행동합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판단입니다.
오디세우스의 특별한 능력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구혼자들을 보며 분노하고 자기 집에서 모욕당하며 수치심을 느끼지만, 그 감정을 곧바로 행동의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 안에서 상대의 숫자와 힘, 가족과 하인들의 충성심을 확인합니다.
아킬레우스의 심리가 “나는 이렇게 느끼므로 행동한다”라면, 오디세우스의 심리는 “나는 이렇게 느끼지만, 결과를 위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감정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정당성과 행동의 타당성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전쟁은 목적이 아니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끝난 뒤 갑자기 현실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도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는 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킬레우스에게 전쟁이 명예를 증명하는 장소였고 알렉산더에게 전쟁이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는 방식이었다면, 오디세우스에게 전쟁은 끝내야 할 과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병사를 희생시키면서 트로이 성벽을 반복해 공격하기보다, 트로이 목마라는 계략을 사용해 전쟁을 끝냅니다.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전쟁관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영웅적인 돌격이 아니라 목적의 달성이며, 승리한 뒤에는 더 많은 전쟁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렉산더는 승리할 때마다 다음 정복지를 찾았고 승리는 새로운 전쟁의 근거가 되었지만, 오디세우스는 승리하면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렉산더에게 전쟁은 삶의 방향이었지만, 오디세우스에게 전쟁은 끝내야 할 의무였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싸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싸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싸우지는 않는 사람이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의 책임 범위를 무한히 확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제국이 아니라, 이타카로 돌아가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자신의 집과 왕국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정복자가 아니라 귀환자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확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귀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 하지 않고,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 세계는 거대하지 않습니다. 아내 페넬로페, 아들 텔레마코스, 이타카의 작은 왕국, 자신의 집과 재산, 신하들과 이웃이 전부이지만, 그것은 그가 실제로 책임져야 하는 세계입니다.
알렉산더에게 세계가 확장해야 할 대상이라면, 오디세우스에게 세계는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지켜야 할 장소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경계를 만나면 넘어가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무너진 경계를 다시 세우려 합니다.
이것은 내 집입니다.
이 사람은 내 아내입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입니다.
이 섬은 내가 책임질 공동체입니다.
손님에게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처단한 것은 단순히 질투 때문이 아닙니다. 구혼자들은 그의 집을 점거하고 재산을 소비했으며, 아들을 위협하고 손님과 주인 사이의 규범을 파괴했습니다.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폭력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혁명적 폭력이 아니라, 무너진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폭력입니다. 그는 정복자가 아니라 귀환자이며, 창조자가 아니라 복원자입니다.
오디세우스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가장 가슴 아프게 보여주는 존재는 페넬로페도, 텔레마코스도 아닙니다. 그가 트로이로 떠나기 전에 직접 길렀던 사냥개 **아르고스(Argos)**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7권에서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한 채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자신의 집으로 향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쇠약해져 거름더미 위에 누워 있던 아르고스는 곁에 선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 머리를 들며, 꼬리를 흔들고 두 귀를 내립니다. 너무 늙어 주인에게 다가갈 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눈물을 닦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개에게 달려갈 수 없습니다. 아르고스는 20년 만에 주인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죽습니다. 이 장면이 잔인한 이유는 아르고스가 죽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알아보고도 아직 사랑을 표현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개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변장은 무너지고, 가족과 왕국을 되찾기 위한 계획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놀란의 영화는 아르고스의 과거를 확장하고, 귀환한 오디세우스가 아르고스와 직접 접촉하게 만듭니다. 원전에서 오디세우스가 눈물을 감추며 지나쳐야 했던 절제를 영화는 보다 직접적인 재회의 감정으로 바꿉니다. 두 장면의 표현은 다르지만 아르고스의 기능은 같습니다. 신분과 옷차림이 모두 달라져도 관계의 기억은 오디세우스를 알아봅니다.
아르고스는 충성스러운 개 한 마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한때 뛰어난 사냥개였던 그가 주인 없는 집에서 방치됐다는 사실은 이타카의 질서가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구혼자들은 왕의 식탁과 재산을 차지했지만 왕이 책임지던 늙은 개 한 마리조차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르고스의 쇠약한 몸은 오디세우스가 부재한 왕국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늑대에서 개로, 다른 종의 마음을 읽은 동물
아르고스가 특별한 문학적 상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간과 개가 함께 걸어온 훨씬 오래된 역사가 있습니다.
개는 오늘날 살아 있는 특정 늑대 무리가 그대로 길들여진 동물이 아닙니다. 현생 개는 오래된 늑대 계통에서 기원했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어느 한 고대 늑대 집단도 모든 개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가축화가 시작됐는지도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다만 늦어도 농경과 도시가 등장하기 전부터 초기 개들이 인간 집단과 관계를 맺고 함께 이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과정을 사나운 늑대가 착한 개로 변한 도덕적 동화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늑대도 가족 무리 안에서 협력하고 복잡한 사회관계를 형성하며, 개도 공격성과 질투, 영역과 자원을 지키려는 행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가 모든 인지 과제에서 늑대보다 뛰어나거나 언제나 덜 공격적이라는 단순한 주장도 최근의 비교 연구에서는 지지되지 않습니다.
개의 특별한 변화는 인간이라는 다른 종을 사회적 관계의 상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덜 두려워하고 더 가까이 바라볼 수 있었던 개체는 인간의 표정과 시선, 목소리와 손짓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통제된 환경에서 비교한 연구에서도 어린 개들은 비슷한 나이의 늑대보다 인간에게 더 끌리고, 사람의 몸짓을 더 능숙하게 이용하며, 더 많은 눈맞춤을 보였습니다.
이 차이는 개가 늑대보다 모든 면에서 더 영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늑대는 같은 종의 동료와 협력하고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납니다. 개의 인지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태적 지위에 맞게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늑대의 사회성이 주로 자기 무리 안에서 작동했다면, 개는 그 사회적 관심을 인간이라는 다른 종까지 넓혔습니다.
호메로스가 아르고스 장면을 쓸 때 가축화 이론을 알았을 리는 없습니다. 아르고스가 20년 뒤 오디세우스를 알아본 장면을 특정한 후각 실험의 결과처럼 읽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문학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수천 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까닭은 인간과 개 사이의 관계가 이미 고대인에게도 특별한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디세우스의 얼굴과 옷을 보고 거지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르고스는 그 외형 아래에 남아 있는 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의 제도와 신분이 오디세우스를 지웠을 때, 늑대에서 갈라져 인간의 신호를 읽는 동물이 된 개가 그의 정체성을 보존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처음 증명한 것은 왕관이 아니라, 늙은 개가 흔든 꼬리였습니다.
이 점에서 아르고스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이라는 주제를 완성합니다. 귀환은 단순히 옛 땅에 발을 딛는 일이 아닙니다. 오랜 부재에도 자신을 기억하는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집은 건물이 아니라 나를 알아보는 존재들이 있는 곳이며, 오디세우스가 되찾으려 한 질서도 결국 그런 기억과 책임의 관계였습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오디세우스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잘하고 약탈에 참여하며, 때로는 허영심 때문에 실수합니다. 키클롭스에게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명백한 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정도 약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결함이 전혀 없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결함을 알게 되는가, 실패에서 배우는가,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가입니다. 키클롭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순간 오디세우스는 승리의 흥분과 허영을 통제하지 못했지만, 이것을 단순히 미성숙한 영웅의 실수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실패의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는 점입니다.
오디세우스는 감정을 완전히 정복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자만이 언제든 자신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의 절제는 타고난 냉정함이 아니라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의 자기제한에 가깝습니다. 키클롭스에게 이름을 외쳤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이름과 감정을 철저히 숨기며, 젊은 오디세우스가 자랑하고 싶어 했다면 귀환한 오디세우스는 기다릴 줄 압니다.
그는 완벽해서 보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수주의적입니다. 보수주의는 인간에게 완전성을 요구하지 않고, 인간에게는 허영심과 욕망, 두려움과 질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회는 완벽한 인간을 전제로 설계되어서는 안 되며,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아킬레우스의 진정성과 오디세우스의 절제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는 선한 영웅과 악한 영웅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덕목을 구현하는 두 사람입니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진실하다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책임질 사람들에게 충실하고, 아킬레우스가 모욕을 참지 않는다면 오디세우스는 목적을 위해 모욕을 견딥니다. 아킬레우스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오디세우스는 우회하고 기다리며, 아킬레우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때 오디세우스는 불완전하더라도 살아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아킬레우스가 자기 존엄을 위해 공동체와 충돌한다면 오디세우스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기 감정을 억제하며, 아킬레우스에게 타협이 자기배신일 수 있다면 오디세우스에게 타협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오늘날의 정치심리에도 남아 있습니다. 리버럴은 개인의 진정성과 인정, 해방과 자기표현을 중시하며, 감정을 억압하는 질서와 관습을 의심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권위에 저항합니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정치적 정당성의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성보다 행동의 결과와 책임, 공동체의 지속성을 먼저 봅니다.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 감정이 진실하기 때문에 나는 행동한다.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 감정이 진실하더라도 그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후대 보수주의자가 계승한 덕목
오디세우스는 보수주의라는 말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덕목은 훗날 보수주의자들이 반복해서 강조하게 됩니다. 감정보다 자기통제, 명예의 확대보다 책임의 완수, 무한한 정복보다 귀환과 복구, 추상적 이상보다 구체적인 공동체, 정면충돌보다 신중한 판단, 인간의 완전성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후대의 보수주의자들이 전통과 관습, 경험과 점진적 변화를 중시한 것도 같은 인간관에서 나옵니다. 인간은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만큼 현명하지 않고, 사회는 한 사람의 이론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며, 바꿀 때도 실제 결과를 살피면서 조금씩 고쳐야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재편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번 상황을 관찰하고, 가능한 선택을 비교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합니다. 그의 지혜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확신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복잡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옵니다.
오디세이에 대한 오해: 칼립소와 보낸 7년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에서 7년을 보냈다는 사실은 흔히 그의 약점이나 페넬로페에 대한 배신으로 설명됩니다. 아름다운 여신과 오랫동안 연인으로 지냈으니 귀환과 책임의 영웅이라는 해석은 위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립소의 7년은 오디세우스가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감정과 욕망에 붙잡힐 수 있으며,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그 감정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칼립소의 섬에는 전쟁도, 가난도, 늙음도 없습니다. 칼립소는 페넬로페보다 아름다운 불멸의 여신이며, 오디세우스에게 영원한 젊음과 불멸까지 제안합니다. 반면 이타카로 돌아가면 늙고 죽어야 하며, 아내가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지, 아들이 살아 있는지, 왕국을 되찾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감각과 감정만을 따른다면 칼립소의 섬에 남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성욕은 인간의 판단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오래된 생물학적 동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유혹을 받지 않는 자리에서는 사랑과 의무를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원하는 아름다운 불멸의 존재가 있고, 그 곁에 머무르면 쾌락과 안전, 영원한 젊음까지 얻을 수 있으며, 떠나면 고통과 노화와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같은 말을 지킬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실제로 그런 선택 앞에 선다면 많은 사람은 이타카가 아니라 칼립소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특별히 타락해서가 아니라 칼립소의 제안이 인간의 가장 강한 욕망을 거의 모두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성적 매력뿐 아니라 죽지 않고 싶다는 욕망,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욕망, 자신을 원해주는 존재에게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한꺼번에 작동합니다.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선택을 평범한 정절로 설명하면 오히려 그 선택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립소는 단순히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한 여성이 아닙니다. 그녀는 인간 안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감정과 욕망이 신화적 형상을 얻은 존재입니다. 성욕과 쾌락,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 늙고 죽는 것에 대한 공포,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싶은 마음이 칼립소 한 사람 안에 모여 있습니다. 그녀가 내미는 것은 잠깐의 외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할 법한 완결된 욕망의 세계입니다.
반대로 페넬로페와 이타카는 불완전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그곳에는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너진 집과 정치적 책임이 있으며, 오래 떨어져 지낸 가족과 다시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디세우스가 마주한 것은 두 여성 가운데 누가 더 매력적인가라는 선택이 아닙니다. 감정과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삶과,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삶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페넬로페가 외모와 신체에서는 불멸의 여신과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매일 이타카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눈앞의 매력과 쾌락이 실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삶 전체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7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순결한 영웅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영웅상이었다면 그가 매우 독단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는 칼립소와 관계를 맺었고, 그 세계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한때 어떤 감정에 빠졌다는 사실과 그 감정을 자신의 영원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지혜는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판단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감정은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지만, 이성은 그 욕망을 따랐을 때 결국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묻습니다.
칼립소의 섬에 남으면 오디세우스는 젊음과 쾌락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버지, 이타카의 왕으로서 자신이 맺었던 관계와 책임은 잃습니다. 그는 더 아름답고 안전한 삶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불완전한 삶을 선택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되는 대신 필멸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칼립소와 보낸 7년은 오디세우스가 약한 인간이었다는 증거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정과 욕망 속에 실제로 들어가 본 사람이 그것을 삶의 전부로 착각하지 않고 빠져나온 이야기입니다.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통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강점은 유혹이 없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과 자기 삶의 목적을 끝내 구분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의 차이를 다시 보여줍니다. 아킬레우스는 감정의 진실성을 행동의 근거로 삼지만, 오디세우스는 감정이 아무리 강하고 진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판단은 감정을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욕망의 결과와 오래된 책임을 함께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두 영웅은 지금도 살아 있다
정치사상은 인간심리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존엄을 지키려는 욕망도 인간에게 필요하며,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고 억압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만든 것은 아킬레우스적인 심리였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정당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기다리고, 타협하고, 우회하고,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줄 아는 사람도 필요하며, 그것이 오디세우스적인 심리입니다.
아킬레우스가 없다면 사회는 부당한 질서를 참기만 할 것이고, 오디세우스가 없다면 사회는 모든 모욕과 분노를 전쟁으로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두 영웅 가운데 누가 보수주의의 인간형에 더 가까운지는 분명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는 감정을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언제든 자신을 망칠 수 있음을 알고 그 명령을 곧바로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고,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싸울 필요가 있을 때만 싸우는 사람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자신에게 맡겨진 세계를 지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최초의 보수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후대 보수주의자들이 계승한 절제, 책임, 신중함, 현실주의, 귀환과 복구의 덕목을 가장 오래전에 구현한 영웅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세계와 싸웠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절제했습니다.
참고문헌
- Homer, Odyssey, Book 5, Perseus Digital Library.
- Homer, Odyssey, Book 17, Perseus Digital Library.
- Universal Pictures, 《The Odyssey》 공식 예고편, 2026.
- Republic of Korea, “The Odyssey Press Conference at Seoul”,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2026.
- Matt Blake, “How Argos Becomes the Heart of Christopher Nolan’s The Odyssey”, Esquire, 2026.
- Brian Hare et al., “The Domestication of Social Cognition in Dogs”, Science 298(5598), 2002, 1634–1636.
- Emily E. Bray et al., “Cooperative Communication with Humans Evolved to Emerge Early in Domestic Dogs”, Current Biology 31(14), 2021, 3137–3144.e11.
- Sarah Marshall-Pescini et al., “Comparing Wolves and Dogs: Current Status and Implications for Human ‘Self-Domestication’”,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26(4), 2022, 337–349.
- Anders Bergström et al., “Grey Wolf Genomic History Reveals a Dual Ancestry of Dogs”, Nature 607, 2022, 313–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