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
동물보호론의 가장 약한 지점은 포식의 문제입니다. 동물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매우 선해 보입니다. 도살장의 고통, 실험동물의 고통, 공장식 축산의 고통을 말할 때 사람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자연으로 가져가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까. 늑대가 엘크를 사냥하는 것은 폭력이 아닙니까. 들개가 살아 있는 동물의 내장을 뜯어 먹는 장면은 도살장의 고통보다 덜 잔혹합니까.
최훈의 논문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이 논문은 포식의 문제가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자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다고 설명합니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육식과 동물실험을 금지해야 한다면, 포식동물이 피식동물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서 자연의 고통을 줄이는 것도 일관된 결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논문은 동물 해방론과 동물 권리론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자연에 개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물보호론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포식의 고통을 방치하면 일관성이 무너집니다. 반대로 포식을 막으려 하면 자연 전체를 인간이 관리해야 합니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은 자비로운 세상이 아니라, 자연을 완전히 폐지한 세상입니다.
바넘의 보아뱀은 무엇을 먹어야 했는가
이 문제는 최근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미국 동물보호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ASPCA 창립자 헨리 버그Henry Bergh도 같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P. T. 바넘의 박물관에서 보아뱀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주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여기서 바넘은 영화 《위대한 쇼맨》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바로 그 인물입니다. 《위대한 쇼맨》은 휴 잭맨이 P. T. 바넘을 연기한 뮤지컬 영화입니다.
바넘의 보아뱀 사건은 동물보호론의 오래된 난점을 보여줍니다. 토끼나 새가 뱀에게 산 채로 먹히는 것은 잔혹해 보입니다. 그러나 뱀은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뱀에게 살아 있는 먹이를 주지 말라는 주장은 먹이동물의 고통을 줄이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뱀의 생리와 행동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포식자의 본성은 보호받아야 할 자연이 아니라, 교정해야 할 폭력처럼 취급됩니다.
바넘은 이 논쟁에서 하버드의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에게서 뱀은 살아 있는 먹이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편지를 받아 헨리 버그에게 맞섰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구경거리 논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동물보호가 피식동물의 고통에 민감해질 때, 포식동물의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오래된 문제였습니다.
토끼의 고통만 보면 뱀은 잔혹한 가해자가 됩니다. 그러나 뱀의 생존까지 보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포식을 금지하는 윤리는 결국 피식동물의 고통을 줄인다는 이유로 포식동물의 삶을 부정하게 됩니다.
기린 마리우스는 왜 사자 먹이가 되었나
덴마크 코펜하겐 동물원의 기린 마리우스 사건도 같은 문제를 보여줍니다. 마리우스는 건강한 어린 기린이었지만, 동물원은 유전적 다양성 관리와 번식 프로그램의 이유로 그를 죽였습니다. 이후 사체를 공개 해부했고, 일부는 사자에게 먹였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 항의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기린을 죽이고, 그것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해부하고, 다시 사자에게 먹인 장면은 현대인의 감수성에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질문도 던집니다. 동물원은 포식동물을 무엇으로 먹여야 합니까.
사자는 포식자입니다. 사자에게 고기를 먹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익명의 도축장에서 온 쇠고기일 때는 괜찮고, 이름 붙은 기린 마리우스일 때는 참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현대 동물윤리의 불편한 감수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포식동물의 존재를 원하지만, 포식동물의 식사를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고기는 필요하지만, 죽음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사자는 보고 싶지만, 사자의 식사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덴마크의 올보르 동물원도 비슷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올보르 동물원은 기니피그, 토끼, 닭 같은 작은 동물과 말을 기부받아 포식동물 먹이로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동물원 측은 이것이 자연 먹이사슬을 모방하고, 포식동물의 자연 행동과 영양,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불편합니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포식동물을 기른다면, 누군가는 먹이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죽음을 볼 것인가, 감출 것인가입니다.
포식자는 가해자이고 초식동물은 피해자인가
동물보호론자들은 자연을 도덕극처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자는 가해자이고, 얼룩말은 피해자입니다. 늑대는 폭력이고, 엘크는 희생자입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 들어가 고통을 줄여야 하는 도덕적 관리자처럼 등장합니다.
그러나 생태계는 법정이 아닙니다. 자연에는 피고와 피해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이사슬, 번식률, 굶주림, 질병, 식생, 물, 토양, 경쟁, 도피 행동이 얽혀 있습니다. 포식은 잔혹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생태계의 조절 장치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많은 초식동물은 잡아먹혀 죽습니다. 반대로 많은 포식동물은 굶어 죽습니다. 초식동물에게 가장 큰 공포가 포식이라면, 포식동물에게 가장 큰 공포는 실패한 사냥입니다. 사자는 매일 사냥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늑대도, 치타도, 표범도 실패를 반복합니다. 포식자는 자연의 폭군이 아니라 굶주림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동물입니다.
초식동물은 잡아먹히지 않으면 번식합니다. 너무 많이 번식하면 식생을 고갈시킵니다. 식생이 무너지면 더 많은 초식동물이 굶어 죽습니다. 포식동물은 잡아먹지 못하면 굶어 죽습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이 비극적인 균형을 한쪽의 고통만 보고 제거하려 하면, 자연은 더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정해집니다.
최훈의 논문도 바로 이 위험을 인정합니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자의 사냥을 방해하면 사자는 굶어 죽을 수 있고, 포식자가 없어진 사슴은 과잉 개체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슴의 먹이가 되는 식물이 고갈되고, 그 식물에 의존하는 다른 초식동물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황소개구리를 줄인 것은 동물윤리가 아니라 포식이었습니다
최훈의 논문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황소개구리 사례입니다. 논문은 황소개구리와 큰입배스 같은 외래종이 처음에는 생태계를 교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태계가 회복력을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황소개구리는 새로운 먹잇감에 익숙하지 않던 뱀, 너구리, 족제비 같은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었고, 알이나 올챙이는 오리와 왜가리에게 먹히면서 감소했다고 말합니다.
논문은 이 사례를 “인간이 자연에 개입해도 생태계가 반드시 재앙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정반대로 읽힐 수 있습니다. 황소개구리 사태를 완화한 것은 자연에 대한 윤리적 행정이 아니었습니다. 황소개구리를 잡아먹은 포식자들이었습니다.
황소개구리에게 권리를 부여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황소개구리의 고통을 줄여서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황소개구리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었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 충격을 일부 흡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는 오히려 포식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포식은 생태계의 잔혹성이지만, 동시에 생태계의 회복 장치입니다. 포식을 고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하려는 생각은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발상입니다.
옐로스톤 늑대가 보여준 것
옐로스톤의 늑대 복원은 이 문제를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1995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회색늑대가 재도입되었습니다. 늑대가 사라진 뒤 엘크의 개체수와 섭식 압력이 커졌고, 버드나무와 사시나무 같은 하천변 식생이 회복되기 어려웠습니다. 늑대가 돌아온 뒤 엘크 개체수와 행동이 변했고, 일부 지역에서 목본식물의 회복이 관찰되었습니다. 다만 국립공원관리청은 이것을 “늑대 하나가 모든 것을 고쳤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보아서는 안 되며, 엘크의 수 감소, 늑대 활동에 대한 엘크의 행동 변화, 물 조건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 복잡한 영양 cascade로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늑대는 잔혹한 포식자입니다. 엘크의 입장에서 늑대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진 생태계는 더 평화로운 낙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식동물의 압력이 커지고, 식생이 약해지고, 하천 주변 생태계가 변했습니다. 포식은 개별 동물에게는 고통이지만, 생태계 전체에는 질서입니다. 자연은 고통을 제거한다고 자동으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관계 자체가 생태계의 구조를 유지합니다.
사자를 중성화하면 다음은 얼룩말입니다
동물의 고통만을 기준으로 자연을 개조하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사자를 문제 삼을 것입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으니 사자의 번식을 막자고 할 수 있습니다. 포식자를 줄이면 피식동물의 고통이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자를 줄이면 다음 문제가 나타납니다. 얼룩말, 누, 영양, 버팔로 같은 초식동물이 늘어납니다. 초식동물이 늘어나면 초원이 줄어듭니다. 어린나무와 풀은 회복되지 못합니다. 물가의 식생이 무너지면 초식동물은 포식으로 죽지 않는 대신 기아와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제 동물보호론자는 선택해야 합니다. 포식을 막겠다는 논리를 유지하려면, 사자만 중성화해서는 안 됩니다. 거의 모든 대형 초식동물도 포획해 중성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초식동물이 과잉 번식하지 않고, 초원이 완전히 훼손되지 않으며, 기아로 인한 대량 폐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습니다.
결국 포식 금지는 사자 보호가 아닙니다. 얼룩말 보호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 전체를 불임 관리 체계로 바꾸는 일입니다. 사자를 중성화한 사람은 다음날 얼룩말을 중성화해야 합니다. 그다음 날에는 누와 영양과 버팔로를 중성화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초원을 관리해야 하고, 물을 관리해야 하고, 질병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 순간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닙니다. 거대한 동물원입니다.
그 비용이면 인간의 기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비용의 문제가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포식을 막겠다고 사자를 중성화하는 일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야생 사자를 추적하고, 포획하고, 마취하고, 수술하고, 회복시키고, 다시 방사하고, 부작용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자가 줄어든 뒤에는 초식동물의 번식을 통제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대형 초식동물을 잡아서 중성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사업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보호가 아닙니다. 대륙 규모의 생태계 행정입니다. 그 비용과 인력과 장비와 조직을 생각하면, 인간의 기아를 줄이는 일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이고 더 비쌀 가능성이 큽니다.
인간의 기아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는 세계가 아프리카의 포식자와 초식동물 전체를 불임 관리하겠다는 것은 윤리적 민감성이 아니라 윤리적 오만입니다. 고통을 줄이겠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고통이 어디에서 생기고 무엇을 유지하는지 보지 못하면 윤리는 현실을 파괴하는 명령이 됩니다.
비용의 문제는 단지 현실성의 문제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포식을 금지하려는 윤리는 결국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개를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있는가
여기서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길 속에서 한 사람의 아이와 한 마리의 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둘을 모두 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개가 자기 가족처럼 아끼던 반려견이고, 아이는 전혀 모르는 남의 아이라면 누구를 구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쉽지 않습니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개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애착은 추상적 윤리보다 훨씬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망설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자기 개를 선택한 사람과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개의 생명이 아무 가치도 없어서도 아닙니다. 인간 공동체는 최소한의 전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제는 사람의 생명은 특별한 우선순위를 가진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우리는 서로를 안전하게 맡길 수 없습니다.
동물권론은 종차별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차별이 악이라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우선하는 것은 단순한 편견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상호 보증입니다. 나는 당신이 낯선 사람이어도, 적어도 개보다 먼저 나를 사람으로 보아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같은 믿음을 기대합니다. 이 믿음 위에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이 대목은 포식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암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으려는 상황과 암사자가 사람의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논문에서도 코헨의 사고실험을 소개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상황에는 개입할 의무를 느끼지 않지만, 암사자가 사람의 아이를 잡아먹으려 한다면 재빨리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동물의 고통을 줄이자는 말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사람의 생명과 반려동물의 생명을 취향의 문제처럼 비교하기 시작하면 윤리는 더 고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해집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에 대한 기본 신뢰를 무너뜨리는 순간,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도덕 감각의 혼란입니다.
카트리나가 보여준 불편한 현실
사람과 개를 같은 저울에 올려놓는 문제는 단순한 철학적 사고실험이 아닙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이 문제는 실제 재난 현장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카트리나 당시 많은 구조 수단과 대피소는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구조 보트, 헬리콥터, 대피 버스에 사람은 탈 수 있었지만 개와 고양이는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반려동물이 집에 남겨졌고, 많은 사람은 반려동물을 두고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호자에게 개와 고양이는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난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정서적 연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두고 구조받기를 거부하거나, 대피를 망설였습니다. 개를 버리고 살 것인가, 개와 함께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은 구조 현장에서 실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구조는 더 느리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만 데리고 나오면 되는 상황과 사람과 개를 함께 데리고 나와야 하는 상황은 다릅니다. 개를 찾고, 붙잡고, 이동시키고, 임시로 보호하고, 다시 보호자와 연결해야 합니다. 구조대 입장에서는 시간과 공간과 인력이 더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서 불편한 분노가 생겼습니다. 카트리나의 뉴올리언스에서는 가난한 흑인 주민들이 구조와 구호에서 방치되었다는 감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자신들은 늦게 구조되고, 도움은 충분히 오지 않고, 도시의 빈곤층은 버려졌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려동물 구조에 시간과 자원이 쓰이는 장면은 일부 흑인 주민과 비판자들에게 “사람보다 개가 먼저인가”라는 분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이 항의는 단순한 동물 혐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재난 구조의 우선순위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사람도 제때 구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와 고양이를 구조하느라 시간이 더 걸린다면, 그것은 당연히 분노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분노가 인종과 계급의 불신 위에 놓였을 때, 반려동물 구조는 쉽게 “백인의 개는 구조하면서 흑인의 생명은 늦게 구하는가”라는 정치적 언어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개를 구조하지 말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반려동물을 재난계획에서 제외하면 사람 구조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동물을 두고 떠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구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구조대는 더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과 동물을 함께 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결론은 분명합니다. 재난 현장에서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원칙은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제대로 구하려면, 그 사람이 끝까지 놓지 못하는 동물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개를 사람보다 앞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개를 완전히 배제하면 사람 구조도 늦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카트리나 이후 미국이 반려동물을 재난대피 계획에 포함하도록 제도를 바꾼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물권의 승리라기보다 재난관리의 현실주의입니다. 사람과 개 중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라는 비극적 선택을 현장에 떠넘기지 않기 위해, 평소에 사람과 개가 함께 구조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반려동물 동반 대피소, 이동용 케이지, 예방접종 기록, 임시 보호소, 보호자와 동물을 다시 연결하는 등록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것은 모든 책임을 구조대와 국가에 떠넘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려동물 보호자도 최소한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재난이 닥친 뒤 개를 찾아 집 안을 헤매거나, 목줄도 이동장도 없이 구조를 기다리면 사람과 동물 모두 위험해집니다. 구조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개를 자기 옆에 두고,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조대가 사람과 개를 함께,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우선한다는 말은 동물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인간이 사랑하는 동물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한다는 말 역시 책임을 포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물을 재난 현장의 혼란 속에 방치하지 않도록, 보호자는 평소부터 함께 대피할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말의 위험
동물보호론의 문제는 동물을 사랑한다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줄이고 싶다는 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감정이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연을 교정하려 들 때 생깁니다.
자연은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단순히 악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생태계입니다. 포식, 굶주림, 번식, 질병, 경쟁, 회복이 얽힌 복잡한 질서입니다.
동물의 고통만을 기준으로 자연을 재설계하려는 윤리는 결국 자연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행정 대상으로 바꿉니다. 사자를 풀 먹는 동물로 만들고, 늑대를 콩 단백질 먹이 앞에 세우고, 얼룩말과 영양을 중성화하고, 초원을 관리하고, 질병을 통제하고, 번식을 허가하는 세계를 만들게 됩니다.
그것은 동물 해방이 아닙니다. 자연의 관료화입니다.
포식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은 잔혹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잔혹한 장면을 제거한다고 선해지지 않습니다. 포식은 생태계의 폭력이면서 동시에 생태계의 질서입니다.
포식을 금지하려는 윤리는 사자를 구하는 윤리가 아닙니다. 사자도 얼룩말도 인간 행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윤리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연이 없습니다. 인간이 설계한 거대한 사육장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