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혁당 사건은 조작이었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의 북한 연계와 혁명노선, 중앙정보부의 불법구금·고문, 최근 재심 무죄 판결을 함께 살펴봅니다.

지하 혁명조직의 실체와 강압수사의 국가폭력을 함께 저울질하는 통혁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을 두고 한국 사회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간첩·혁명조직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설명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통혁당 핵심부에 북한과 연결된 비합법 혁명조직의 실체가 있었는지와, 중앙정보부가 수사 과정에서 주변 인물까지 확대해 불법구금·고문하고 허위자백을 받아냈는지는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조직의 실체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수사와 판결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국가폭력이 확인됐다고 해서 핵심 조직의 북한 연계와 혁명노선까지 자동으로 허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통혁당 사건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두 사실을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통혁당 사건이란 무엇인가

통혁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지하당 사건입니다. 정식 명칭은 통일혁명당 사건입니다.

중앙정보부는 김종태 등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북한과 연결되어 대한민국 안에 비밀 혁명조직을 만들고, 장기적으로 정부 전복과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당시 기록에는 관련자 158명과 김종태·이문규·김질락·정태묵 등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됐습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이었던 신영복도 사건에 연루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88년 가석방될 때까지 약 20년을 복역했습니다.

그러나 158명 모두가 같은 조직적 지위와 책임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핵심 공작원으로 지목된 사람, 외곽 모임에 참여한 사람, 핵심 인물의 지인이나 직장 동료였던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인혁당 사건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통혁당 사건은 이름이 비슷한 인민혁명당 사건과 자주 혼동됩니다.

  •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김종태·김질락·이문규·신영복 등이 연루된 사건입니다.
  • 인민혁명당 사건은 1964년 1차 사건과 1974년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나뉩니다.

특히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는 여덟 명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약 18시간 만에 처형됐고, 이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인혁당재건위 판결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통혁당 사건 전체의 결론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두 사건은 수사기관과 시대적 배경이 일부 겹치지만 피고인, 조직, 증거와 재심 경과가 서로 다릅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 사건으로 평가한다고 해서 통혁당 핵심부의 북한 접촉까지 함께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통혁당 핵심부에 실체가 있었다고 해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사법살인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통혁당은 어떤 조직이었나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당시 판결에 따르면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지원을 받아 남한 내부에 만든 비합법 지하당이었습니다.

공개 정당을 결성하기 전에 비밀조직을 구축하고 학생·지식인·노동자·군인 등을 포섭하며, 합법적인 사회단체와 연구모임을 외곽조직으로 활용해 반정부 운동을 확대하려 했다는 것이 수사기관의 설명이었습니다.

김종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기됐습니다. 김질락과 이문규 역시 북한과 접촉하고 남한 내부의 조직 건설에 관여한 핵심 인물로 기소됐습니다.

이 수사 발표의 세부 내용을 모두 검증된 사실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는 불법구금과 고문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피고인 진술도 어떤 조건에서 작성됐는지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혁당의 이념적 목표가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통혁당은 북한이 말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과 유사한 노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기존 체제를 대체할 혁명정당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김종태가 재판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발언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북한은 김종태 처형 뒤 그에게 영웅칭호와 훈장을 추서하고 평양의 전기기관차 공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북한의 사후 영웅화만으로 수사기관 발표의 모든 세부 사항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한이 김종태를 자신들의 남한혁명 사업과 관련된 인물로 공식 평가했다는 강한 정황은 됩니다.

따라서 핵심부의 목적만 놓고 보면 통혁당을 단순한 민주화운동 단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북한과 연결되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부정한 비합법 혁명조직 또는 반국가 지하조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주요 인물은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김종태

통혁당의 중심 인물로 지목됐습니다. 북한과 직접 연락하고 조직을 지휘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9년 처형됐습니다.

북한이 김종태를 대대적으로 추도하고 그의 이름을 기관과 교육시설에 사용한 사실은 그를 북한의 혁명사업과 연결된 인물로 평가했음을 보여줍니다.

김질락

통혁당의 핵심 간부로 기소됐습니다. 체포 뒤 수사기관에 조직 활동을 진술했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수기 《주암산》으로도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통제 아래 작성된 진술과 수기는 작성 조건과 강압 가능성을 고려하며 읽어야 합니다. 내용이 구체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사의 적법성과 진술의 임의성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이문규

김종태·김질락과 함께 핵심 인물로 기소되어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의 학창 시절 친구와 지인들까지 사건 수사가 확대됐다는 점에서 핵심 조직과 주변 연루자를 구분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신영복

신영복은 당시 현역 장교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통혁당 관련 조직에 참여한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약 20년을 복역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영복을 통혁당 전체를 지휘한 최고 책임자로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핵심부의 북한 연계와 전체 노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조직 활동을 했는지는 김종태 같은 직접 공작 혐의자와 구분해 살펴야 합니다.

통혁당 핵심부에 실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의 혐의가 같은 강도로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나

이 질문에는 하나의 답으로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핵심 조직의 실체와 개별 피고인에 대한 수사·판결을 나누어 판단해야 합니다.

핵심 조직의 실체

통혁당 중심부가 북한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비합법 지하조직을 운영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직의 혁명노선, 핵심 인물들의 북한 접촉 정황, 북한의 김종태 영웅화 등을 함께 보면 핵심부의 북한 연계와 체제 전환 목적에는 상당한 실체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만 여기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핵심부의 실체 가능성이지, 1968년 중앙정보부 발표 전체의 정확성이 아닙니다. 당시 수사기관이 발표한 조직 규모, 개별 인물의 지위, 진술 내용과 구체적인 행위는 별도의 증거를 통해 하나씩 검증해야 합니다.

수사 확대와 국가폭력

핵심 조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중앙정보부의 모든 수사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수사기관은 핵심 인물뿐 아니라 그들의 지인, 직장 동료, 학생모임과 독서모임 참가자까지 광범위하게 연행했습니다. 일부 관련자는 영장 없이 장기간 구금됐고 물고문·구타와 자백 강요를 당했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24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오병철이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불법구금, 고문·가혹행위와 자백 강요를 당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통혁당과 직접 관계가 희박했던 언론인 배다지에 대해서도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인정했습니다.

재심 판결도 주변부 수사와 후속 사건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 2021년 통혁당 산하 조직 활동 혐의로 처벌받았던 박경호에게 재심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 2022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복역했던 박성준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 2025년에는 이른바 통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두현과 박석주에게 재심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 2026년 1월에는 1974년 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강을성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 2026년 7월에는 약 20년을 복역한 오병철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판결들이 1968년 통혁당 핵심부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통혁당’이라는 이름 아래 처벌받은 모든 사람의 혐의가 신뢰할 만한 증거로 입증된 것은 아니며, 주변부와 후속 사건에서 허위자백과 과잉 기소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두 극단은 서로 다른 사실을 지웁니다

보수 진영은 통혁당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혁명조직으로 평가합니다. 핵심 조직의 목적과 북한 연계를 중심으로 보면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진보 진영은 박정희 정부의 고문·강압수사와 과잉 기소를 강조합니다. 이 역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과 여러 재심 무죄 판결로 확인되는 비판입니다.

문제는 한쪽 사실로 사건 전체를 설명할 때 생깁니다.

핵심 조직이 실재했다는 이유로 모든 피고인의 혐의와 고문수사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구금과 고문이 있었다는 이유로 통혁당 핵심부의 북한 연계와 혁명노선까지 허구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국가에 체제 전복을 시도한 조직을 수사할 권한이 있더라도 고문과 불법구금, 허위자백을 사용할 권한은 없습니다. 반대로 수사기관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수사 대상이 된 모든 조직이 민주화운동 단체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조직의 성격과 국가의 수사 방식은 각각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신영복을 평가할 때 왜 중요한가

통혁당 사건은 신영복의 생애와 사상을 평가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신영복은 훗날 인간관계, 연대, 성찰을 강조한 인문학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정치활동을 단순한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통혁당 사건이 발표된 1968년은 유신헌법이 제정된 1972년보다 4년 앞선 시기입니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투옥된 사건’으로만 설명하면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권위주의적이었다는 사실과 통혁당 핵심부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이 아닌 사회주의적 혁명노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영복 개인의 책임을 판단할 때는 다시 구분이 필요합니다. 그가 북한의 직접 지령을 받은 핵심 공작원이었는지, 핵심부의 대북 관계와 전체 노선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통혁당의 실체가 있었다고 해서 158명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영복의 20년 수감 생활과 훗날의 사상을 평가하는 일도 핵심 조직의 실체를 확인하는 문제와 구분해야 합니다.

조직의 실체와 국가폭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통혁당 사건은 단순한 간첩 조작 사건이라고만 부르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수사기관의 발표와 당시 판결을 모두 그대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핵심부에는 북한과 연결된 혁명적 지하조직의 실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혁당은 민주화운동 단체라기보다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부정한 반국가조직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사건 수사를 주변부까지 확대했고, 불법구금과 고문을 통해 직접적인 관련성이 희박한 사람에게도 중형을 부과했습니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재심 무죄 판결은 이 과잉 수사와 사법 실패가 추상적인 의혹이 아니라 실제 피해였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혁당 핵심부의 북한 연계와 반국가적 성격에는 상당한 실체가 있었지만, 중앙정보부는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까지 과도하게 확대해 처벌했고 불법구금과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조직의 실체와 국가폭력은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이 두 사실 가운데 하나를 없애면 통혁당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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