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사회공학은 왜 위험한가: 경험주의를 잃은 지식인의 오만


사회공학은 때로 필요하지만, 경험주의의 통제를 잃으면 인간 개조의 권력이 됩니다. 루소의 인간관, 공산주의, 유럽 스탈린주의 지식인들의 사례를 통해 규범주의가 왜 위험해질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사회공학은 왜 위험한가: 경험주의를 잃은 지식인의 오만

사회공학은 무지한 대중의 충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회공학은 대개 교육받은 지식인, 혁명가, 관료, 정책 설계자들이 세상을 너무 쉽게 이해했다고 믿을 때 시작됩니다.

그들은 사회를 하나의 복잡한 생명체로 보지 않습니다. 설계 가능한 기계로 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전통, 가족, 종교, 본능, 습관, 지역사회, 두려움, 명예심, 경쟁심 속에서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회공학자는 이 인간을 몇 개의 추상 개념으로 환원합니다.

계급. 억압. 불평등. 제도. 환경. 교육. 구조.

이런 개념들은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현실 전체를 설명한다고 믿는 순간 위험이 시작됩니다. 현실의 인간은 사라지고, 이론 속 인간만 남기 때문입니다.

사회공학의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가 세상을 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인간은 교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뀝니다.

사회공학은 모두 나쁜가

물론 사회공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도로를 놓고, 학교를 만들고, 전염병에 대응하고, 범죄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만들며,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도시계획, 공중보건, 교통정책, 의무교육, 식품안전, 상하수도 관리도 모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공학입니다.

문제는 사회공학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규모에서, 어떤 태도로, 어떤 검증 절차를 거쳐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작은 사회공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에서 시행되고, 결과를 관찰하며, 실패하면 수정할 수 있는 정책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합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위생 규칙,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신호체계, 아동 문해율을 높이기 위한 기초교육, 식중독을 막기 위한 식품위생 기준은 모두 현실적 필요에서 나온 개입입니다.

이런 개입은 인간 전체를 새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를 단번에 재설계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삼고, 경험적 결과에 의해 수정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위험한 사회공학과 다릅니다.

위험한 사회공학은 제한된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간 개조를 목표로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빈곤을 줄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적 소유와 가족과 종교와 시장을 모두 재구성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작은 개입은 현실을 관찰합니다. 거대한 사회공학은 현실을 심판합니다.

작은 개입은 실패하면 고칩니다. 거대한 사회공학은 실패하면 더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작은 개입은 인간의 실제 행동을 전제로 합니다. 거대한 사회공학은 인간이 이론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사회공학의 전면 부정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사회공학의 겸손입니다. 정책은 있어야 합니다. 개혁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있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관찰 위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이해했다는 믿음

사회공학은 대개 사회를 더 좋게 만들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빈곤을 없애고, 불평등을 줄이고, 차별을 없애고, 더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겠다는 말은 듣기에 좋습니다. 문제는 개선의 의지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회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다는 확신입니다.

현실의 사회는 한 사람의 머릿속 설계도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가족 제도, 시장, 관습, 종교, 지역 공동체, 직업 윤리, 언어, 도덕 감정, 두려움, 신뢰, 명예, 질투, 소속감 같은 요소들이 오랜 시간 얽혀 만들어진 질서입니다. 우리는 그 질서의 모든 기능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회공학자는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망가뜨리는 원인을 발견했다고 믿고, 그 원인만 제거하면 더 나은 인간과 더 나은 사회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은 매력적입니다. 세상이 복잡하다는 말보다, 세상은 몇 가지 구조적 원인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말이 훨씬 명쾌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명쾌함이 위험합니다.

세상은 명쾌한 이론보다 복잡합니다. 인간은 추상적 규범보다 오래된 존재입니다.

루소의 유혹: 인간은 선하고 사회가 타락시켰다는 생각

사회공학의 중요한 철학적 배경에는 장자크 루소가 있습니다. 루소를 단순히 공산주의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그러나 루소 이후 근대 정치에는 매우 강력한 상상력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매력적입니다. 인간의 악을 인간 내부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 구조의 문제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쁘다는 설명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그 위로 속에는 위험한 결론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 때문에 타락했다면, 사회를 새로 만들면 인간도 새로 만들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이 사회공학의 출발점입니다. 현실의 인간을 관찰하기보다, 이상적인 인간을 먼저 상상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인간이 그 이상에 맞지 않으면 인간을 고치려 합니다.

여기서 개혁은 쉽게 교정으로 바뀝니다. 교육은 쉽게 재교육이 됩니다. 정치권력은 쉽게 인간 개조의 도구가 됩니다.

루소가 곧바로 스탈린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루소 이후 근대 정치에는 인간을 사회의 산물로 보고, 사회를 새로 설계하면 인간도 새로 만들 수 있다는 위험한 상상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 상상력이 국가권력, 혁명 이론, 일당 독재와 결합했을 때 가장 잔혹한 형태가 공산주의에서 나타났습니다.

규범주의는 왜 경험주의보다 위험해질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결국 규범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규범주의는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에서 출발합니다. 경험주의는 “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규범은 필요합니다. 자유, 정의, 평등, 인간 존엄 같은 규범이 없다면 사회는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나 규범이 경험에 의해 교정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경험주의자는 현실이 자기 생각과 다르면 생각을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규범주의자는 현실이 자기 규범과 다르면 현실을 고치려 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정치에서는 치명적인 차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차이는 억압의 결과일 것이다. 억압을 제거하면 차이는 사라질 것이다. 차이가 계속 남아 있다면 아직 숨은 억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반증되기 어렵습니다. 현실에서 반례가 나와도 이론이 틀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이 아직 충분히 개조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때부터 현실의 인간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교정 대상이 됩니다.

위험한 것은 규범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위험한 것은 경험주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규범주의입니다. 경험에 의해 교정되지 않는 규범은 도덕이 아니라 권력이 됩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공학이 국가권력을 얻은 최악의 사례입니다

사회공학의 최악의 사례는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 전체를 새로 만들겠다는 거대한 규범 체계였습니다.

계급 없는 사회. 착취 없는 노동. 사적 소유 없는 평등. 새로운 인간.

이 말들은 규범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가족을 우선시하고, 소유하려 하고, 자기 노동의 대가를 구분하려 하며, 위험을 피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자기 집단을 보호하려 합니다.

경험주의자라면 여기서 제도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에게 맞는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규범주의는 반대로 갔습니다. 인간이 이상에 맞지 않으면 인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농민이 토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농민을 개조해야 했습니다. 신앙인이 종교를 버리지 않으면 종교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가족이 국가보다 강하면 가족을 약화시켜야 했습니다. 시장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면 시장을 통제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인간 해방이 아니라 강제수용소, 숙청, 감시, 기근, 공포정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사회공학의 최악의 사례인 이유는 단지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죽음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용”으로 설명했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스탈린주의 지식인들은 왜 현실을 보지 못했는가

공산주의의 비극을 말할 때 더 중요한 문제는 유럽의 스탈린주의 지식인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층위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 앙리 바르뷔스,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로맹 롤랑, 라이언 포이히트방거처럼 소련을 새로운 문명 실험으로 보거나 스탈린 체제에 우호적이었던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처럼 한때 소련에 매혹되었다가 1936년 소련 방문 뒤 환멸을 느끼고 비판자로 돌아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서 퀘슬러, 이냐치오 실로네, 루이 피셔, 스티븐 스펜더, 리처드 라이트 역시 한때 공산주의에 끌렸으나 나중에 결별한 대표적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같은 의미의 스탈린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산당원이었고,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자였으며, 어떤 사람은 정식 당원은 아니지만 소련에 동조한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들에게 소련은 한동안 단순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미래의 증거였습니다.

자본주의는 낡은 세계였습니다. 파시즘은 야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련은 많은 유럽 좌파 지식인에게 역사의 올바른 편처럼 보였습니다. 소련이 무너지면 단순히 한 나라에 대한 평가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관, 인간관, 도덕적 자부심이 함께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실패한 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한때 공산주의에 매혹되었던 지식인들이 왜 그 믿음에서 이탈했는지를 기록한 증언집입니다. 참여자는 루이 피셔, 앙드레 지드, 아서 퀘슬러, 이냐치오 실로네, 스티븐 스펜더, 리처드 라이트였습니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단순한 정책 노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을 잃은 시대의 대체 신앙이었습니다. 역사의 방향을 알고 있다는 믿음,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믿음, 현재의 희생이 미래의 구원을 낳는다는 믿음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현실이 드러났을 때도 많은 지식인은 곧바로 믿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스탈린 개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믿어온 역사철학,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나는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자기 이해였습니다.

스탈린주의자는 소련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보면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기근은 정책 실패가 아니라 전환기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숙청은 권력범죄가 아니라 반혁명 세력의 제거가 되었습니다. 강제수용소는 억압이 아니라 새 인간을 위한 교정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고통은 계급의 언어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비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오만이 가장 위험한 지점입니다. 대중의 오류는 산발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의 오류는 체계가 됩니다. 대중의 분노는 폭동으로 끝날 수 있지만, 지식인의 확신은 법률, 교육, 선전, 경찰, 수용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공학은 무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세상을 너무 잘 안다고 믿은 지식인의 산물입니다.

지식인은 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가

사회공학자가 실패를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실패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지성의 실패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전체가 틀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회공학자는 실패 앞에서 대개 세 가지 방식으로 도망칩니다.

첫째, 아직 충분히 개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둘째, 방해 세력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셋째, 희생은 불가피한 전환 비용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방식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농업 집단화가 참상을 낳으면 부농의 방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가 실패하면 사보타주와 반동을 찾았습니다. 숙청이 벌어지면 혁명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론이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심판하는 법정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경험은 사라집니다. 통계도, 굶주림도, 죽음도, 증언도 이론을 이기지 못합니다. 규범주의가 경험주의를 완전히 압도한 상태입니다.

버크와 하이에크가 말한 인식론적 겸손

이 지점에서 보수주의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보수주의는 단순히 과거를 좋아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과 사회를 쉽게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겸손입니다.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기존 제도가 완벽하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사회 전체를 한 번에 이해하고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오만을 경계했습니다. 오래된 관습과 제도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기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이에크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의 질서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설계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개인의 부분적 지식, 경험, 가격 신호, 관습, 시행착오가 얽혀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입니다.

사회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부품이 아닙니다. 제도는 설계도대로 조립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좋은 개혁은 확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현실을 두려워하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사회를 바꾸려면 먼저 인간을 관찰해야 합니다

사회공학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인간을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이론 속 인간을 사랑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 인간, 개조된 인간, 규범에 맞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의 인간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이기적이지만 협력할 수 있는 인간. 가족을 우선하지만 공동체도 만들 수 있는 인간. 자유를 원하지만 안전도 원하는 인간. 평등을 말하지만 지위도 추구하는 인간. 선한 충동과 공격적 본능을 동시에 가진 인간.

이 복잡한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 개혁은 실패합니다. 더 나아가 권력을 얻으면 폭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인간은 언제나 이론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회공학자는 이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처벌합니다.

좋은 정책은 인간을 바꾸려 하기 전에 인간을 관찰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떤 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무엇인지 봅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고칩니다. 이 태도가 경험주의입니다.

결론: 경험주의 없는 규범주의는 인간을 파괴합니다

사회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사회공학은 필요합니다. 공중보건, 교육, 치안, 도시계획, 교통정책, 식품안전처럼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개입은 문명사회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사회를 한 사람의 이론에 맞게 재창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정책은 작은 문제에서 출발하고, 경험으로 검증되며, 실패하면 수정됩니다. 반대로 위험한 사회공학은 인간 전체를 새로 만들려 하고, 실패할수록 더 강한 권력을 요구합니다.

규범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규범이 경험을 이기기 시작하면 위험해집니다.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앞서고, 제도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보다 제도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가 앞서면, 사회는 실험실이 됩니다.

공산주의는 그 실험실이 국가가 되었을 때 벌어진 최악의 사례였습니다. 유럽의 스탈린주의 지식인들은 그 비극을 보면서도 오랫동안 부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소련은 현실의 국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규범이 실현된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현실을 고치려는 자가 누구인가입니다. 권력을 쥔 규범주의자에게 현실은 고쳐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경험주의자에게 현실은 자신의 생각을 고쳐야 할 스승입니다. 사회공학의 위험은 바로 이 겸손의 실종에서 시작됩니다.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합니다. 인간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오래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먼저 세상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이해한 지식인이 가장 위험합니다. 그가 권력을 얻으면, 인간은 더 이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설계의 재료가 됩니다.

참고문헌

Crossman, Richard, ed. The God That Failed. New York: Harper & Brothers, 1949. Gide, André. Retour de l’U.R.S.S. Paris: Gallimard, 1936. Hayek, F. A.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American Economic Review 35, no. 4 (1945): 519–530. Burke, Edmund.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London: J. Dodsley, 1790. Rousseau, Jean-Jacques. 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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