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누가 정의를 구현하는가: 바오로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칼 라너와 정의구현사제단까지


예루살렘 공의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의 가톨릭 역사,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신학, 그리고 한국 정의구현사제단과 해방신학을 통해 도덕적 확신과 사회공학의 경계를 성찰합니다.

누가 정의를 구현하는가: 바오로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칼 라너와 정의구현사제단까지

예루살렘 회의: 최초의 공의회와 가톨릭 공의회 역사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변하지 않는 교리를 그대로 반복해 온 역사만은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무엇이 신앙의 본질이고 무엇이 시대적 형식인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 최초의 위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오로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활동과 선교는 일차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향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이방인들과의 단편적인 조우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분의 공생활 무대는 명백히 유대인 사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바오로는 그런 모습의 그리스도교를 세계 종교로 확장한 위대한 사도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부 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그는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 율법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는 겉으로는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할 것인지를 논의한 회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더 험악한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정통인가, 아니면 이단적인 변형인가?

이 질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칼 라너, 한스 큉을 이해하는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또한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이 왜 이들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지 설명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복음은 정통인가 이단인가

바오로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주장이었습니다. 할례는 단순한 민족 풍습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표지였고,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과 다른 민족을 구분하는 질서였습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일부 사람들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들과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회의는 단순히 선교 방법을 조정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의 복음과 같은지, 그가 신앙의 본질을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가리는 자리였습니다.

회의는 결국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 율법 전체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교회가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 보편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 결정을 보편 교회의 탄생에 관한 근본적 문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단순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옳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규칙을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신앙의 본질이라면,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민족적 표지를 먼저 요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의 변화는 전통을 싫어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통의 중심을 더 철저하게 사유한 결과였습니다.

그 후의 공의회들은 주로 전통과 이단의 경계를 확정했습니다. 고대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기준을 세웠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대응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확정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던진 현대 사회와 구원의 질문

1962년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고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마무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단을 단죄하는 대신, 현대 사회와 다른 종교, 종교의 자유, 평신도의 역할과 전례를 새로운 현실 속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핵심 교리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제도를 조정하고 교회의 사명을 확장하려 한 것입니다.

초기 교회가 “이방인은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인간은 단지 오류와 구원 밖에 있는 존재인가?

공의회는 다른 종교 안에도 진실하고 거룩한 요소가 있으며, 종교적 진리는 강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양심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같은 진리를 가르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 근원은 여전히 그리스도"라는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다른 길에도 진리와 구원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길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균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놓고 칼 라너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균형은 공의회 문헌에 구체화되었습니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로 불렀고, 「교회 헌장」 16항은 자신의 잘못 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이 명하는 선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은 다른 종교의 정신적·도덕적 자산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권고했으며, 인종·신분·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과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배척했습니다. 공의회 문헌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보편적 구원 가능성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과 깊은 사상적 궤를 같이합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신학과 전통의 보편성

칼 라너의 가장 유명한 개념인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양심에 따라 진리와 선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가톨릭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진보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라너는 불교나 이슬람교를 그리스도와 무관한 독립적 구원의 길로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그리스도인의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모든 종교을 동등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양심과 삶 안에서 은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예수회 사제로 평생 교회 안에 머문 라너는 현대철학으로 전통을 해체하기보다, 현대인이 가톨릭의 계시와 은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전통에 저항하려고 경계를 넓힌 사람이 아니라 "전통의 보편성을 믿었기 때문에 적용 범위를 넓힌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외피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심을 지키기 위해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구분은 종교 밖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종합사회조사(GSS)는 1970년대부터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추적해 왔습니다. 민주당 지지층이 먼저 빠르게 변했고 공화당 지지층은 훨씬 늦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양쪽 모두 관용적인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결론이 같은 사고방식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진보주의자는 평등과 해방으로, 보수주의자는 사생활 보호와 국가권력의 제한이라는 원리로 동성애자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라너의 신학적 결론이 개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결론에 이른 정신적 과정까지 리버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스 큉의 현대 신학과 보편윤리의 경계

라너와 함께 공의회를 이끈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이자, 교회의 중앙집권적 권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한스 큉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방성은 라너와 다른 성격을 보였습니다.

큉은 교황 무류성, 교회의 중앙집권적 구조, 피임 금지와 여러 제도적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교회의 권위도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의해 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라너가 전통 내부의 난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큉은 전통과 제도가 오늘날에도 정당한지를 물었습니다. 라너에게 현대철학은 신앙을 더 깊게 설명하는 도구였지만, 큉에게 현대의 이성과 양심은 교회가 심사를 받아야 할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문제의식을 가톨릭을 해체하려는 시도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큉에게 비판은 교회가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교정해야 복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개혁의 요구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가는 작지 않았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79년 큉이 교회의 무류성에 의문을 제기한 점 등을 들어 더 이상 가톨릭 신학자로서 가르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황청의 공식 문서는 교도권과 충돌하면서도 제도 내부의 문제를 끝까지 제기했던 그의 위치를 잘 보여 줍니다.

그의 후기 활동인 ‘세계윤리’ 운동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어느 종교가 더 참인지를 밝히기보다, 여러 종교가 공통으로 동의할 수 있는 윤리를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세계윤리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획은 종교의 차이를 지우는 단일 교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가치와 도덕적 기준을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종교 간 충돌이 현실인 세계에서 이것은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실천적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관용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일관성의 문제도 생깁니다.

가톨릭 신학자는 다른 종교의 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말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진리를 더 분명하고 충만하게 드러내는 길입니다.

세계윤리가 이런 고백을 대체하기 시작한다면 가톨릭은 진리의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우연히 속한 문화적 전통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 종교가 공유하는 최소 윤리를 찾는 일과, 각 종교가 무엇을 참이라고 고백하는지는 서로 다른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라너는 다른 사람을 가톨릭 구원론 안으로 넓게 포함시켰습니다. 반면 큉은 가톨릭의 제도적 권위를 비판하면서 종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윤리의 토대를 찾았습니다. 그 시도는 교회의 자기교정과 종교 간 평화에 기여했지만, 공통 윤리가 개별 종교의 진리 주장을 대신할 때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희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큉의 한계는 그를 단순한 상대주의자로 규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공동 윤리와 신앙의 고유한 진리가 실제로 끝까지 구분될 수 있는가"를 묻는 데서 드러납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해방신학: 정의를 '증언'하는가 '구현'하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젖힌 신학적 개방성은 세계 각지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만나며 급진적인 변화를 낳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극단적인 빈곤과 독재 속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입니다.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과 사명이 현지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결합하여, 단순한 신학적 성찰을 넘어 현실을 직접 뜯어고치려는 행동주의로 전환된 것입니다.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이러한 거대한 신학적 흐름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1974년 유신체제 아래에서 결성된 한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화와 인권, 사회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활동했습니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과 은폐를 폭로한 일은 한국 민주화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국가 권력이 저지른 살인과 은폐라는 명백한 악에 맞서 진실을 밝힌 사제들의 예언자적 사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사제단을 하나의 고정된 정치 집단으로만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결성 이후 반세기 동안 참여한 사제와 중점을 둔 의제는 달라졌고, 민주화운동 시기의 활동과 오늘날의 정책 개입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은 모든 구성원의 모든 활동이 아니라, 사제적 권위가 구체적인 정권과 정책에 대한 판단을 절대화하는 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단체의 이름에는 사유해 볼 만한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정의를 증언하는 사제단’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사제단"이라는 점입니다. ‘정의구현’이라는 표현에는 강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에 실현할 능동적 주체이자 책임자가 바로 우리다.

고문과 조작처럼 절대적이고 투명한 악 앞에서는 이러한 도덕적 확신이 정의로운 용기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경제정책, 노동, 국가 안보, 사법 제도 등 복잡한 이해관계와 위험 부담이 교차하는 정책적 대안의 영역은 다릅니다. 이 영역에서는 선의의 충돌이 빈번하며, 어느 한편이 정답을 오롯이 독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예언자와 사회공학자의 역할이 나뉩니다. 예언자는 권력의 선을 넘은 행위를 향해 "고문하지 말라", "약자를 짓밟지 말라"고 외치며 한계를 경고합니다(증언). 반면 사회공학자는 구체적인 사회 제도의 청사진을 쥐고 "이 정책이 곧 정의이며 저 정책은 불의다" 혹은 "이 정권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규정합니다(구현).

이 차이는 실제 정치적 언어에서 드러납니다. 사제단은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과 한일 정상회담 등을 비판하며 “검찰독재 타도와 매판매국 독재정권 퇴진촉구”를 내건 시국미사를 열었습니다. 사제단은 당시 배포한 입장에서 정권 퇴진을 요구할 때가 왔다고 밝혔습니다. 외교정책을 비판하거나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적 자유에 속합니다. 다만 그것을 미사와 사제직의 상징 안에서 선포할 때, 하나의 정치적 판단은 단순한 의견보다 더 높은 도덕적 권위를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증언과 구현의 경계"를 묻게 합니다.

사제가 현실 정치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있습니다. 바오로와 초기 교회가 그러했듯 불의한 관습에 도전하는 것도 종교인의 권리이자 의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 판단이나 정책적 견해를 하느님의 절대적 정의와 직접 연결하는 순간부터 왜곡이 시작됩니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시민이나 정책을 단순히 다른 입장을 가진 토론 상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가로막는 '불의한 세력'으로 매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사제직의 권위와 종교적 상징은 정치적 신념을 절대화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됩니다.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하느님의 절대적 정의와 동일시하는 순간, 사제단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보다 자신이 더 정의롭다고 여기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지만, 현실의 복잡성과 다른 시민의 양심은 그 정의를 방해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권력 투쟁이나 사회공학적 압박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회개와 내면적 성찰을 통해 실현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이 점에서 사제단의 일부 정치적 개입은 칼 라너의 태도와 뚜렷이 대비됩니다. 라너는 자신이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의 깊은 맥락을 오랫동안 사색한 끝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보편적 경계를 조심스레 넓혔습니다. 반면 정권 퇴진처럼 복잡한 정치적 결론을 종교적 의례와 결합할 때에는 사제단의 판단이 토론 가능한 시민의 의견이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한 판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교회의 권위 자체를 문제 삼았던 한스 큉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큉은 교황권을 비롯한 가톨릭 제도의 절대성에 비판적이었던 반면, 정의구현사제단은 세속의 국가 권력에는 강하게 저항하면서도 자신들이 지닌 사제적·도덕적 권위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을 단순히 교리적 자유주의자로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예언자적 전통과, 종교의 권위로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을 밀어붙이는 행동주의가 그 역사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후자가 자신의 판단 가능성과 한계를 잊는 순간, 사제단은 "종교적 사회공학자"로 변할 위험을 지닙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권력의 악을 폭로한 역사적 공로가 오늘날의 모든 정치적 판단까지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단의 판단 역시 시민사회의 반론과 현실의 검증 앞에 놓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 하느님의 뜻과 다를 가능성을 더 엄격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결론: 인본주의와 사회공학의 경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중심을 지키기 위해 할례와 율법의 민족적 경계를 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칼 라너도 가톨릭의 진리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교회 밖의 인간을 향해 그 경계를 넓혔습니다.

한스 큉은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교회와 전통을 현대인의 이성과 양심의 심판대에 올려놓았고, 후기에는 종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윤리를 모색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자기교정과 종교 간 평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공동 윤리가 각 종교의 고유한 진리 주장을 대신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남는 질문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다시 다른 단계에 있습니다. 이들은 교리를 해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실 정치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판정하고 그것을 구현하려 합니다. 독재에 맞설 때 그 확신은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정책에서도 자신의 판단을 하느님의 정의와 동일시한다면, 예언자적 증언은 사회공학적 압박으로 변합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느리더라도 경험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회공학은 자신이 정의와 역사의 방향을 이미 안다고 믿으며 사회를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론이 얼마나 진보적인가가 아닙니다.

그 결론은 오랜 묵상과 현실의 검증을 통해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옳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과 사회를 움직이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하느님의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신이 하느님보다 더 정의롭다는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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