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는 보수였는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변, 국가주도 경제개발계획, 유신체제를 분석하며 그를 순수한 보수주의자보다 '국가주의적 근대화 혁명가'로 규정하되, 안보와 생존의 영역에서 경험으로 형성된 현실적 보수성의 의의와 로버트 콩퀘스트의 법칙을 고찰합니다.

박정희는 보수였는가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혁명적 특성과 국가안보의 경험적 보수성에 대한 정치철학적 고찰

박정희는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산업화를 이끌었고, 북한의 위협에 맞서 국가안보를 강화했으며,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을 공산권으로부터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박정희를 지지했다는 사실과 박정희 자신이 보수주의자였다는 판단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박정희를 엄밀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켜야 할 제도와 전통을 존중했던 정치인이라기보다, 국가의 목표를 정하고 사회 전체를 그 방향으로 동원한 혁명가이자 개발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박정희가 현실을 판단하는 방식, 특히 공산주의와 국가안보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는 보수주의자와 상당히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추상적인 정치철학을 공부해서 얻은 결론이라기보다 식민지와 해방, 좌우 대립, 여순사건, 한국전쟁이라는 경험을 통과하면서 형성된 현실 인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박정희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보수주의는 일반적으로 급격한 사회 개조를 경계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권력자가 세운 계획만으로 사회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고, 오랜 시간 형성된 제도와 관습을 함부로 파괴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박정희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와 거리가 멉니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정변을 통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은 반공과 자유우방과의 결속뿐 아니라 부패와 구악의 일소, 국민도의와 민족정기의 재건, 민생고 해결, 자주경제 건설을 내세웠습니다. 기존 제도를 보존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경제정책 역시 보수적인 자유방임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정부가 은행과 자본, 외환, 산업정책을 통제하고 특정 산업과 기업을 선택해 자원을 집중했습니다. 박정희 체제는 시장의 자율적인 진화를 기다리기보다 국가가 목표를 설정하고 관료와 기업, 노동력을 동원하는 개발국가였습니다. 학계에서 이를 ‘개발독재’ 또는 국가주도 산업화로 분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박정희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한 국가를 원했습니다. 국가가 산업을 육성하고, 교육을 확대하며, 농촌을 개조하고, 국민의 생활습관과 정신까지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고전적인 보수주의보다는 근대화주의, 국가주의, 개발주의에 가깝습니다.


유신체제는 보수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

박정희를 보수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유신체제입니다.

보수주의는 반드시 민주주의와 같은 뜻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권력자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고 제도와 절차, 권력의 분산을 중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유신체제를 보수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대통령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권력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권력을 제한할 법과 의회, 선거, 사법제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국가의 위기를 이유로 대통령의 권한을 극단적으로 강화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의 생존과 발전 방향을 가장 잘 안다는 확신이 제도적 견제보다 우선했습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 회의주의라기보다 권위주의적 확신에 가깝습니다.

박정희가 국가를 발전시켰다는 평가와 그가 헌정질서를 훼손했다는 평가는 동시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의 성과가 절차의 문제를 지우지는 않으며, 절차의 문제가 산업화의 성과를 자동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현실 인식은 보수적이었다

그렇다고 박정희와 보수주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정희가 공산주의와 북한을 판단한 방식은 보수주의적 현실주의와 상당히 가까웠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단순히 다른 경제이론이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로 보지 않았습니다. 무장조직과 독재국가, 선전과 침투, 군사력에 의해 움직이는 현실적 세력으로 이해했습니다.

1961년 혁명공약의 첫 번째 항목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는 것이었고, 다섯 번째 항목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이었던 것은 박정희 체제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처음부터 일관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 경력에는 일본군 장교 경험과 남로당 연루 전력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는 하나의 안정된 철학을 평생 유지한 인물이라기보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여러 체제와 이념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국 강한 반공주의자가 된 것은 책을 읽고 공산주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의 좌우 충돌과 군 내부의 남로당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획득하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의 강한 반공 인식이 1930~1940년대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연구도 존재합니다.

그에게 반공은 관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콩퀘스트의 법칙과 박정희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콩퀘스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콩퀘스트의 발언은 여러 형태로 전해집니다. 킹즐리 에이미스가 기록한 초기 표현은 “대체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동적이다”에 가까웠고, 이후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는 보수적이다”라는 형태로 널리 인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전문지식이 사람을 특정 정당의 지지자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를 깊이 알게 되면 현실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었을 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며, 선의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을 잘 모르는 사람은 교육제도를 전면 개혁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은 부자에게 돈을 거두어 나누면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평화를 선언하고 상대를 이해하면 적대관계가 해소될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분야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정희에게 그가 가장 잘 알았던 분야는 군대와 전쟁, 빈곤한 국가의 취약성, 공산주의 조직의 작동 방식이었습니다. 그 영역에서 그는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는 국가가 가난하면 독립을 지킬 수 없고, 군사력이 약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없으며, 상대가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다면 선의와 대화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군인의 결론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박정희는 콩퀘스트의 법칙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경제와 사회에서는 기존 질서를 급격히 해체하고 국가가 새로운 질서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보와 공산주의, 국가의 생존에 관해서는 경험을 통해 보수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박정희의 산업화도 보수주의였는가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을 보수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근면, 저축, 자립, 가족, 공동체,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보수적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책의 방법까지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사회의 자생적 발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자본과 인력을 특정 산업으로 집중시켰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의 생활양식과 의식까지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경제개발은 국가가 설계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거대한 사회공학적 사업이었습니다.

다만 박정희의 사회공학은 서구 진보주의의 사회공학과는 목표가 달랐습니다.

진보적 사회공학이 평등이나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박정희의 사회공학은 국가의 생존과 산업화, 빈곤 탈출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완성하려 하기보다 국민을 생산하고 저축하며 수출하는 산업인력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는 보수적 가치를 국가주의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려 한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박정희를 지지한 이유

그렇다면 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박정희를 강하게 지지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결과입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기의 한국은 가난했고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체제는 산업국가였고,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커졌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박정희의 권위주의보다 그가 지켜낸 국가와 건설한 산업기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보수주의는 서구의 보수주의와 출발점이 달랐습니다.

영국의 보수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의회와 법치, 귀족제, 교회와 관습을 지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에는 지켜야 할 안정된 제도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 자체가 새로 만들어졌고, 곧이어 전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한국 보수주의의 첫 번째 과제는 오래된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할 만한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박정희는 보수주의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국가를 건설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절차를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받은 것입니다.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보수적 교훈을 남긴 사람

박정희를 무조건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면 그의 권위주의와 국가주의, 혁명적 개발정책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를 단순한 독재자로만 규정하면 그가 왜 지금까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는 보수주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한된 정부나 권력 분립을 일관되게 존중하지 않았고, 사회의 자생적 질서보다 국가의 계획과 동원을 신뢰했습니다. 기존 헌정질서를 보존하기보다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변경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보수주의자라기보다 국가주의적 근대화 혁명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 즉 전쟁과 군대, 공산주의, 빈곤한 국가의 생존 문제에서는 보수주의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국가는 의지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평화는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가난한 국가는 자유도 지키기 어렵다.
상대의 선의를 확인하지 않은 채 무장부터 해제해서는 안 된다.
좋은 목적이 현실의 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것은 버크나 오크숏의 책에서 배운 보수주의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과 국가 붕괴의 위험 속에서 배운 경험적 보수주의였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를 평가할 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잘 알았던 국가안보와 생존의 영역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현실 인식이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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