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송시열은 보수주의자였을까, 리버럴이었을까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이 성리학적 정통의 해석권을 장악하고, 국왕의 결정까지 심판하는 도덕적 헤게모니를 구축한 과정을 살펴봅니다.

송시열은 보수주의자였을까, 리버럴이었을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흔히 보수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을 대표했고 주희를 절대적으로 존중했습니다. 예법과 군신 관계를 중시했으며,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교리와 권위를 내세웠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보수주의는 옛것을 무조건 따르는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 속에서 형성된 제도와 권력의 균형을 존중하며, 한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 전체의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보수와 리버럴은 17세기 조선의 정치 이념이나 정당 구분이 아닙니다.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의 도덕기반이론과 도덕자본에 대한 설명을 출발점으로 삼은 도덕적 성향의 구분입니다.

하이트에 따르면 리버럴은 배려와 피해 방지, 공정성처럼 개인의 고통과 억압에 직접 반응하는 도덕 기반을 특히 중시합니다. 보수는 여기에 충성, 권위, 신성함처럼 공동체를 결속하고 제도를 유지하는 도덕 기반도 함께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하이트는 하나의 도덕적 선의를 앞세운 개혁이 사회에 축적된 도덕자본을 보지 못할 때 기존 제도와 관계를 지나치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오래된 언어를 사용했느냐가 아닙니다. 그 언어를 통해 다양한 도덕적 요구와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하나의 원리를 사회 전체의 최종 기준으로 만들고 그 해석권을 독점하려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송시열은 성리학을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승한 학통을 조선 사회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권위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바로 그 헤게모니입니다.

명은 멸망했지만 원리는 남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은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했습니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관직을 떠나 산림의 학자로 지냈습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은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효종은 북벌에 강한 의지를 보였고, 송시열도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송시열을 단순한 공상적 북벌론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군사력과 재정을 강화하기 위한 내정 개혁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청 의식은 기존 질서를 보존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의 강압과 삼전도의 굴욕, 조선이 청에 굴복한 상태에 대한 강한 반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에게 조선은 청의 힘에 굴복한 피해자였고, 북벌은 그 부당한 억압을 바로잡는 도덕적 과제였습니다. 그가 먼저 물은 것은 청나라가 강한지 약한지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의 강압에 굴복한 상태가 옳은가, 그른가.

하지만 현실은 빠르게 변했습니다. 명나라는 1644년 베이징을 잃었고 남명의 저항도 결국 무너졌습니다. 1662년 영력제가 죽으면서 명 왕실의 복원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청은 일시적인 점령군이 아니라 중국 대륙을 장기간 지배할 새로운 왕조가 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지배 왕조와 집단이 바뀐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북위는 선비족, 요는 거란족, 금은 여진족, 원은 몽골족의 왕조였습니다. 같은 시대의 조선인 가운데에도 명에 대한 감정보다 실제 세력의 변화를 중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현실이 변했다고 해서 세계관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북벌이 어려워질수록 청에 대한 피해와 복수의 감정을 존주대의(尊周大義), 곧 유교 문명의 정통을 지켜야 한다는 보편적 원리로 발전시켰습니다.

명나라는 사라졌지만 명이 대표한 문명의 정통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실제로 지배한다고 해서 정통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송시열은 이 원리를 개인적인 신념으로 간직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속한 학통이 어떤 국가와 정치가 정당한지를 판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이론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송시열의 이론이 현실의 정당성을 판정했습니다.

송시열이 지키려 한 것은 정통의 기준이었다

송시열이 지키려 한 것은 사라진 명나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지키려 했습니다.

  • 누가 문명의 정통인가.
  • 누가 올바른 유학자인가.
  • 어떤 경전 해석이 옳은가.
  • 어떤 정치가 의리에 맞는가.

그 기준의 중심에는 주희의 학문과 자신이 계승했다고 믿은 학통이 있었습니다. 송시열에게 주자학은 여러 철학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핵심은 송시열이 무엇을 지키려 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그 전통의 의미를 해석하고, 누가 사회 전체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판정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송시열은 특정 원리를 사회 전체의 판단 기준으로 만들고, 그 원리를 해석하는 집단이 최종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이것은 헤게모니의 문제입니다.

헤게모니는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장악하는 힘입니다.

예송논쟁은 해석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벌어졌습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죽은 뒤에는 복제 문제가 다시 정치적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의 눈에는 상복 기간을 두고 정치 세력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일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예는 단순한 복장 규정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적통인지, 왕은 일반 사대부와 같은 종법 질서에 들어가는지, 왕실의 계승을 어떤 원리로 설명할 것인지가 모두 예법에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송은 단순한 ‘상복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조선 사회의 관계와 질서를 해석할 권리를 가질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었습니다.

송시열에게 정치는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느냐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관계가 올바른 원리에 따라 배치되어 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해석할 권위는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윤휴는 왜 위험한 사람이었을까

윤휴는 주희의 해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경전을 스스로 다시 읽으려 한 독창적인 성리학자였습니다. 오늘날에는 학자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송시열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윤휴의 문제는 단순히 틀린 해석을 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윤휴가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희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한 송시열 계열의 최종 해석권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윤휴는 경쟁하는 학자가 아니라 유학의 정통을 어지럽히는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송시열에게 정통은 이미 존재했고, 다른 해석은 가능한 견해가 아니라 정통의 질서를 파괴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 원칙은 인간관계보다도 앞섰습니다. 송시열은 오랜 친구 윤선거에게 윤휴와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윤선거가 이를 따르지 않자 두 사람의 관계도 악화했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윤증과 갈등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거대한 논쟁으로 발전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좋게 보면 놀라운 원칙주의입니다. 그러나 그 원칙을 최종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송시열과 그의 학문적 계열이었다는 점에서 원칙주의는 곧 정치권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만든 헤게모니

송시열은 행정 조직을 오랫동안 직접 장악한 정치가와는 달랐습니다. 그의 힘은 산림에서 나왔습니다. 제자와 학통, 서원과 사대부의 네트워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우리가 조선 성리학의 정통이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정권을 잃더라도 옳음을 정의하는 권위는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송시열도 영향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때 그가 중요하게 여긴 일은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효종의 존주대의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도 같은 의미를 부여했고, 효종을 종묘에서 특별히 존숭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문묘와 학통의 문제도 중시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상징정치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누구를 성현으로 모시고 어떤 왕을 의리의 상징으로 기억할지 정하면 후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송시열은 권력만 얻으려 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기억하는 방식까지 만들려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서인이 정권을 잡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서인의 특정 학통이 조선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숙종과 충돌한 두 개의 권위

1688년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숙종은 이듬해 이 왕자를 원자로 정했습니다. 후일의 경종입니다.

서인은 인현왕후가 아직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있는데 후궁 소생의 왕자를 너무 빨리 후계자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당시 82세였던 송시열도 원자 정호가 너무 이르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숙종은 격분했습니다.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했으며,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기사환국입니다.

이 사건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문제이자 서인과 남인의 권력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충돌이 보입니다.

숙종은 ‘이 아이를 내 후계자로 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송시열과 서인은 그 결정이 올바른 예와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왕위 계승의 최종 판단자는 누구일까요. 국왕일까요, 아니면 국왕도 따라야 할 성리학적 원리를 해석하는 사대부일까요.

송시열에게는 군대나 독립된 관료 조직이 없었습니다. 대신 왕의 행동이 의리에 맞는지 판정할 도덕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대부가 그 판정을 받아들인다면 왕은 실제 권력을 지니고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군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숙종은 특정 붕당이 정치권력을 장기간 독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남인이 강해지면 남인을 몰아냈고, 서인이 강해지면 서인도 몰아냈습니다.

숙종에게 송시열은 단순한 반대파가 아니었습니다. 관직을 빼앗아도 학통과 제자, 사대부 사회의 권위를 통해 왕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쟁 권력이었습니다.

1689년의 충돌은 왕의 정치적 주권과 사대부의 도덕적 헤게모니가 정면으로 부딪힌 사건이었습니다.

숙종은 정통의 최종 승인권도 쥐었다

숙종이 송시열을 죽였다고 해서 그의 학문적 권위까지 끝내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1716년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에 직접 결론을 내렸습니다. 송시열에게 잘못이 없고 윤증이 잘못했다고 판정했습니다.

1689년 송시열을 죽인 왕이 27년 뒤에는 그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숙종이 송시열의 헤게모니에 굴복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다시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숙종은 송시열을 제거할 수도 있었고 다시 높이 평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를 인정하더라도 그 권위를 승인하는 최종 판단권은 왕에게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숙종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원리를 일관되게 지키는 일보다 자신이 최종 판단권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송시열과의 충돌은 개인적 원한이나 단순한 이념 차이가 아니라 누가 조선의 마지막 심판자인지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었습니다.

송시열은 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는가

송시열은 오래된 성리학을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모델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것을 조선 사회 전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는 같은 특징이 반복됩니다.

  • 현실보다 자신이 세운 원칙을 앞세웠습니다.
  • 현실이 달라져도 원리를 쉽게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 다른 견해를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정통에서 벗어난 이탈로 규정했습니다.
  • 친구와 제자에게도 자신이 정한 기준을 따르도록 요구했습니다.
  • 자신이 속한 학통을 사회 전체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 국왕의 결정도 자신이 해석하는 의리와 정통의 심판 아래 두려 했습니다.

이것은 전통에 대한 신중한 존중이 아닙니다. 전통의 해석권을 독점하여 자신의 헤게모니를 세우려는 행동입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인간 판단의 한계를 일깨우는 축적된 지혜가 아니라 현실과 국왕의 정당성을 심판하는 절대 원리였습니다.

이 글에서 송시열을 리버럴형 인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새로운 사상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피해와 억압에 대한 도덕적 반응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올바른 모델을 세우고, 현실 전체를 그 모델에 맞게 판단하며, 그 해석권까지 장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정통의 이름으로 헤게모니를 세운 사람

송시열과 숙종의 충돌은 완고한 보수 신하와 젊은 왕의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숙종과 국왕의 정당성까지 판정하려 한 송시열의 헤게모니가 충돌한 사건이었습니다.

송시열의 원자 책봉 반대는 단순한 정책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왕위 계승에 관한 국왕의 결정도 자신이 해석하는 예와 종법의 원리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기능했습니다. 자신의 결정권 위에 또 다른 도덕적 심판자가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숙종은 결국 그 경쟁 권력을 제거했습니다.

숙종에게는 왕권이 있었고 송시열에게는 정통을 정의하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1689년의 직접적인 충돌에서는 숙종이 승리했고 송시열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의 제자와 학통은 살아남았습니다. 노론은 이후 조선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송시열은 한 사람의 정치가를 넘어 ‘송자(宋子)’로 불렸습니다. 정치적으로 죽은 사람이 문화적으로는 승리한 셈입니다.

송시열은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리학적 정통의 해석권을 자신의 학통과 결합하여, 조선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최종적으로 판정하려 한 헤게모니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오래된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 권력의 구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송시열의 핵심은 전통이 아니라 정통의 독점이었고, 숙종과의 마지막 충돌 역시 누가 조선의 최종 심판자가 될 것인지를 둘러싼 헤게모니의 충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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