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 ⑥]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적을 만들었는가](/_next/image?url=%2Fimages%2Fhow-postmodernism-created-new-enemies.png&w=3840&q=75)
1. 진보주의 물길의 세분화
마르크스주의는 세상을 계급으로 나눴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두 주체였으며, 어느 계급에 속했는가가 이해관계와 정치적 위치를 결정했습니다. 이후 급진적 페미니즘은 이 계급투쟁의 문법을 남성과 여성의 관계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사회는 이 두 개의 축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웠습니다. 노동자 가운데도 남성과 여성이 있었고, 여성 가운데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다수인종과 소수인종의 경험이 다르고 불평등했습니다. 하나의 계급이나 하나의 성별만으로 모든 억압을 설명하기 힘들어지자 진보주의의 물길은 다시 여러갈래로 세분화되었습니다.
계급에서 성별로 이동했던 물길은 이제 인종,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장애,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가 새로운 언어적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억압은 공장이나 가족이라는 거대 구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진리와 지식, 언어와 '정상성'의 범주 속에도 깊이 내재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2. 진리와 언어를 의심한 해체주의
초기의 진보주의는 이성과 과학, 역사의 선형적 진보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근대적 확신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인간이 보편적 이성을 통해 하나의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특정한 시대와 서구 권력의 산물이 아닐까 의심한 것입니다. 과학과 합리성,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존의 모든 기준이 권력을 가진 다수가 만들어낸 통제 장치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은 언어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대상을 '정상'이라 부르고 다른 대상을 '비정상'이라 부르는 행위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회 중심에 둘 사람과 치료·교정·배제의 대상으로 삼을 사람을 나누는 권력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정한 통찰이 담겨 있었습니다. 언어 속에 오랜 편견이 숨어 있을 수 있고, 특정 표현이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를 순전한 권력관계로 보는 시각이 극단화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주장의 참과 거짓, 논증의 타당성보다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과 위치'가 먼저 평가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정체성 정치와 피해 서열화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서는 발언자의 위치성(Positionality)이 핵심 자격으로 부상했습니다. "당신은 그 집단에 속해보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를 이해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가 팽배해졌습니다. 반대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의 발언은 그 정체성 위치 덕분에 검증을 면제받는 도덕적 권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 더해지면서 억압의 축은 더 미세하게 분해되었습니다. 성별,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장애 등이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경험을 포착하겠다는 취지였으나, 이것이 정치적 분류체계로 작동하자 "누가 더 주변부에 있는가", "누가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가"를 계산하는 피해 서열 정치가 벌어졌습니다.
이제 정치의 기본 단위는 보편적 권리를 지닌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여러 구조적 특권과 피해 점수의 합으로 산출되는 '정체성 집단'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구체적인 행위와 인품으로 평가받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위치성에 의해 도덕적 등급이 매겨지게 되었습니다.
4. 새로운 적: 정상성과 일상적 상식
마르크스주의에서 적이 자본가였고 페미니즘에서 가부장제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정체성 정치에서 적은 훨씬 더 추상적이고 광범위해졌습니다. '정상성, 보편성, 객관성, 다수성' 그 자체가 의심과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정상이라고 보는 생각, 보편적 인권과 법 앞의 평등을 주장하는 태도, 객관적 증거와 절차를 요구하는 관습조차도 '기득권의 지배 담론'을 재생산하는 행위로 지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악의적인 차별 의도가 없는 평범한 사람도 기존의 상식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구조적 가해자'로 몰릴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의도보다 '영향과 심리적 불쾌감'이 책임을 가르는 기준이 되면서, 사소한 말 한마디가 거대한 구조적 악(인종주의, 성차별 등)과 연결되는 '미세공격(Microaggression)'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일상적 실수가 정치적 죄가 되고, 감정 보호와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 의견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검열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정당화되었습니다.
5. 결론: 해체 끝에 지켜야 할 공통의 규범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 사회의 보편적 기준 뒤에 숨어 있던 편견을 드러내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보편적 기준을 권력의 산물로 해체해버린 결과, 정작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할 때 무엇을 가지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할지 공통의 척도마저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기준이 해체된 자리에 남는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오직 피해자의 도덕적 권위를 내세운 새로운 집단적 권력투쟁뿐입니다.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법 앞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법치주의마저 지배의 담론으로 해체해 버린다면, 역설적으로 약자를 보호할 문명적 울타리 자체가 파괴됩니다.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것은 과거의 모든 부당한 언어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없이 동일한 사실과 증거, 예측 가능한 법적 절차 아래에서 말하고 반론할 수 있는 '공통의 규범과 토론의 공간'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에 맞서 이 공통의 절차와 규칙을 지켜내는 것—이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를 지키는 보수주의의 역할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리트리버는 공존의 규칙 자체를 부수려는 늑대와도 함께 살 수 있을까요? 마지막 글에서 그 답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리즈] 보수주의는 산처럼 남고, 진보주의는 물처럼 흐른다
- [1편] 보수주의자는 왜 헤게모니를 원하지 않는가
- [2편]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적을 만들었는가
- [3편] 사람이 넘쳐나던 시대의 사상
- [4편] 그람시는 왜 공장보다 학교를 보았는가
- [5편] 페미니즘은 어떻게 사생활을 정치화했는가
- [6편]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적을 만들었는가 (현재 글)
- [7편] 리트리버는 늑대와 함께 살 수 있는가
참고문헌
-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Pantheon Books, 1980.
- Jean-Franç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 Kimberlé Crenshaw, “Mapping the Margins: Intersectionality, Identity Politics, and Violence Against Women of Color”, Stanford Law Review 43(6), 1991.
- Helen Pluckrose·James Lindsay, Cynical Theories: How Activist Scholarship Made Everything about Race, Gender, and Identity—and Why This Harms Everybody, Pitchstone Publishing,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