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대중 매체와 지식인들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환경을 듣고 차분히 대화하면 갈등의 대부분이 해소될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의 본질을 단순한 '오해'나 '공감 부족'으로 설명하는 순간, 정치가 다루는 가장 엄혹한 현실을 가리게 됩니다.
물론 정치에는 오해와 편견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그 정책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기 때문에 싸웁니다.
정치적 갈등의 본질: '오해'가 아닌 '결과와 권력의 충돌'
정치적 결정에는 비용과 편익, 권리와 자원의 재분배가 수반됩니다.
- 세금을 더 걷어 복지를 확장하려는 세력과 그 세금을 직접 부담해야 하는 납세자는 서로를 오해하지 않습니다.
- 해고 요건을 강화해 노동자를 보호하면 기업과 청년 구직자는 신규 채용이 위축될 가능성을 우려합니다.
- 규제가 강화되면 누군가는 안전을 보장받지만,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행동과 선택의 자유를 제한받습니다.
갈등은 정서의 충돌이기 전에 권리와 자원, 권한과 책임을 둘러싼 현실적 충돌입니다. 상대의 선한 의도를 이해하더라도 내가 부담할 세금과 규제가 사라지거나 국가권력의 위험이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면 동의할 것"이라는 엘리티즘과 계몽주의
정치적 갈등을 오해로만 설명하는 담론에는 "**상대방이 내 입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결국 동의할 것**"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가 빈곤과 차별의 비극을 제대로 인지하면 정부 개입에 찬성할 것이라 믿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가 시장의 유기적 생태계와 국가 관료제의 비효율을 깨달으면 정부 확대를 경계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제도 밖 약자의 고통을 먼저 보고, 다른 이는 제도의 과도한 확장이 초래할 재정 부담과 관료 권력을 더 경계합니다. 이는 무지의 차이가 아니라 우선시하는 위험과 가치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상대의 반대를 무지의 결과로만 취급하면 그는 자율적 시민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깨우치지 못한 자**"가 됩니다. 설득과 타협의 동등한 주체가 계몽과 교정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것입니다.
오바마의 사례: 가치관을 심리적 증상으로 읽을 때
버락 오바마는 통합을 약속했지만 임기 말 미국의 당파적 적대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 원인을 오바마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의회의 구조적 양극화와 공화당의 강경한 반대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다만 2008년 이른바 '총과 종교' 발언은 상대의 가치관을 경제적 상실감이 만든 심리적 반응으로 환원할 위험을 보여줍니다. 보수 유권자가 중시한 종교적 신념이나 총기 소유권을 독립된 가치 판단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증상으로 취급한다면, 통합의 언어는 오히려 반발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오바마케어를 둘러싼 갈등도 의료 사각지대와 국가권력의 한계 중 어느 위험을 더 중시할 것인가의 대립이었습니다. 상대의 우려를 무지나 탐욕으로만 설명해서는 이런 갈등을 풀 수 없습니다.
한국 정치의 현실: 오해가 아닌 실재하는 권력 재분배의 싸움
이러한 문제는 한국 정치에서도 반복됩니다. 정당들은 국가기관의 인사권, 수사권, 예산권과 입법권을 놓고 실제로 다툽니다.
- 적폐청산: 지지자들에게는 권력기관의 불법을 바로잡는 정의였지만, 반대파에게는 정치적·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상대 진영의 역사와 인맥, 정책 유산 전체를 범죄화하려는 권력투쟁으로 보였습니다.
- 검찰개혁: 지지자들에게는 검찰 권력의 민주적 통제였지만, 반대파에게는 수사권이 공수처나 경찰로 이동할 뿐 새로운 권력기관을 누가 장악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 재배치로 읽혔습니다.
갈등의 중요한 원인은 "**목표의 차이**"와 "**권력 이동의 실재성**"에 있습니다. 상대의 반대를 '역사의 잔재'나 '적폐'로 치부할수록 정치는 타협이 불가능한 전쟁터가 됩니다.
결론: 정치는 화해(和解)가 아니라 권력을 제한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
정치의 목적은 모든 국민을 하나의 올바른 가치관이나 역사관으로 통합하는 '화해'가 아닙니다. 모두가 동일한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불가능하며, 정치가 하나의 올바른 방향만을 강요할수록 이에 동의하지 않는 수많은 시민들은 공동체 밖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정치의 참된 목적은 서로 다른 목적과 가치를 가진 시민들이 상대를 파멸시키지 않고 평화롭게 경쟁하도록 권력을 제한하고 절차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용은 "내가 당신을 이해했으니 당신도 동의하라"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했음에도 당신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정치는 상대를 이해한 뒤 마침내 사랑하게 되는 동화가 아닙니다. 서로를 이해하고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제거하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갈 제도를 만드는 고된 작업입니다.
참고문헌
- Berlin, Isaiah. “Two Concepts of Liberty.” In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긴장, 서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의 충돌을 다룬 고전적 논문.
- Rawls, John. Political Liber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서로 다른 포괄적 가치관을 가진 시민들이 하나의 민주적 질서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설명한 저서.
- Mouffe, Chantal. Agonistics: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 Verso, 2013. 정치적 갈등을 제거하기보다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 제도적 경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의를 제시한 저서.
- Pew Research Center. “Partisanship and Political Animosity in 2016.” 2016. 미국 양당 지지자 사이의 적대감과 부정적 인식이 어떻게 심화되었는지 보여주는 조사.
- Voteview. “The Polarization of the Congressional Parties.” 미 의회 표결 자료와 DW-NOMINATE 지수를 이용해 장기적인 정당 양극화를 측정한 자료.
- Obama, Barack. “Remarks at the Associated Press Annual Luncheon.” 2008. 이른바 ‘총과 종교’ 발언의 취지와 표현에 대해 오바마가 직접 해명한 연설.
- National Federation of Independent Business v. Sebelius, 567 U.S. 519 (2012). 오바마케어의 개인 의무가입 조항과 연방정부 권한을 둘러싼 헌법적 쟁점을 다룬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
- 유승익.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평가와 과제」. 『법과사회』 68, 2021, 101–125쪽. 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 한국 수사권 재배치의 내용과 과제를 검토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