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원래 설득의 기술입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고, 시민의 동의를 얻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치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정치는 설득보다 동원을 중시합니다. 정책보다 조직을 앞세우고, 시민보다 지지층을 먼저 봅니다. 이런 정치가 오래 지속되면 정당은 하나의 기계처럼 변합니다. 이것을 "기계정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기계정치는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국민 전체를 설득하기보다 자기 진영을 결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때 가장 값싸고 강력한 연료가 "혐오"입니다.
혐오는 사람을 빠르게 움직입니다. 복잡한 정책 설명보다 “저들이 문제다”라는 말이 훨씬 쉽습니다. 세금, 복지, 외교, 교육, 안보처럼 복잡한 주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혐오는 설명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을 정하고, 분노를 부추기고, 위기감을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 반응합니다.
기계정치가 혐오를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조직은 자신이 무엇을 잘했는지 설명하지 못할 때, 상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말합니다. 자신의 정책 실패를 변명하기 어려울 때, 상대 진영의 도덕적 결함을 강조합니다. 지지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 큰 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혐오정치"의 무서운 점은 혐오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악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는 자신이 정의롭다고 느낍니다. 그는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상대를 공격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쁜 세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정치적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도덕 감정"이 됩니다. 그냥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부도덕하다”, “저들은 위험하다”, “저들은 공동체를 망친다”는 판단과 결합합니다. 이렇게 되면 혐오는 죄책감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혐오할수록 자신이 더 깨어 있고, 더 용감하고, 더 정의로운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자신을 대체로 좋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격성도 가능한 한 정당화하려 합니다. 개인적 원한은 부끄러울 수 있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공격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적 증오는 숨겨야 하지만, 공적 분노는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계정치는 바로 이 지점을 이용합니다.
정치조직은 지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것이다.” “당신은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당신은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본 것이다.” 이 말은 지지자에게 강한 심리적 보상을 줍니다. 자신의 분노가 도덕적 의미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때 혐오는 "기억"과 결합합니다. 사람은 단순한 정보보다 감정이 실린 사건을 훨씬 오래 기억합니다. 특히 모욕감, 배신감, 공포, 분노가 결합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정치적 구호나 선거 공약은 잊혀도 “저들이 우리를 무시했다”, “저들이 나라를 망쳤다”, “저들이 우리 편을 공격했다”는 기억은 오래 남습니다.
"신념"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한 번 어떤 집단을 위험한 존재로 기억하게 되면, 그 이후의 정보는 그 기억을 중심으로 해석됩니다. 상대가 좋은 정책을 내도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상대가 사과해도 위선처럼 보입니다. 상대가 침묵해도 음모처럼 보입니다. 이미 기억의 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혐오정치는 사실관계만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기억의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치적 신념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반복된 감정 경험의 퇴적물입니다. 분노했던 순간, 조롱당했다고 느낀 순간, 배신당했다고 느낀 순간, 두려움을 느낀 순간들이 쌓여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이 됩니다.
기계정치가 혐오를 반복해서 공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혐오는 일회성 동원이 아니라 장기 기억을 만듭니다. 선거 때마다 같은 적을 소환하고, 같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같은 분노를 되살립니다. 그러면 지지자는 새로운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을 다시 확인합니다.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기억의 재생 장치가 됩니다.
이 구조에서는 상대 정당이 좋은 공약을 내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미 기억의 틀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경쟁자가 아니라 위험한 세력으로 기억됩니다. 정책은 뒤로 밀리고, 정체성이 앞에 섭니다. 선거는 비교가 아니라 확인이 됩니다. 정치는 미래를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다시 확인하는 의식이 됩니다.
이것은 특정 국가나 특정 진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조직이 오래 지배할수록 정책 경쟁보다 조직 유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조직을 유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지자에게 “우리가 사라지면 저들이 돌아온다”는 감각을 반복해서 주입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 역사적 피해, 지역적 소외감, 계급적 분노가 여기에 결합하면 정치는 미래의 선택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지키는 의식이 됩니다.
물론 모든 집단 기억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부패에 대한 분노, 불의에 대한 분노, 권력 남용에 대한 분노도 민주주의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기억과 분노가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입니다. 그 순간 분노는 정의감이 아니라 정치적 연료가 됩니다.
기억은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들 수도 있고, 공동체를 가둘 수도 있습니다. 성숙한 정치는 기억을 정의와 제도 개선으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기계정치는 기억을 혐오와 결속의 연료로 바꿉니다. 전자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엽니다. 후자는 과거를 반복해서 현재에 붙잡아 둡니다.
이 구조에서는 정치는 점점 경쟁이 아니라 "전쟁"처럼 변합니다. 상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됩니다. 정책 논쟁은 사라지고, 충성심 경쟁만 남습니다. 누가 더 합리적인가보다 누가 더 분노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정당은 시민을 설득하는 조직이 아니라 감정을 관리하는 조직이 됩니다.
기계정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기억"을 관리합니다. 사람은 논리대로 투표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대로 투표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계정치는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기보다 오래된 상처를 반복해서 소환합니다. 정책은 4년이면 바뀔 수 있지만, 기억은 한 세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정치의 반대말은 단순히 나쁜 정책이 아닙니다. 좋은 정치의 반대말은 시민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입니다. 혐오로 유지되는 기계정치는 바로 그런 정치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판단력을 빼앗고, 분노를 기억으로 만들고, 기억을 신념으로 굳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신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