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일부 노동조합은 오랫동안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회사가 우선 채용하도록 요구해 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문이나 정치적 과장이 아닙니다. 고용노동부는 2022년 100인 이상 사업장의 단체협약 1,057개를 조사하여 63개에서 위법한 우선·특별채용 조항을 확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58개는 정년퇴직자, 장기근속자, 업무 외 질병을 겪은 사람 또는 직원의 직계가족을 채용하도록 한 조항이었고, 나머지 5개는 노동조합이나 직원이 추천한 사람을 채용하는 조항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2019년에 정년퇴직자 자녀 우선채용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금속노조도 2023년 산재 노동자 유족에 대한 특별채용을 제외하고,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의 가족을 우선채용하는 조항을 수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미 상당 부분 폐지되거나 사문화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이 남긴 질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자기 자녀에게는 일자리를 물려주려 했을까요?
산재 유족채용과 자녀 우선채용은 다릅니다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배우자나 자녀를 특별채용하는 제도와, 정년퇴직자 또는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채용하는 제도는 성격이 다릅니다.
산재 사망자의 유족채용은 노동으로 인해 생계부양자를 잃은 가족을 보호하고 보상하는 제도입니다. 대법원도 2020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자녀를 특별채용하도록 한 단체협약 조항이 사회질서에 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정년을 정상적으로 마친 노동자나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채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가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자녀의 직무 능력과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의 근속연수는 부모의 임금, 퇴직금, 연금 또는 포상으로 보상할 문제이지, 자녀의 채용 자격으로 이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부 노동조합은 부모의 노동을 자녀의 취업권으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동조건 개선이 아닙니다. 일자리를 가족 안에서 승계할 수 있는 권리로 취급한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는 먼저 어떤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녀의 취업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를 돕고 싶다는 감정과, 회사에 자기 자녀를 우선채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후자의 요구가 나오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감정이 존재해야 합니다.
내가 평생 이 회사를 위해 고생했으니, 회사는 적어도 내 자식 하나쯤 책임져야 한다.
이 감정 안에서는 부모의 희생과 자녀의 취업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회사에서 자신이 겪은 고생을 자녀의 안정된 직업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회사에서 오래 일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게 보상을 요구할 근거는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녀가 다른 지원자보다 먼저 채용되어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공로가 자녀에게 상속되는 순간, 일자리는 공개된 사회적 기회가 아니라 집안의 재산처럼 변합니다.
자기 자녀의 고통은 보이지만 다른 청년의 고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 우선채용 요구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내집단에 대한 연민입니다.
조합원은 자기 자녀가 취업하지 못해 고생하는 모습을 직접 봅니다. 동료 조합원의 자녀가 취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가까이에서 듣습니다. 그들의 불안과 좌절은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반면 조합원 자녀의 우선채용으로 기회를 잃는 외부 청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청년에게도 부모가 있고, 생계가 있으며, 오랜 준비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합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조합원과 개인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그의 손실은 통계로만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연민은 안으로 흐르고 비용은 밖으로 밀려납니다.
조합원 자녀의 취업은 노동자의 권리로 표현되지만, 그 권리를 위해 탈락해야 하는 외부 청년의 기회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과 조합 내부의 사람에게만 적용됩니다.
사적 욕망이 집단적 권리로 번역됩니다
“내 자식을 취업시키고 싶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전혀 다른 말처럼 들립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희생에 보답해야 합니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장에 기여했으므로 그 가족도 보호받아야 합니다.
장기근속자의 자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노동 존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욕망은 노동자의 권리로 바뀝니다. 자기 자녀에게 특혜를 달라는 요구가 노동 존중, 사회적 책임, 노사 상생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표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노동자의 자녀에게 출생과 혈연을 이유로 채용 우선권을 주는 것은 여전히 특혜입니다. 회사와 노동조합이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특혜가 공정해지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한국 좌파 노동운동의 특징 하나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적 요구를 사적인 것으로 남겨두기보다 집단적 권리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개인의 욕망을 노조의 요구로 만들고, 노사의 합의를 통해 단체협약에 넣으면 그것이 정당한 권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을 만들었다고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좌파적 사회운동에서는 법과 제도를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합니다.
물론 법과 제도는 필요합니다. 노동시간, 산업안전, 최저임금, 부당해고 문제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법이나 규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정의의 증거로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
원래 불공정한 요구라도 단체협약에 넣으면 정당한 권리가 될까요?
회사가 동의하고 노동조합이 찬성하면 외부 지원자를 차별해도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규칙은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지만, 특권을 고착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분제와 인종차별도 한때는 법과 제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의 존재가 아니라 그 규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입니다.
모든 회사가 직원 자녀를 우선채용한다면 좋은 직장은 부모의 직장에 따라 대물림됩니다. 노동자의 자녀는 노동자가 되고, 관리자의 자녀는 관리자가 되며, 전문직의 자녀는 전문직이 됩니다.
그것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직업 신분제입니다.
왜 보수주의자들은 같은 요구를 잘 하지 않을까요
보수주의자도 자기 자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차이를 가족애의 크기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차이는 자기 가족을 돕고 싶은 감정과 공적 제도의 원칙을 얼마나 분리하느냐에 있습니다.
보수주의적 사고에서는 가족에 대한 책임은 사적 영역에 속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조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의 채용은 별도의 공적 절차입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채용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적 절차를 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됩니다.
보수주의자는 모든 경우에 공사를 철저히 구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수주의자도 연고주의와 부패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보수주의에는 인간의 욕망과 편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공적 절차를 개인의 선의보다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에서는 객관적이기 어렵습니다. 자기 자녀가 관련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좋은 제도는 부모의 애정이나 노동자의 희생감정을 채용의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자녀를 돕고 싶은 마음은 인정하되,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공적 권리로 변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것입니다.
감정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화를 잘 내거나 눈물을 많이 흘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구체적인 고통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반 원칙을 예외적으로 적용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자기 자녀가 취업하지 못하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불공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우선채용되어 다른 청년이 탈락하는 것은 추상적인 문제로 느껴집니다.
감정은 가까운 대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당사자는 자신이 특혜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무시당한 노동자의 정당한 몫을 되찾는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감정의 위험한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면서 더 큰 특혜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조국 사태가 불러온 분노도 같은 지점에 있었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준 이유도 비슷합니다.
문제는 단순히 부모가 딸을 의학전문대학원에 보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의 성공을 바랍니다.
문제는 공정과 평등을 강조해 온 정치인이 자기 자녀의 입시에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대법원은 2024년 12월 자녀 입시비리와 감찰 무마 등의 혐의로 조국 전 장관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습니다. 확정된 혐의에는 사문서 위조 및 행사, 업무방해, 청탁금지법 위반 등이 포함됐습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한 정치인의 위선으로만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돕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공적 경쟁의 규칙을 강조하던 사람이 자기 자녀의 문제가 되자 그 원칙을 분리해 적용했다면, 그 배경에는 가족을 향한 강한 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내면을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행동에서 추론한 해석입니다. 다만 노동조합의 자녀 우선채용과 조국 사태는 하나의 공통된 질문을 던집니다.
왜 보편적 평등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 가족의 문제가 되면 보편적 원칙을 쉽게 포기할까요?
가족주의를 없앤 것이 아니라 정치화했을 뿐입니다
한국의 좌파는 보수주의를 흔히 가족주의적이라고 비판해 왔습니다.
가족 중심의 복지, 가부장적 질서, 혈연과 연고를 중시하는 문화를 낡은 것으로 봅니다. 개인을 가족으로부터 해방하고 국가와 사회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조합원 자녀 우선채용이라는 현상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족주의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의 이익을 노동권과 사회정의의 언어로 정치화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족주의자는 자기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줍니다. 노동조합의 가족주의는 회사의 일자리를 자녀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둘 다 부모가 가진 자원을 자녀에게 이전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차이는 후자가 그것을 사적 상속이 아니라 집단적 권리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탈가족주의가 아닙니다. 가족주의가 정치적 권리의 언어를 입은 것입니다.
정의가 안으로만 흐를 때
사람이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어디까지 흐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자기 자녀가 불이익을 받을 때만 공정을 말하고, 자기 자녀가 특혜를 받을 때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조합원 자녀의 취업은 걱정하면서 그 때문에 탈락하는 외부 청년의 취업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노동자 연대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외부 청년 역시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이며, 때로는 조합원 자녀보다 더 가난하고 더 불리한 환경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 우선채용은 한국 좌파가 공정의 의미를 몰라서 나온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부모의 근속과 자녀의 능력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출생과 혈연에 따라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이 평등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는 점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와 동료의 자녀를 보호하려는 감정이 그 원칙보다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개인적 욕망으로 인정하는 대신 노동자의 권리로 바꾸어 제도화하려 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적인 정의와 사적인 애착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좌파의 정의가 언제나 사회 전체를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매우 따뜻하게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자기 가족과 자기 집단 안으로만 흐릅니다.
그 정의의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는 밖에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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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단체협약 실태조사 결과 발표 및 시정조치 계획.” 보도자료, 2022년 10월.
-
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6다248998 전원합의체 판결.
-
대법원 2024. 12. 12. 선고 2024도2439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