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자기편에게만 적용된 홍세화의 똘레랑스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소개한 똘레랑스가 정치적 반대자인 보수주의자에게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는지 살펴봅니다.

자기편만 관용의 울타리 안에 둔 채 정치적 상대를 밖에 세운 선택적 똘레랑스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똘레랑스’라는 말을 널리 알린 사람은 홍세화였다. 그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프랑스 사회를 소개하면서, 나와 다른 사상과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홍세화는 똘레랑스를 단순한 너그러움보다 "차이를 차이 그대로 용인하는 자세"라고 설명했다.

이 개념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정치적 반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다른 생각을 쉽게 배척하던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는 세련되고 민주적인 원칙처럼 보였다.

그러나 홍세화가 실제로 정치적 반대자에게도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는지는 의문이다.

관용의 대상에서 보수주의자를 제외하다

홍세화는 똘레랑스가 모든 주장과 행동을 무조건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불관용을 뜻하는 ‘앵똘레랑스’에는 단호히 맞서야 하며, 관용을 파괴하는 세력까지 관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폭력이나 억압, 타인의 권리 박탈까지 단순한 의견 차이로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앵똘레랑스에 해당하는가를 홍세화 자신이 지나치게 넓게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의 극우세력은 똘레랑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취지의 단서를 달았고, 현실 정치에서는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을 수구·기득권·사익추구 세력으로 규정했다.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한나라당을 두고 “99.9%가 사익추구집단”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 친일세력과 독재세력에 빌붙은 ‘가짜 보수’로 규정했다. 반면 노무현을 중심으로 모이는 세력은 공익을 추구하는 진정한 보수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논리에서는 자신이 인정하는 보수만 ‘진짜 보수’가 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수구·극우·사익추구 세력으로 분류되어 관용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똘레랑스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는 데는 관용이 필요하지 않다. 똘레랑스가 의미를 가지려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장, 불쾌하게 느끼는 가치관, 자신과 전혀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최소한 적용되어야 한다.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췄다.

남민전 참여자에게는 관대했던 시선

이 문제는 홍세화 자신의 정치적 이력과 함께 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홍세화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귀국하지 못하고 프랑스에 망명했다. 남민전의 정식 명칭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였다. 홍세화의 약력에서도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했다는 사실은 일관되게 확인된다.

남민전은 단순한 자유민주주의적 반유신 시민단체가 아니었다. 그 이름과 노선에서 드러나듯 대한민국의 정치체제 안에서 합법적인 정권교체만을 추구한 조직도 아니었다.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혁명을 지향하며 비합법 지하조직으로 활동한 급진적 정치조직이었다.

물론 유신체제의 억압과 수사 과정의 인권침해는 별도로 비판해야 한다. 남민전 관련자에게 고문이나 부당한 처벌이 있었다면 그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국가의 수사가 부당했다는 사실과 남민전의 정치적 목적이 자유민주주의적이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다.

홍세화는 자신이 참여했던 급진적 반체제운동에는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해주었다. 반면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려 했던 현실의 보수주의자에게는 친일·독재·사익추구라는 도덕적 규정을 쉽게 부여했다.

자기편의 급진주의는 시대적 저항으로 이해하면서, 상대편의 반공주의와 체제수호 의지는 수구성과 기득권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이야말로 홍세화의 똘레랑스가 가진 핵심적인 한계다.

‘불관용에는 불관용’이라는 편리한 예외

관용론에는 오래된 문제가 있다. 관용을 파괴하려는 세력까지 허용하면 관용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이른바 ‘관용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타인의 권리를 실제로 박탈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와, 단순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상대방을 불관용 세력으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할 의무가 사라진다.

상대는 더 이상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그에게 분노하고, 배제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행동까지 관용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홍세화는 똘레랑스를 “다른 것을 그대로 둔 채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보수세력 상당수를 수구·극우·사익추구 세력으로 분류했다.

결국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다른 생각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불관용 세력은 존중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은 불관용 세력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똘레랑스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정치적으로 가장 대립하는 상대에게는 그것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관용이라기보다 "관용의 대상을 자신이 선별하는 권력"에 가깝다.

진정한 똘레랑스는 불편한 상대에게 필요하다

홍세화가 사회적 약자와 이주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인 관심과 실천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장발장은행 활동과 외국인 수용자 지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약자에게 친절한 것과 정치적 반대자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똘레랑스는 선량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이 아니다. 나와 동등한 시민이지만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원칙이다.

따라서 진정한 똘레랑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때로는 불쾌하고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적용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보수주의자를 모두 친일·독재·기득권의 후예로 규정한 뒤 “진짜 보수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면, 현실의 보수주의자와 공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승인한 보수만을 보수로 인정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정치적 자격심사다.

똘레랑스가 정치적 무기가 될 때

한국에서 똘레랑스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원칙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보진영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도덕적 언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편의 과격함은 저항이고, 상대편의 방어는 억압이 된다. 자기편의 체제 전복적 이력은 시대의 아픔으로 이해하면서, 상대편의 체제수호 의지는 수구와 극우로 규정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똘레랑스는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편은 관용받을 자격이 있고 상대편은 그렇지 않다는 도덕적 우월감만 강화한다.

홍세화의 똘레랑스가 남긴 가장 큰 역설도 여기에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공존해야 한다는 말을 소개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가장 다른 생각을 가진 한국의 보수주의자에게는 충분한 관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홍세화가 말한 똘레랑스는 보편적인 원칙이라기보다, "자신이 인정하는 차이에는 관용을 베풀고 자신이 불관용이라고 규정한 차이는 배제하는 선택적 관용"에 가까웠다.

결국 똘레랑스의 진정한 시험은 자기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아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정치적 상대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충분한 답을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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