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국정치와 두 개의 헤게모니
숙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상당히 독특한 인물입니다. 대중적으로는 장희빈과 인현왕후 때문에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왕처럼 기억되지만, 실제 정치에서 그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숙종은 46년 동안 재위하며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을 상대했습니다.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몰아내면서도 끝까지 정치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숙종은 성격적으로 상당히 리버럴형 군주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와 리버럴은 현대의 정치 이념이나 정당 구분이 아니라,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의 도덕기반이론과 도덕자본에 대한 설명을 출발점으로 삼은 도덕적 성향의 구분입니다.
하이트에 따르면 리버럴은 배려와 피해 방지, 공정성처럼 개인의 고통과 부정의에 직접 반응하는 도덕 기반을 특히 중시합니다. 보수는 여기에 충성, 권위, 신성함처럼 공동체를 결속하고 제도를 유지하는 도덕 기반도 함께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하이트는 선한 목적의 개혁이라도 사회에 축적된 도덕자본과 관계의 질서를 보지 못하면 기존 제도를 지나치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보수주의는 오래된 질서를 무조건 따르는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은 한 사람의 판단보다 복잡하며, 제도와 중간 조직에는 개인이 모두 알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문제가 보이더라도 한 사람의 판단으로 전체를 단번에 재편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숙종은 이런 인식론적 신중함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기존의 권력관계를 직접 해체하고 다시 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 오는 날의 천막 하나가 정권을 날렸다
1680년 경신환국의 시작은 놀랍도록 사소해 보입니다.
당시 영의정 허적은 남인의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어느 날 허적 집안에 잔치가 열렸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숙종은 왕실에서 쓰는 기름 먹인 천막인 유악(油幄)을 보내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허적 측은 왕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이미 유악을 가져간 뒤였습니다.
숙종은 격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왕이 허적을 불러 꾸짖고 끝낸 것이 아닙니다. 숙종은 곧바로 군권을 담당하던 인물들을 불러들였고, 남인 측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권을 서인 쪽으로 넘기는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사소해 보였던 유악 사건이 순식간에 정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 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왕실 종친과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죽었고, 당대 최고의 논객 가운데 하나였던 윤휴도 죽었습니다. 유혁연 역시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습니다. 이원정·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도 죽거나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남인 정권을 구성하던 핵심 인물들이 한꺼번에 제거된 것입니다.
빈자리는 서인이 차지했습니다. 김수항이 영의정이 되었고, 김석주를 비롯한 외척과 서인 세력이 군권과 정국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경신환국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유악남용사건」은 유악 사건을 남인 축출의 표면적 계기로 설명합니다. 사건 당일의 《숙종실록》 기록에는 숙종이 유혁연을 훈련대장에서 해임하고 김만기와 신여철에게 군권을 넘긴 조치가 남아 있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월권을 계기로 군권의 중심부터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숙종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군주라면 허적의 월권을 문제 삼더라도 허적 개인을 문책하거나 일부 인사를 교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숙종은 달랐습니다. 문제가 사람 하나가 아니라 권력구조에 있다고 판단하자 판 전체를 갈아엎었습니다.
숙종은 허적 개인의 책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남인이 장악한 권력구조 전체를 교체했습니다. 기존 질서에 축적된 관계와 균형보다 자신이 발견한 문제와 자신의 해결 능력을 더 신뢰한 것입니다.
9년 뒤에는 송시열을 죽였다
경신환국으로 승리한 서인은 숙종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인의 중심에는 당시 조선 유학계의 거물이었던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숙종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학문적·정치적 권위에서는 당대 누구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1688년 장씨가 훗날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숙종은 매우 기뻐했고 이듬해 이 아이를 원자로 정하려 했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반대했습니다. 인현왕후가 아직 젊었으니 왕비에게서 적자가 태어날 가능성을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숙종은 이 반대를 자신의 왕위 계승 결정에 대한 정치적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판을 뒤집었습니다. 이번에는 9년 전 숙종에게 발탁되어 권력을 잡았던 서인들이 쫓겨났습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김수항 역시 사사되었습니다. 서인계 인사들이 대거 유배되거나 제거되었고, 경신환국 때 몰락했던 남인들이 다시 정권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허적과 윤휴도 복권되었습니다.
《숙종실록보궐정오》의 송시열 졸기는 원자 명호를 정한 뒤 송시열이 올린 상소가 왕의 노여움을 거듭 건드렸고, 유배에 이어 사사 명령이 내려졌다고 기록합니다. 원자 책봉을 둘러싼 충돌과 송시열의 죽음이 직접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인현왕후까지 폐위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사환국입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숙종이 장희빈에게 빠졌다”고 설명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송시열은 평범한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국왕의 결정이 의리에 맞는지를 판정하고, 수많은 사대부가 그 판정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독립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숙종이 송시열에게서 문제 삼은 것은 단순한 정책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송시열은 왕권 밖에서 국왕의 정당성을 심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권위였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왕권 위에 그런 최종 심판자가 서는 것을 숙종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송시열이 성리학적 정통의 해석권을 어떻게 정치적 권위로 만들었는지는 「송시열은 보수주의자였을까, 리버럴이었을까」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5년 뒤에는 남인도 다시 버렸다
그렇다면 숙종은 이제 남인과 장씨 편이 되었을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1694년 숙종은 다시 정국을 뒤집었습니다. 이번에는 기사환국 이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남인들이 몰락했습니다.
당시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민암은 갑술환국 직후 사사되었고, 남인 세력이 대거 제거되었습니다. 서인의 노론과 소론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고 인현왕후도 복위되었습니다.
이것이 갑술환국입니다. 세 차례의 환국을 나란히 놓으면 숙종 정치의 특징이 선명해집니다.
- 허적을 제거할 때는 서인을 이용했습니다.
- 송시열을 제거할 때는 남인을 이용했습니다.
- 다시 남인을 제거할 때는 서인을 불러들였습니다.
따라서 숙종에게 “내 편”이라는 것은 영구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세력이라고 해서 내일까지 그 세력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다고 판단하면 선택도 바꾸었습니다. 이를 단순한 변덕이라고 부르기에는 숙종이 너무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세력의 이해관계를 빠르게 읽고, 필요하면 기존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던 정치적으로 영민한 왕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특정 붕당을 사랑하거나 미워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붕당도 국왕과 독립된 권력과 정당성을 장기간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숙종은 헤게모니 자체에 반대한 왕이 아니라 자신의 헤게모니와 경쟁하는 권위를 허용하지 않은 왕이었습니다.
숙종의 신하가 되는 것은 위험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숙종 시대의 신하들이 국왕을 어떻게 느꼈을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허적은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죽었습니다. 윤휴도 죽었습니다. 9년 뒤에는 앞선 환국의 승리자였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죽었습니다. 다시 5년 뒤에는 남인의 실력자 민암이 죽었습니다.
숙종에게 한 번 신임을 받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공신이 내일의 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숙종대의 붕당들은 상대 붕당만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항상 왕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환국정치가 왕권을 강화한 핵심적인 이유였을 것입니다.
숙종은 붕당 사이에서 중재하는 심판이 아니라, 필요하면 경기장을 갈아엎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평복을 입고 백성을 만나는 왕
강력한 권력정치가 숙종이라는 인물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에게는 평복으로 변장해 민간을 돌아다니는 미행설화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왕미행설화」에 따르면 여러 왕 가운데 숙종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미행설화가 역사적 숙종의 실제 행동과 성격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숙종을 관리의 보고와 중간 절차보다 자신의 눈과 판단을 믿는 왕으로 기억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설화 속 숙종은 가난한 선비나 어려운 형편에서도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를 만나 사정을 직접 듣고 도와줍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늘 비슷합니다.
- 직접 봅니다.
- 직접 이야기를 듣습니다.
- 직접 판단합니다.
- 직접 해결합니다.
설화 속 이 모습은 의외로 환국을 일으키던 역사 속 숙종과 닮았습니다.
환국과 미행은 같은 성격일 수 있다
환국과 미행설화에서 숙종은 각각 이렇게 행동합니다.
- 환국: “이 정치세력이 잘못하고 있다. 내가 바꾼다.”
- 미행: “관리들의 보고만으로는 알 수 없다. 내가 직접 가서 본다.”
전혀 다른 두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중간단계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 숙종과 설화 속 숙종은 모두 자신이 직접 현실을 확인하고 판단하며 해결하는 인물로 나타납니다.
왕이 가난한 사람 한 명을 돕는다고 조선의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화 속 숙종은 제도 전체의 효율보다 눈앞의 개인에게 먼저 반응합니다.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해서 눈앞의 한 사람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는 감각입니다.
이처럼 숙종은 제도나 조직이 스스로 좋은 결과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개입하는 왕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이 점이 숙종을 상당히 리버럴형 인물로 보게 합니다.
환국정치가 남긴 부작용
일부에서는 숙종의 환국정치가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잦은 환국으로 붕당정치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결국 노론 중심의 정국과 조선 정치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평가합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폐위와 복위까지 정국 변화와 맞물렸다는 점에서, 숙종이 신하와 왕실의 인물들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이후의 역사를 지나치게 숙종의 환국정치에서 곧바로 끌어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현종대에도 예송논쟁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이미 상당히 격렬했으며, 숙종 사후에도 노론이 곧바로 정국을 독점한 것은 아닙니다. 경종 때에는 오히려 소론이 집권하여 신임사화로 노론을 대거 제거했고, 영조 초기까지도 노론과 소론의 경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숙종 정치의 보다 분명한 부작용은 노론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기보다, 정권을 잃는 일이 단순한 실각이 아니라 유배와 처형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환국이 반복될수록 붕당 사이의 타협과 공존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숙종은 정치를 못한 왕이 아니다
그렇다고 숙종을 무모한 왕이라고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숙종은 상당히 유능했습니다.
숙종대에는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양전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상평통보의 유통도 본격화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숙종은 46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정치의 중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허적과 윤휴를 제거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서인 세력도 필요하면 다시 제거했습니다. 송시열 같은 거물을 죽이고 남인을 다시 몰아내면서도 신하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상당한 정치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숙종의 약점을 굳이 찾는다면 머리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정반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 영리해서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믿을 수 있었던 왕입니다.
영리하기 때문에 자신을 믿었던 왕
숙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숙종은 영리했기 때문에 자신을 믿었던 왕입니다.
허적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허적만 꾸짖는 것이 아니라 남인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송시열이 자신의 왕위 계승 결정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하면 당대 최고의 유학자라는 권위에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남인이 다시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하면 5년 전 자신이 불러들인 사람들도 다시 몰아냈습니다.
백성의 생활 역시 관리들의 보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보고 판단하는 왕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송시열이 성리학적 정통의 해석권을 통해 조선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했다면, 숙종은 정치의 최종 판단권을 국왕 개인에게 집중시키려 했습니다. 두 사람의 충돌은 서로 다른 두 헤게모니가 하나의 국가 안에서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숙종에게 세상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복잡한 질서라기보다, "자신이 충분히 정확하게 판단한다면 직접 고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숙종은 현대의 정치 이념과는 무관하게, 성격적으로 상당히 전형적인 리버럴형 군주였습니다.
세종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종도 매우 영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밀어붙이기보다 조사하고, 논쟁시키고, 시험한 뒤 제도로 정착시키려는 경향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차이를 아주 짧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세종은 영리하기 때문에 제도를 믿었고, 숙종은 영리하기 때문에 자신을 믿었습니다.
둘 다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머리를 사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참고문헌
- 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 Pantheon Books, 2012.
- 국사편찬위원회, 「제19대 숙종실록 해제」,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김만기·신여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3월 28일.
- 국사편찬위원회, 「전 좌의정 송시열의 졸기」, 《숙종실록보궐정오》 21권, 숙종 15년 6월 3일.
- 국사편찬위원회, 「참국한 대신 이하의 관작을 삭탈하고 민암 등을 절도에 안치하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일.
-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악남용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숙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미행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