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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물 ⑦]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는가


7부작 대단원. 늑대와 개의 문명사적 대조, 반헤게모니로서의 보수주의, 관용과 제도적 경계심, 그리고 공존의 문명을 지키는 깨어있는 리트리버들의 역할을 다룹니다.

[산과 물 ⑦]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는가
산처럼 남는 보수와 물처럼 흐르는 진보, 10억 마리의 개와 수십만 마리의 늑대가 던지는 문명사적 질문

1. 산과 물, 리트리버와 늑대

앞선 글들에서 보수주의를 산과 리트리버에 비유했습니다. 보수주의는 산처럼 오래된 질서를 지키려 합니다. 사회를 어떤 거대한 이념에 따라 단번에 재설계하기보다, 오랜 시행착오와 세대를 거치며 검증된 제도와 관습을 존중합니다. 보수주의자는 리트리버와도 비슷하여, 상대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으며, 법과 기본 규칙을 지킨다면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반면 진보주의는 물처럼 흘러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을 발견했고, 그람시와 신좌파는 문화와 상식을 파고들었으며, 급진적 페미니즘은 사생활을 정치화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는 언어와 정상성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억압을 찾아냈습니다. 물길은 계속 달라졌지만 그 흐름 속에는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누고, 자신의 정당성을 해방이라 부르며, 새로운 세계관을 사회의 지배적 상식으로 만들려는 반복적인 헤게모니 구조가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7부작의 최종 질문은 이것입니다.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을까요?"


2. 리트리버의 착각과 늑대의 본질

어느 사회에나 권력을 갈망하고 상대를 적과 동지로 갈라 배제하려는 '늑대'는 존재합니다. 늑대는 진보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민족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권위주의적 보수 운동 역시 자신을 절대적 선으로 놓고 반대자를 제거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늑대가 될 수 있습니다. 리트리버와 늑대를 나누는 기준은 좌와 우가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켜야만 자신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는가에 있습니다.

리트리버의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의 순진한 공존 성향을 상대에게도 그대로 투사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 없으므로 상대도 공존을 원할 것이라 믿고, 학교와 언론을 정치적 도구로 쓰지 않으므로 상대도 중립을 지킬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늑대에게 규칙은 공존의 약속이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한 잠정적 수단일 뿐입니다. 소수일 때는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다가, 영향력을 얻은 뒤에는 상대의 표현을 혐오로 규정해 배제합니다. 리트리버가 상대의 침범을 실수나 오해로 여겨 방관하는 동안 제도는 이미 넘어갑니다. 공존은 한쪽의 무조건적인 관용으로 유지되는 선의의 상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규칙을 독점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하는 '제도적 경계심'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3. 보수주의의 헤게모니는 '반(反)헤게모니'여야 한다

진보주의가 교육, 언론, 문화의 언어를 장악했다고 해서 보수주의도 똑같은 방식으로 보수적 교리와 보수적 인사를 독점 배치하는 헤게모니를 추구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늑대의 종류만 바뀌었을 뿐, 독점과 지배라는 울타리 안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보수주의가 수호해야 할 목표는 '보수주의의 독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보수주의의 헤게모니는 특정한 결론을 강요하는 헤게모니가 아니라, 어떠한 사상도 사회 전체를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반(反)헤게모니(Counter-Hegemony)'여야 합니다.

  • 주장은 정체성이 아닌 증거와 논증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 잘못은 집단적 위치가 아닌 구체적 행위와 책임을 통해 판단되어야 합니다.
  •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되 반론과 검증의 기회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 표현의 자유는 내가 동의하는 의견이 아닌, 불쾌한 의견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 선거, 재판, 학문, 언론의 절차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성숙하게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공통의 규칙과 절차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보수주의가 사회에 요구해야 할 최소한이자 최대의 상식입니다.


4. 늑대의 세계와 개의 세계: 10억 마리의 진화사

오늘날 야생의 늑대는 전 세계에 수십만 마리가 남아 있지만,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개는 약 10억 마리에 이릅니다. 이 압도적 차이는 단순한 개체 수의 차이가 아니라 문명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늑대의 생태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그들은 포식자로서 훌륭히 적응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개는 전혀 다른 진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개는 인간의 곁에서 다른 존재의 신호를 읽고, 기다리고, 협력하며, 자신과 다른 종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개는 늑대보다 강해서 번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늑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안정적인 세계를 얻었습니다.

인간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적을 찾아내어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늑대의 사회가 있는가 하면, 불완전함 속에서도 법과 절차, 교환과 신뢰를 통해 공존하는 개의 사회가 있습니다. 인간 문명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늑대를 완전히 사멸시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늑대처럼 포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모든 구성원이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법치와 다원주의 질서를 구축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5. 결론: 깨어 있는 리트리버

보수주의의 과제는 늑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늑대를 알아보는 깨어있음'입니다. 선한 언어 뒤에 숨은 권력욕을 구분해내고, 피해자 보호라는 명분이 새로운 신분적 지배를 만들지 않는지 매서운 눈으로 살펴야 합니다. 또한 현실의 고통과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급진주의자들이 그 문제를 독점하기 전에 먼저 제도적으로 해결해 내야 합니다.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울타리가 건재하고, 공통의 규칙이 작동하며, 늑대가 그 규칙을 지키는 동안에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늑대가 울타리를 부수고 공존의 절차를 파괴하기 시작한다면, 리트리버 역시 일어서서 울타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증오가 아니라, 철저한 경계심과 용기,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수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적 이해입니다.

문명을 지켜온 것은 늑대가 없어서도, 물길이 멈추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늑대가 되지 않으면서 늑대를 막아내고, 물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홍수를 막아냈던 깨어 있는 리트리버들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 [시리즈] 보수주의는 산처럼 남고, 진보주의는 물처럼 흐른다

  1. [1편] 보수주의자는 왜 헤게모니를 원하지 않는가
  2. [2편]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적을 만들었는가
  3. [3편] 사람이 넘쳐나던 시대의 사상
  4. [4편] 그람시는 왜 공장보다 학교를 보았는가
  5. [5편] 페미니즘은 어떻게 사생활을 정치화했는가
  6. [6편]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적을 만들었는가
  7. [7편]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는가 (현재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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