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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과 혐오 ⑤] 혐오는 국민의 뜻이 아니다


보수 대통령을 향한 혐오가 아무리 널리 공유되어도 곧바로 국민의 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스바움의 혐오론과 카너먼의 노이즈 개념으로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정치인의 별명은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별명이 오랫동안 반복되고 대중적인 상징으로 굳어지면, 그것은 한 정치인을 평가하는 방식까지 바꿉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같은 대상을 싫어한다는 사실과 그 감정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론의 크기는 얼마나 널리 공유되는지를 보여주지만, 그 판단이 같은 증거와 같은 기준을 통과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글의 중심 질문은 보수 대통령에게 붙은 별명이 더 모욕적인지를 가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혐오가 충분히 넓게 퍼지면 그것을 국민의 뜻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한국 대통령에게 붙은 대표적인 멸칭을 비교하면 감정의 종류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쥐박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닭근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외모와 체형을 근거로 돼지에 비유되었습니다. 이 표현들은 단순히 정책이 잘못됐거나 통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사람을 동물로 바꾸어 부르는 동물화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킨 ‘놈현’도 분명한 멸칭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붙은 ‘문재앙’과 ‘문죄인’ 역시 거칠고 모욕적입니다. 그러나 표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구조는 다릅니다.

‘문재앙’은 문재인 정부가 국가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가치판단이고, ‘문죄인’은 정치적·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단죄입니다. 과격하거나 부당할 수 있지만 최소한 반박할 명제가 남습니다.

반면 ‘쥐박이’와 ‘닭근혜’에는 논쟁할 명제가 거의 없습니다. 이명박의 어떤 정책이 왜 잘못됐는지, 박근혜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를 더럽고 교활한 쥐, 우둔하고 우스운 닭의 형상으로 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가치판단과 혐오의 차이입니다.

1. 비판은 행위를 겨냥하고, 혐오는 존재를 겨냥한다

정치적 비판은 원칙적으로 행위와 결과를 대상으로 합니다.

  • 그 정책은 실패했다.
  • 그 결정은 헌법에 어긋났다.
  • 그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주장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반론이 가능합니다. 정책의 효과를 비교하거나, 증거를 검토하거나, 법률을 해석해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쥐나 닭, 돼지로 부르는 순간 논쟁은 불필요해집니다. 쥐가 어떤 정책을 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닭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불쾌하고 열등하며 조롱해도 되는 존재로 규정됐기 때문입니다.

혐오는 상대방이 무엇을 했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 사람을 존중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따라서 혐오의 핵심은 욕설의 강도에만 있지 않습니다. 상대를 비판 가능한 인간으로 남겨두는지, 인간 이하의 형상으로 바꾸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분노와 혐오는 같은 감정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행동을 바꾸게 하려는 경향과, 혐오는 대상을 멀리하고 배제하려는 경향과 더 강하게 연결됩니다. 정치적 외집단을 향한 혐오가 신체적 역겨움보다 도덕적 혐오에 가깝게 작동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문재앙’과 ‘문죄인’이 괜찮은 표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표현들은 분노와 단죄를 압축합니다. ‘쥐박이’와 ‘닭근혜’는 거기에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과 비인간화를 더합니다. 감정의 방향이 같지 않습니다.

2. 보수 대통령은 동물화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정치에서 양쪽 진영 모두 상대 대통령을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위의 대표적인 별명만 놓고 보면 보수 대통령에게 붙은 표현은 인간을 동물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더 직접적으로 혐오적입니다.

보수 진영에서도 진보 정치인과 그 지지자를 ‘빨갱이’, ‘종북’, ‘간첩’으로 규정해 왔습니다. 이것 역시 상대를 공동체의 적으로 만드는 위험한 혐오와 낙인입니다. 다만 작동시키는 감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동물화는 상대를 더럽고 우습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경멸과 배제를 부릅니다.
  • 반역자 낙인은 상대를 위험한 적으로 만들어 공포와 분노, 축출을 부릅니다.
  • 가치판단형 멸칭은 상대의 통치 결과나 책임을 과격하게 단죄합니다.

세 방식 모두 정치적 판단을 왜곡할 수 있지만 동일한 감정은 아닙니다. 특히 동물화는 상대가 같은 인간으로서 받을 절차와 존중까지 아깝게 느끼게 만듭니다.

대표 별명 몇 개만으로 어느 진영이 전체적으로 혐오 표현을 더 자주 사용했는지 통계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장기간의 언론·정치 연설·온라인 자료를 같은 기준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용 빈도의 통계가 없다고 해서 이 표현들이 가진 정서적 차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수 대통령의 대표적인 멸칭이 더 강한 동물화와 비인간화를 담고 있다는 것은 표현 자체의 구조를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3. 누스바움: 혐오는 다수의 감정일 수 있어도 정의의 근거는 아니다

마사 C.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가 오염에 관한 마술적 사고와 불가능한 순수성의 열망을 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취약성과 동물성을 인정하는 대신, 그것을 특정한 사람과 집단에 투사해 더럽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혐오는 개인적인 불쾌감에 머물지 않습니다. 누가 깨끗한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누가 밖으로 밀려나야 할 오염원인지를 나누는 정치적 언어가 됩니다. 누스바움이 참여한 비교 연구도 혐오의 수사가 특정 집단을 더럽고 지나치게 동물적이며 완전한 인간들과 공간을 공유하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그려 배제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모든 감정을 법에서 배제하자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혐오와 수치심이 개인의 존중과 자유를 막는 제도적 토대가 되는 것을 특별히 경계합니다. 혐오는 상대의 구체적인 해악을 입증하기보다 그 존재와 접촉 자체를 문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쥐박이’, ‘닭근혜’, 돼지에 빗댄 표현은 단순한 모욕보다 정치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상대를 잘못된 정책을 편 시민이 아니라, 깨끗한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오염된 존재로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국민은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 군중과 같지 않습니다. 민주적 의사는 적어도 다음 조건을 통과해야 합니다.

널리 공유된 혐오민주적인 국민의 뜻
사람의 존재를 먼저 규정한다구체적인 행위를 특정한다
감정의 강도가 정당성을 대신한다증거와 공개된 이유를 요구한다
반론자를 공범이나 배신자로 본다반론과 방어권을 보장한다
상대 진영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정치적 소속을 바꾸어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제거 뒤의 결과를 묻지 않는다파면의 필요성과 비용을 함께 비교한다

국민의 분노는 실제 권력 남용을 드러내고 책임 추궁을 시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가 오염과 추방의 감정으로 바뀐 뒤에도 스스로를 국민의 뜻이라고 부를 때입니다.

국민의 뜻은 다수가 무엇을 혐오하는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이유를 함께 제시할 수 있는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4.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의롭다고 믿는다

혐오의 가장 위험한 특징은 혐오하는 사람이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누군가를 부당하게 미워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부패와 무능, 반헌법적 행위에 맞서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편향되었습니다”라는 지적만으로는 판단이 교정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엄격함을 편견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너스바움이 혐오를 공적 정의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대니얼 카너먼, 올리비에 시보니, 캐스 선스타인의 노이즈 개념은 혐오가 실제 판단의 일관성을 어떻게 흔드는지 검사하는 보조 도구가 됩니다.

편향은 판단이 한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기우는 현상입니다. 노이즈는 같거나 비슷한 사건이 판단자, 대상, 시점에 따라 불필요하게 다르게 평가되는 현상입니다.

정치적 탄핵 판단에는 세 종류의 노이즈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노이즈탄핵 판단에서 나타나는 모습
수준 노이즈어떤 사람은 모든 위법에 파면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은 거의 어떤 위법에도 파면을 반대한다
패턴 노이즈권력 남용에는 엄격하면서 자기 진영의 권력 남용에는 맥락과 선의를 찾는다
상황 노이즈같은 행위도 대형 집회, 자극적 보도, 지지율 폭락 직후에는 훨씬 중대하게 느껴진다

보수 대통령에게 일관되게 더 가혹한 기준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방향성을 가진 편향입니다. 동일한 사람이 정치적 소속과 당시 여론에 따라 중대성 판단을 바꾼다면 노이즈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편향과 노이즈가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판단자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느끼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대상의 이름과 소속을 바꾸어도 같은 행위에 같은 판단을 내리는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강한 도덕적 확신은 판단의 정확성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5. 탄핵 판단에도 노이즈 감사가 필요하다

카너먼 등이 제안한 노이즈 감사는 하나의 사건을 여러 판단자가 독립적으로 평가하게 한 뒤 판단의 불필요한 분산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탄핵처럼 실제 사건을 반복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사고실험과 구조화된 비교를 통해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이름과 정당을 가린 두 개의 가상 사례를 만들 수 있습니다. 행위와 증거는 같게 두고 정치적 소속만 바꿉니다. 그런 다음 다음 항목을 각각 판단하게 합니다.

  1.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입증되었는가
  2. 어떤 헌법·법률 위반이 인정되는가
  3. 위반의 해악과 반복 가능성은 얼마나 큰가
  4. 정치적 책임이나 형사재판으로 충분한가
  5. 임기를 중단시킬 파면이 필요한가

판단자들은 서로 토론하기 전에 독립적으로 점수를 매겨야 합니다. 처음부터 한꺼번에 “탄핵에 찬성하는가”라고 물으면 인물에 대한 호감과 결론이 세부 판단을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 대통령의 이름과 소속을 공개합니다. 이름을 본 뒤 사실의 신뢰도, 위법성, 중대성, 파면 필요성 점수가 크게 달라진다면 판단에는 정치적 신호가 섞여 있습니다.

이 검사는 누가 정의로운 사람인지 가리지 않습니다.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지를 측정합니다. 자신을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외부적 일관성 검사가 필요합니다.

6. 혐오는 탄핵의 법적 사유가 아니다

대통령 탄핵은 인기나 호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통령에게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었는지, 그 위반이 대통령직을 박탈할 만큼 중대한지를 판단하는 절차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파면이 선거를 통해 부여된 민주적 정당성을 임기 중 박탈하는 결정이므로, 위법행위의 해악이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중대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해 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일부 법 위반이 인정됐지만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로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청구가 기각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7년 탄핵심판에서 파면됐고, 윤석열 대통령도 2025년 탄핵심판에서 파면됐습니다. 대통령 탄핵심판 세 건 가운데 실제로 대통령직을 잃은 두 사람은 모두 보수 진영 대통령입니다.

이 사실만으로 두 대통령이 혐오 때문에 파면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두 사건에서 구체적인 법 위반과 그 중대성을 인정했습니다. 혐오가 탄핵의 직접적인 법적 원인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그러나 혐오가 법적 사유가 아니라는 것과 탄핵에 이르는 정치적·사회적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여론조사의 다수, 거리의 함성, 압도적인 온라인 반응도 그 자체로 파면의 법적 요건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정치적 의사의 중요한 표현이지만, 구체적인 위법행위와 증거, 중대성 판단으로 번역되어야 비로소 탄핵의 근거가 됩니다. 혐오의 크기를 국민의 뜻으로 부르는 순간 이 번역 과정이 생략될 수 있습니다.

7. 혐오는 중대성의 기준에 노이즈를 만든다

사람들은 모든 위법행위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정치인의 잘못에는 사정과 맥락을 찾고, 싫어하는 정치인의 잘못에는 악의와 음모를 찾습니다.

정상적인 탄핵 판단의 순서는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중대한 위법행위의 확인
→ 증거 조사
→ 법률적 평가
→ 대통령직 파면의 필요성 판단

그러나 혐오가 먼저 지배하면 순서가 바뀝니다.

제거해야 할 인물이라는 규정
→ 정치적 축출에 대한 동의
→ 탄핵 사유의 수집과 확대
→ 법률적 정당화

이때 탄핵은 위법행위를 발견한 뒤 내려지는 결론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정치적 결론을 법률로 완성하는 절차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평상시라면 정치적 책임이나 형사책임의 문제로 처리했을 행위도, 혐오받는 대통령에게는 파면 사유로 더 쉽게 확대될 수 있습니다. 개별 행위의 위법성과 대통령직 박탈의 필요성 사이에 있어야 할 비례성 판단이 대상의 이름에 따라 흔들리는 것입니다.

혐오는 헌법 조항을 바꾸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무엇을 중대한 위반이라고 느끼는지, 어느 정도의 증거를 충분하다고 보는지, 반론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를 바꿉니다. 법률의 문턱은 그대로 있어도 그 문턱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판단에는 노이즈가 생길 수 있습니다.

8. 사소한 잘못도 제거의 명분이 된다

혐오가 충분히 형성된 사회에서는 정치인의 잘못을 판단하는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정상적인 사회는 이렇게 묻습니다.

  • 이 행위가 사실인가
  • 어떤 법을 위반했는가
  • 대통령직을 박탈할 만큼 중대한가

그러나 혐오가 지배하는 사회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번에는 저 사람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 순간 잘못의 크기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작은 잘못은 더 큰 악의 증거로 해석되고, 설명은 변명으로 간주되며, 절차를 요구하는 사람은 범죄자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혐오는 탄핵의 문턱을 낮춥니다. 헌법재판소가 적용하는 법조문을 직접 바꾸어서가 아니라, 사회와 정치권이 중대성·증거·비례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대상에 따라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법적 판단에도 실제로 같은 노이즈가 있었다고 주장하려면 결정문의 증거 평가와 중대성 법리를 유사 사건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원의 편향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 이전의 정치적 노이즈까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9. 풍자라고 부르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가

보수 대통령에 대한 동물화는 권력자에 대한 풍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권력자는 조롱받을 수 있고 대통령은 일반 시민보다 강한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정책을 조롱하고, 말실수를 풍자하며, 무능과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 비판의 자유가 곧 비인간화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쥐, 닭, 돼지로 바꾸어 부르는 표현이 한두 번의 농담으로 끝나지 않고 언론인, 예술가, 정치인, 온라인 공동체를 통해 수년간 반복된다면 그것은 정치문화가 됩니다.

그 문화 속에서 대상은 더 이상 선거에서 이기거나 질 수 있는 정치적 경쟁자가 아닙니다. 같은 절차와 비례성의 보호를 충분히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풍자는 권력의 과장을 벗겨냅니다. 비인간화는 권력자에게도 남아 있어야 할 인간적 지위와 절차의 자격을 벗겨냅니다.

10. 파면된 대통령은 모두 보수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은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인용으로 실제 파면된 대통령은 박근혜와 윤석열, 두 명의 보수 대통령뿐입니다.

이 결과를 곧바로 혐오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질문도 필요 없는 우연으로만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보수 대통령의 대표적인 멸칭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동물화와 비인간화를 담았고, 실제 정치적 축출도 같은 진영에서 두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은 함께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쥐박이’라는 별명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처벌받은 것도 아니고, ‘닭근혜’라는 별명 하나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것도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외모 조롱이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인간화는 한 정치인을 정상적인 절차와 비례성의 보호를 충분히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법률은 최종적인 형식이지만, 그 형식에 도달하게 한 사회적 감정은 훨씬 오래전부터 형성됩니다.

확인해야 할 것은 별명과 파면 사이의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같은 정도의 위법행위, 같은 증거, 같은 헌법적 위험을 두고도 대통령의 진영에 따라 중대성 판단이 달라지는지입니다. 이것이 노이즈 감사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11. 혐오받는 사람에게도 절차는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험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절차를 보장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증거 기준과 비례성의 원칙을 적용할 때입니다.

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의 권리가 있습니다.

닭이라고 조롱하는 사람에게도 선거로 부여받은 민주적 정당성이 있습니다.

돼지라고 부르는 대통령에게도 위법행위와 파면 사이의 엄격한 심사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심사의 결과 파면이 정당하다고 판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동물화된 멸칭이 아니라 구체적인 증거와 엄격한 법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혐오받는 사람이므로 절차를 줄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절차는 원칙이 아니라 호의가 됩니다. 그리고 호의로 바뀐 절차는 언젠가 누구에게나 거부될 수 있습니다.

혐오는 단순히 언어를 거칠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증거의 문턱을 낮추고, 반론을 변명으로 만들며, 정치적 책임과 형사책임과 탄핵책임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위법행위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이번에 제거할 수 있는지만 묻게 됩니다.

그때 탄핵은 헌법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혐오를 법률의 형태로 완성하는 절차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혐오를 품은 사람은 자신을 혐오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의로운 시민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감정을 국민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강도와 도덕적 확신만으로는 판단의 민주적 정당성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너스바움의 지적처럼 혐오는 상대를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럽히는 오염원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형성된 다수의 감정은 강력한 정치적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밀어낸 뒤 만들어진 일치는 국민 전체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뜻은 단순히 가장 큰 목소리나 가장 격렬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실과 증거를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반론을 허용하며, 정치적 소속이 바뀌어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절차를 거쳐 형성된 판단이어야 합니다.

탄핵 판단에서 필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행위와 같은 증거를 대통령의 이름과 진영이 달라졌을 때도 같은 무게로 평가하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혐오는 국민의 뜻이 아닙니다. 혐오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이유와 절차를 통과한 판단만이 국민의 뜻을 주장할 자격을 얻습니다.

파면된 대통령이 모두 보수였다는 사실만으로 편향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수 대통령에게 집중된 동물화와 비인간화, 그리고 같은 방향에서 반복된 정치적 축출은 판단의 일관성을 검사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 검사를 거부한 채 자신의 분노가 정의롭고 다수가 동의한다고만 말한다면, 법리는 판단을 교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론을 국민의 뜻으로 포장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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