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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브레이스: 보수주의는 이기심을 포장하는 철학인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보수주의는 이기심에 고상한 명분을 주는 작업'이라는 비판을 다루며, 시장의 부작용과 의존효과에 대한 통찰을 인정하는 한편 상대의 동기를 이기심으로 단정 짓는 도덕적 오만과 온정주의적 엘리트주의(프리드먼, 스크루턴, 솔로, 해링턴)의 한계를 분석합니다.

갤브레이스: 보수주의는 이기심을 포장하는 철학인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보수주의 비판과 도덕적 동기 공격에 대한 비판적 평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통찰과 도덕적 오만

하버드대학교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보수주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The modern conservative is engaged in one of man’s oldest exercises in moral philosophy; that is, the search for a superior moral justification for selfishness.”

현대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도덕철학적 작업 가운데 하나, 즉 이기심에 더 고상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종사한다는 뜻입니다.

갤브레이스는 2002년 인터뷰에서도 이 문장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는 이어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빈곤의 인격 형성 효과를 설교한다고 비꼬았습니다. 정확한 최초 출전은 자료마다 다르게 제시되지만, 이 문장이 갤브레이스의 보수주의관을 대표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문장은 재치 있고 공격적입니다. 보수주의자가 자유와 책임, 재산권과 작은 정부를 말하더라도, 그 밑바닥에는 결국 자기 재산을 지키고 세금을 덜 내려는 욕망이 있다는 판정입니다.

감세는 부자를 위한 것입니다. 복지 확대에 대한 반대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싫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입니다.

보수주의의 모든 논거를 ‘이기심의 도덕적 포장’이라는 한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갤브레이스의 뛰어난 문장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수주의자를 어떤 인간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드러냅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주장을 반박하기 전에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정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려 한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 민주당 계열의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였고, 정부 자문과 외교관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시장경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대기업의 권력과 광고, 공공재 부족을 정부 정책으로 교정하려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풍요한 사회》는 전후 미국의 독특한 불균형을 지적했습니다.

개인의 집에는 자동차와 가전제품이 늘어나지만 학교와 공원, 대중교통과 도시환경은 낙후되어 있습니다. 민간 소비는 풍요로운데 공공영역은 빈곤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시장은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을 풍부하게 공급합니다. 그러나 치안과 도로, 깨끗한 환경처럼 개인이 혼자 구매하기 어려운 공공재는 충분히 공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성공하여 풍요를 만들어낸 뒤 새롭게 나타난 문제를 보았습니다.


갤브레이스가 정확하게 본 것

갤브레이스의 첫 번째 공헌은 현실의 시장이 교과서적인 완전경쟁시장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거대기업은 가격과 생산, 기술개발과 광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기업은 소비자가 이미 원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공급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상품을 만든 뒤 광고와 브랜드를 통해 그 상품을 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갤브레이스는 이러한 현상을 ‘의존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생산이 소비자의 욕구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욕구도 생산과 광고에 의존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오늘날에도 광고와 소비자 주권, 디지털 플랫폼의 영향력을 논의할 때 계속 인용됩니다.

두 번째 공헌은 대기업 내부의 권력을 분석한 것입니다.

현대의 대기업은 소유주 한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닙니다. 경영자와 기술자, 법률가와 기획자 등 전문조직이 실제 의사결정을 담당합니다. 갤브레이스는 이 집단을 ‘테크노스트럭처’라고 불렀습니다.

기업은 단기적 이윤만이 아니라 조직의 성장과 안정, 경영진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기업을 개인 사업가의 이윤 추구만으로 설명해서는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세 번째 공헌은 민간 소비가 늘어나는 것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개인은 좋은 자동차를 살 수 있지만 혼자서 안전한 도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집 안은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지만 대기오염과 하천을 혼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갤브레이스가 제기한 문제는 실재합니다.

그는 경제학이 놓치고 있던 사회적 현상을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현상을 설명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정말 이기심을 포장합니까

일부 보수주의자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감세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부자도 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의 능력과 도덕적 우월성의 결과로 생각하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갤브레이스의 풍자는 그런 위선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그러나 일부 보수주의자의 이기적인 동기로 보수주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재산권을 옹호하는 이유는 자신이 부자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재산권은 평범한 시민도 국가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자신의 집과 저축, 사업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개인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훨씬 더 의존하게 됩니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이유도 세금을 내기 싫어서만은 아닙니다.

정부 역시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정치인과 관료도 자신의 권력과 예산, 조직을 확대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복지정책을 비판하는 이유도 가난한 사람을 돕기 싫어서만은 아닙니다.

정책이 장기적으로 의존성을 만들거나 노동의 유인을 약화시키는지,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원이 전달되는지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경험적으로 검토해야 할 주장이라는 뜻입니다.

갤브레이스의 경구는 그 검토가 시작되기 전에 논쟁을 끝냅니다. 보수주의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그 주장의 숨은 동기가 이기심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동기를 공격하면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책이 틀렸다는 사실과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판단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자가 감세를 주장한다고 해서 감세가 반드시 나쁜 정책인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증세를 지지한다고 해서 증세가 자동으로 좋은 정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책은 동기뿐 아니라 결과로 평가해야 합니다.

세율 변화가 투자와 고용, 세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야 합니다. 복지제도가 빈곤과 자립에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도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동기를 이기심으로 규정하면 실증적 논쟁이 불필요해집니다.

이 방식은 반대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지지층과 권력을 늘리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관료는 자신의 조직과 예산을 확대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회를 계몽하겠다는 지식인은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이 커지는 체제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보주의 전체를 ‘권력욕의 도덕적 포장’이라고 부른다면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갤브레이스는 보수주의자에게 바로 그러한 방식의 판정을 내렸습니다.


스크루턴이 본 것은 평범한 사람에 대한 경멸이었습니다

로저 스크루턴은 갤브레이스의 소비사회 비판에서 미국 지식인의 독특한 경멸을 발견했습니다.

평범한 시민은 교외에 집을 사고 자동차와 텔레비전, 냉장고와 세탁기를 구입했습니다. 교육받은 엘리트의 눈에는 그들의 소비와 취향이 조잡하고 상업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의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소수의 상류층만 누리던 재산과 편의가 일반 시민에게 확대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스크루턴이 보기에 갤브레이스는 대중을 직접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욕구는 진정한 욕구가 아니라 기업과 광고가 만들어낸 욕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갤브레이스와 같은 지식인이 소비자보다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더 잘 알게 됩니다.

갤브레이스는 시민이 선택한 자동차와 가전제품은 광고의 결과로 의심했지만, 자신이 선호한 학교와 공원, 문화시설과 공공서비스는 더 진정한 필요로 취급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욕망의 등급을 정하는 것입니까?


소비자의 욕구는 가짜이고 전문가의 욕구는 진짜입니까

인간의 욕구는 대부분 사회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동차와 옷을 원하는 욕구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책과 미술관, 음악회와 공원을 좋아하는 취향도 교육과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원하는 욕구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면, 좋은 도서관을 원하는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광고가 만들었기 때문에 천박하고 후자는 지식인이 권장하기 때문에 고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기원만이 아닙니다.

그 욕구를 충족했을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봐야 합니다.

세탁기와 냉장고, 자동차와 에어컨은 모두 상업적으로 광고된 상품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육체노동과 시간을 줄이고, 식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며, 이동과 생활의 자유를 확대했습니다.

광고가 욕구를 자극했다는 사실이 상품의 실제 편익까지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공공사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익한 것도 아닙니다.

이용자가 거의 없는 시설과 과도한 행정조직,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정된 사업은 민간의 과소비와 마찬가지로 자원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민간 소비는 언제나 천박하고 공공소비는 언제나 고상하다는 구분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의 비판

시민보다 전문가의 취향을 우월하게 보았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갤브레이스의 사상에서 온정주의적 엘리트주의를 보았습니다.

시장에서 시민은 자신의 돈으로 상품을 선택합니다. 전문가가 보기에 불필요하거나 저급한 상품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판단과 비용으로 이루어지는 선택입니다.

정부가 자원을 배분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치인과 관료, 전문가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결정하고 그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시킵니다.

프리드먼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소비자가 광고의 영향을 받는다면, 정치인과 관료는 정치적 선전과 조직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습니까?

기업은 소비자가 구매하지 않으면 손실을 입습니다. 정부사업은 시민이 직접 선택하지 않아도 세금으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습니다.

프리드먼은 갤브레이스가 기업과 소비사회의 권력은 예민하게 보면서 정부와 전문가의 권력은 지나치게 신뢰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반론이 모든 시장실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점과 정보 비대칭, 중독성 상품과 아동 대상 광고처럼 개인의 선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기업을 감시하겠다는 정부와 시민의 욕구를 교정하겠다는 전문가도 감시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버트 솔로의 비판

경제학이라기보다 강력한 사회평론이었습니다

갤브레이스에 대한 중요한 비판은 보수주의 경제학자에게서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보적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도 《새로운 산업국가》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솔로는 갤브레이스가 거대기업의 내부구조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당시 경제학이 대기업의 실제 권력과 조직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갤브레이스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분석은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갤브레이스는 대기업이 경쟁시장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전문경영인과 기술관료가 기업을 지배하며, 소비자의 욕구와 시장까지 관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산업별 비교와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 자료, 이론을 검증할 체계적인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는 이 책을 전문적인 경제분석보다는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할 만한 사회평론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이에 직접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쟁은 갤브레이스 경제학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현상을 포착하고 기억에 남는 개념을 만드는 데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설명과 입증된 일반이론은 다릅니다.

갤브레이스의 문장은 강했지만, 그 문장만큼 증거가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기업은 정말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습니까

갤브레이스는 거대기업이 경쟁에서 벗어나 시장과 소비자를 계획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산업사는 대기업도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압도적인 지위를 가졌던 자동차·철강·전자기업은 해외 경쟁과 기술 변화에 밀려났습니다.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고 기존 기업이 쇠퇴하거나 사라졌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기업의 규모와 조직력이 경쟁을 억제하는 힘은 잘 보았지만, 기술혁신과 국제경쟁, 기업가정신이 기존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힘은 과소평가했습니다.

《새로운 산업국가》 출간 50년 후의 평가에서도, 갤브레이스가 예상한 수준으로 대기업이 미국 경제와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기업은 사용자 데이터와 광고, 검색과 유통망을 결합하여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소비자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어떤 상품과 정보가 보이는지도 통제합니다.

따라서 갤브레이스의 진단이 완전히 틀렸다기보다, 제조업 중심의 거대기업에 지나치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의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의 예측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해링턴의 비판

풍요를 말하면서 빈곤을 너무 빨리 주변화했습니다

갤브레이스에 대한 비판은 왼쪽에서도 나왔습니다.

갤브레이스는 미국의 빈곤이 과거처럼 사회 전체를 뒤덮은 대규모 현상이 아니라, 일부 지역과 집단에 남아 있는 주변적 문제에 가까워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회비평가 마이클 해링턴은 《또 하나의 미국》에서 풍요로운 중산층 사회의 시야에서 사라진 대규모 빈곤을 지적했습니다.

농촌 빈곤층과 노인, 비숙련 노동자와 소수집단 등 수천만 명이 여전히 가난 속에 살고 있지만, 중산층이 그들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비평에서도 갤브레이스가 대중적 빈곤을 지나치게 빨리 과거의 문제로 취급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비판은 갤브레이스에게 뼈아픕니다.

그는 풍요한 소비사회의 과잉을 지적했지만, 아직 그 풍요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규모는 과소평가했습니다.

민간의 소비가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기 전에, 기본적인 소비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더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의 풍요를 비판하는 데 집중하다가, 그 풍요의 바깥에 남은 빈곤을 충분히 보지 못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자신이 비판한 기득권 밖에 있었습니까

갤브레이스는 하버드 교수였고, 대통령의 자문역과 외교관을 지냈으며, 미국 사회에서 높은 명성과 영향력을 누렸습니다.

그의 기득권 비판은 검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비판을 통해 더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이 그의 주장을 틀리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기득권 내부에 있는 사람도 기득권을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사회의 ‘통념’을 전체주의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비슷하게 묘사한다면 중요한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식 교리를 거부하면 직업과 자유, 때로는 생명을 잃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미국의 기업과 정부, 보수주의를 조롱하면서도 하버드의 지위와 출판의 자유, 공직과 명예를 유지했습니다.

사회적 통념의 압력과 국가의 강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완전히 폐쇄된 체제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기심은 보수주의자에게만 존재합니까

갤브레이스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이기심에 고상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는 이기심에서 자유롭습니까?

정치인은 공익을 말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관료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직과 예산을 늘릴 수 있습니다.

지식인은 시민을 계몽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평범한 사람의 판단보다 높은 위치에 놓을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비조합원과 신규 노동자의 진입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기업가의 이익은 돈과 재산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인과 지식인의 이익은 권력과 지위, 명성과 도덕적 우월감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경제적 욕망만이 이기심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싶은 욕망도 인간의 오래된 욕망입니다.

갤브레이스의 문장은 보수주의자의 위선을 폭로하는 동시에 진보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이고, 진보주의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구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나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이기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보수주의는 기업가가 특별히 선하다고 믿는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업가와 정치인, 관료와 학자, 운동가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권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시키려 합니다.

재산권과 시장, 법치와 권력분립, 지방자치와 시민단체는 인간이 선하다고 믿어서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게 만든 제도입니다.

정부가 항상 현명하고 선하다면 작은 정부를 주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문가가 시민보다 언제나 더 나은 판단을 내린다면 개인의 선택을 보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도 실패하고 전문가도 틀립니다.

보수주의가 모든 복지와 규제, 공공재 공급을 반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장실패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정부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부 개입에도 비용과 부작용, 관료제의 자기확장과 정치적 오용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갤브레이스는 시장의 실패를 날카롭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전문가의 실패에는 같은 정도의 의심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위대한 경제학자였습니까

갤브레이스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대기업과 광고, 소비욕망과 공공재 부족이라는 문제를 일반 독자에게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제시했습니다.

그가 만든 개념은 경제학을 넘어 정치와 사회비평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현대 주류경제학의 핵심 모형으로 남지 못했습니다.

‘테크노스트럭처’와 ‘의존효과’, ‘통념’ 같은 개념은 사회를 바라보는 데 도움을 주지만, 어떻게 측정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이론이 틀렸다고 판정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엄밀한 경제모형을 만든 학자라기보다 현실을 새롭게 보게 만든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비평가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장점은 발견과 표현에 있었습니다.

약점은 검증과 예측에 있었습니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무시하던 문제를 알아보았지만, 그것을 일반이론으로 입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론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보수주의 비판은 뛰어난 문장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문장이 반드시 공정한 문장은 아닙니다.

일부 보수주의자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자유와 책임의 언어로 포장한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재산권과 시장, 작은 정부와 개인책임을 지지하는 모든 이유를 이기심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재산권은 부자만을 위한 권리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정부 개입을 경계하는 태도도 가난한 사람을 돕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부와 전문가도 실패하고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기업의 권력과 광고, 공공재 부족이라는 실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안정성과 소비자 조작 능력은 과대평가했고, 시장의 경쟁과 혁신은 과소평가했습니다.

소비자의 판단은 의심하면서 전문가와 정부의 판단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했습니다.

미국의 풍요를 비판하면서도 그 풍요에서 배제된 대규모 빈곤은 충분히 보지 못했습니다.

스크루턴은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의 소비를 내려다보는 지식인의 경멸을 발견했습니다.

프리드먼은 소비자보다 전문가의 취향을 우월하게 보는 온정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솔로는 그의 거대한 산업사회 이론에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해링턴은 그가 미국의 빈곤을 너무 빨리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들을 종합하면 갤브레이스의 위치는 분명해집니다.

갤브레이스는 다른 경제학자가 보지 못한 현실을 발견하는 데 뛰어났지만, 자신이 발견한 현실을 증명하는 데에는 그만큼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보수주의자의 주장을 논증으로 반박하기보다, 그 주장을 이기심의 도덕적 포장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장은 갤브레이스 자신에게도 되돌려질 수 있습니다.

공익을 주장하는 정치인과 관료, 지식인은 정말 이기심에서 자유롭습니까?

다른 사람의 소비를 천박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믿는 태도에는 권력욕이 없습니까?

갤브레이스가 보수주의자에게 던진 질문은 필요합니다.

다만 그 질문은 진보주의자와 갤브레이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시장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대학, 언론과 시민운동에도 존재합니다.

좋은 사회는 이기심이 없는 사람이 통치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누구의 이기심도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무제한의 권력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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