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제도의 발전은 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이 스스로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권력을 누가 잡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떻게 내려오느냐입니다. 문명화된 정치는 권력을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권력을 "퇴장"시키는 제도입니다.
이 관점에서 인류의 정치사는 흔히 상상하는 늑대에서 길들여진 개로 이어지는 이미지와 닮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정치적 비유이지 실제 늑대 생태의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야생 늑대 무리는 대개 부모와 자손으로 이루어진 가족 집단이며, 강한 개체가 싸움으로 ‘알파’ 자리를 차지한다는 통념은 포획 상태의 관찰에서 과장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늑대의 질서"는 그런 대중적 이미지, 즉 힘으로 서열을 정하고 권력을 빼앗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초기 왕권은 이런 이미지와 닮아 있었습니다. 왕은 행정 책임자가 아니라 무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권력은 물려받거나 빼앗는 것이었고,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더 강한 늑대였습니다. 왕이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라면, 황제는 여러 왕과 여러 민족 위에 선 권력이었습니다. 황제권은 통치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중심을 자처했습니다. 황제는 법 위에 서려 했고, 때로는 신의 대리자나 천명을 받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권력은 임시로 맡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순수한 늑대의 질서만으로 오래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강한 권력은 질서를 만들지만, 동시에 반란과 음모와 내전을 만듭니다. 권력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결국 권력자는 죽임을 당하거나 나라가 찢어집니다. 그래서 정치는 조금씩 권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왕권"은 귀족과 의회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세금도 마음대로 걷지 못하고, 전쟁도 마음대로 벌이지 못하고, 법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왕이 선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력이 너무 오래, 너무 강하게 한 손에 머무르면 사회 전체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을 인간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의회정치"는 한 명의 늑대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장치였습니다. 권력은 한 사람의 이빨이 아니라 여러 세력의 협상 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의회도 완전히 길들여진 권력은 아닙니다. 의회 안에도 정당 기계가 있고, 지역 조직이 있고, 공천권이 있고, 권력을 오래 붙잡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늑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리 안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대통령제"는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대통령은 강한 권력을 갖지만, 그 권력은 임시적입니다. 대통령은 왕처럼 태어나지 않고, 황제처럼 죽을 때까지 군림하지 않습니다. 선거로 들어오고, 임기가 끝나면 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이 대통령제의 핵심입니다. "대통령제"는 권력을 잡게 하는 제도가 아니라, 권력을 내려놓게 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제의 문명화 정도는 대통령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대통령이 얼마나 분명하게 물러나는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4년이든 5년이든 8년이든, 대통령은 시간표 안에 묶입니다. 권력자의 욕망이 끝나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가 권력자의 욕망을 멈추게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987년 헌법"은 매우 복잡한 얼굴을 갖습니다. 1987년 헌법은 민주화의 산물입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했고,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5년 단임제를 도입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것은 분명한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제의 제도 논리에서 보면 후퇴한 측면도 있습니다.
대통령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 견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국회를 견제하고,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1987년 체제는 대통령의 퇴장은 강제하면서도 국회와 지역구 권력의 퇴장은 충분히 강제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5년 뒤 반드시 물러납니다. 그러나 국회는 중간에 해산되지 않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정당 공천과 지역 기반을 통해 반복해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결국 1987년 헌법은 대통령 권력의 욕망은 제한했지만, 국회와 지역구 권력의 욕망은 충분히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러나는 법을 배웠지만, 국회와 지역구는 물러나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1987년 체제"의 가장 큰 한계입니다.
이 한계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기계정치"는 1987년 헌법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지역 기반 정치세력은 이미 강했습니다. 김영삼에게는 부산·경남 기반이 있었고, 김대중에게는 호남 기반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이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은 잃어도 지역구는 남았습니다.
따라서 1987년 헌법은 순수한 민주주의 설계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민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정치기계들의 타협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역 기반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생존 기반을 잃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임기제로 묶였지만, 지역구 권력은 반복 재생되는 구조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1987년 체제의 핵심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대통령은 5년짜리 권력이 되었고, 지역구는 반복 재생되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청와대 권력은 약해졌지만, 국회와 지역구 권력은 강하게 남았습니다. 권력 전체가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대통령 권력만 길들여진 것입니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시도는 이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국가균형발전 정책이었습니다. 수도권 집중을 줄이고 충청권에 새로운 행정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제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행정권력만 이동시키려 한 시도였습니다.
행정수도 이전은 대통령과 정부 부처, 행정 관료 조직을 서울에서 떼어내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와 정당기계는 그대로 서울에 남았습니다. 지역구도 그대로였습니다. 공천권도 그대로였습니다. 움직이려 한 것은 행정권력이었고, 움직이지 않은 것은 정치권력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 논리로 신행정수도 이전을 막았습니다. 그 결과 행정부의 이동은 제한되었고, 정치권력의 서울 중심성은 유지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정치세력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국회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흔들린 것은 대통령의 기획과 행정권력이었습니다.
이것은 1987년 체제의 깊은 구조를 드러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만, 국회와 지역구 정치기계는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물러나는 권력이고, 지역구는 남는 권력입니다. 대통령은 전국적 권력처럼 보이지만, 국회와 지역구 권력은 훨씬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한국 정치의 많은 혼란은 여기서 나옵니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지만, 실제 제도는 대통령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법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고, 예산도 국회를 통과해야 하며, 정당의 공천 구조와 지역 조직은 대통령보다 오래갑니다. 대통령은 강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퇴장합니다. 지역구 정치기계는 약해 보이지만, 반복해서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1987년 헌법은 민주화의 승리였지만, 권력의 진화라는 기준에서는 미완성의 제도였습니다. 그것은 황제적 대통령을 막으려 했지만, 늑대의 본능을 가진 지역구 정치기계를 충분히 길들이지 못했습니다. 권력의 퇴장을 대통령에게만 요구하고, 국회와 지역구에는 충분히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제도의 발전은 권력이 더 멋진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왕, 황제, 의원, 대통령이라는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퇴장"입니다. 누가 권력을 잡는가보다 누가 권력을 내려놓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권력이 내려오지 않는 사회는 다시 늑대의 질서로 돌아갑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만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퇴장입니다. 권력이 들어오는 문보다 나가는 문이 더 중요합니다. 권력이 나가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선거를 해도 기계정치가 됩니다.
1987년 헌법은 대통령에게 나가는 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와 지역구 권력에는 충분한 나가는 문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정치는 대통령은 바뀌지만 지역 권력은 잘 바뀌지 않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정권은 교체되지만 정치기계는 살아남습니다.
늑대는 길들여져야 합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회도, 정당도, 지역구도 길들여져야 합니다. 권력자가 물러나는 법을 배울 때 정치가 문명화됩니다. 권력이 퇴장하지 않을 때 정치는 다시 야생으로 돌아갑니다.
한국 정치의 다음 개혁은 더 강한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 물러나는 권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Mech, L. D. (1999). “Alpha Status, Dominance, Leadership, and Division of Labor in Wolf Packs.” Canadian Journal of Zoology, 77(8), 1196–1203.
- Przeworski, A.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s in Eastern Europe and Latin Amer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민주주의를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제도이자 결과의 불확실성을 조직하는 체제로 설명합니다.
- 대한민국 헌법.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와 대통령·국회의 권한 구조.
- 헌법재판소. (2004).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확인, 2004헌마554·566(병합). 서울 수도의 관습헌법성과 수도 이전의 헌법개정 필요성을 판단한 결정.
- Michels, R. (1915). Political Parties: A Sociological Study of the Oligarchical Tendencies of Modern Democracy. 정당 조직 내부의 권력 집중과 ‘과두제의 철칙’을 다룬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