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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 셸리는 자유를 노래했고, 메리 셸리는 책임을 보았다


퍼시 비시 셸리의 낭만주의적 해방 선언이 남긴 파괴적 현실과, 남편의 무책임한 자유가 낳은 폐허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창조와 책임'의 고전을 빚어낸 메리 셸리의 보수적 성찰을 대조합니다.

퍼시 셸리는 자유를 노래했고, 메리 셸리는 책임을 보았다

퍼시 비시 셸리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퍼시 비시 셸리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서풍에 부쳐」는 낭만주의 시의 걸작이고, 그의 언어에는 자유와 혁명, 해방과 미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퍼시 셸리를 보면 이야기는 훨씬 불편해집니다.

그는 자유를 말했지만, 그 자유가 남긴 결과를 충분히 책임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낡은 제도와 도덕을 비판했지만, 자신이 만든 관계의 파괴와 상처 앞에서는 놀랄 만큼 무책임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메리 셸리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퍼시 셸리가 자유의 시인이었다면, 메리 셸리는 책임의 소설가였습니다.

자유를 말한 남자의 무책임

퍼시 셸리의 삶은 낭만적 이상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기존 종교와 사회질서에 반항했고, 결혼 제도와 성도덕을 억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었고, 사랑도 관습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가 주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자유였다는 점입니다.

퍼시 셸리는 1811년 해리엇 웨스트브룩과 결혼했습니다. 해리엇은 아직 매우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퍼시는 메리 고드윈, 즉 훗날의 메리 셸리와 사랑에 빠졌고, 해리엇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메리와 함께 떠났습니다. 이후 해리엇은 1816년 세펀타인 호수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퍼시와 별거 중이었고,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이 사건은 퍼시 셸리의 삶에서 지워질 수 없는 그림자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자살을 다른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퍼시가 자유와 사랑을 말하는 동안, 그 자유의 뒤편에 버려진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해리엇의 죽음 이후 퍼시는 메리와 결혼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결혼 제도 자체를 비판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리엇과의 자녀 양육권을 확보하고, 윌리엄 고드윈과의 관계를 수습하기 위해 그는 결국 결혼 제도를 다시 이용했습니다. 법원은 이후 퍼시가 해리엇을 버렸고 무신론적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 등으로, 해리엇과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그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는 제도를 부정했지만, 필요할 때는 제도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주장했지만, 그 자유가 낳은 아이들과 여성의 현실 앞에서는 충분히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보편주의적 교육과 고결한 아동 존중 철학을 노래했으면서도 본인의 자녀 다섯 명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낸 장 자크 루소와 리버럴의 자기기만의 모순 역시 같은 궤를 그리며 반복됩니다.)

돈과 신용으로부터의 자유? 만성적 채무와 도피

퍼시 셸리의 무책임은 인간관계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적 제약과 자본주의적 소유 관념을 초월한 낭만적 삶을 노래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만성적인 빚독촉과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라는 배경을 믿고, 훗날 상속받을 유산을 담보로 잡고 고금리 사채(사후 지불 채권)를 무절제하게 끌어다 썼습니다. 사상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사적 소유를 비판했으나, 실제 삶은 미래의 재산을 저당 잡아 연명하는 파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셸리 부부가 영국과 유럽 전역을 끊임없이 떠돌며 거처를 옮겨야 했던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채권자들과 빚쟁이들의 체포 영장을 피해 도망 다니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모순적인 것은, 그가 장인이자 급진 사상가였던 윌리엄 고드윈의 끊임없는 금전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무리한 빚을 추가로 내어 돈을 대주었다는 점입니다. 사상적으로는 아름다운 정신적 공동체를 이야기했으나, 현실의 경제적 삶은 빚더미 위에 세워진 신기루였습니다. 그리고 이 난장판 속에서 빚을 변제하고 생활고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실존적 고통 역시 고스란히 메리 셸리의 몫이었습니다.

퍼시 셸리 주변의 여성들

퍼시 셸리의 문제는 해리엇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의 삶도 그의 무책임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메리는 퍼시와 함께 도피했을 때 아직 10대였습니다. 그녀는 급진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여성권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었고, 퍼시에게는 이상적인 지적 동반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메리는 퍼시와 함께 유럽을 떠돌며 경제적 불안, 가족과의 갈등, 사회적 비난, 반복되는 출산과 아이들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메리와 퍼시의 자녀들 중 여러 아이가 어린 나이에 죽었고, 최종적으로 성인이 된 자녀는 퍼시 플로렌스 한 명뿐이었습니다.

메리의 의붓자매 클레어 클레어몬트도 이 세계 안에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퍼시와 메리의 생활권 안에 있었고, 바이런과의 관계에서 딸 알레그라를 낳았습니다. 셸리 부부의 집에는 클레어와 아이까지 함께 얽혔고, 이 관계는 메리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퍼시는 이 모든 복잡한 관계를 자유로운 사상의 실험처럼 받아들였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상처를 감당한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더 불편한 사건도 있습니다. 나폴리에서 엘레나 애들레이드 셸리라는 아이가 퍼시의 딸로 등록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정확한 출생 배경은 아직도 논쟁적입니다. 퍼시의 혼외자였는지, 입양하려던 아이였는지, 다른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아이가 셸리 가족 안으로 실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삶을 보면 퍼시 셸리는 단순히 “자유로운 영혼”으로만 미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언어로 해방을 노래했지만, 현실에서는 관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능력이 약했습니다. 그의 자유는 찬란했지만, 그 자유의 비용은 주변 사람들이 치렀습니다.

메리 셸리는 그 폐허를 보았다

메리 셸리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퍼시 셸리의 세계 안에 있었습니다. 자유연애, 급진주의, 낭만주의, 반권위주의, 천재들의 우정과 실험적 삶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세계에 완전히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유의 언어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남기는 폐허도 보았습니다.

버려진 아내가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책임지지 못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남성 천재들이 자유를 말하는 동안,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과 상실과 평판의 부담을 떠안는 현실이 있었습니다. 메리 셸리는 바로 그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했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죄는 생명을 만든 것 자체가 아닙니다. 더 큰 죄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버린 것입니다. 그는 창조했지만 돌보지 않았고, 생명을 만들었지만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능력을 가졌지만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퍼시 셸리의 삶과 무섭게 겹칩니다. 퍼시도 새로운 삶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사랑을 만들었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고, 새로운 도덕을 실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충분히 책임지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실험실에서만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무책임한 자유가 낳은 모든 버려진 존재들의 상징입니다.

페미니즘의 상징으로만 읽기에는 너무 크다

오늘날 메리 셸리는 페미니즘의 상징처럼 소비되기도 합니다. 그럴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녀는 여성 지식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던 시대에 『프랑켄슈타인』을 썼고, 남성 중심 문학 세계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겼습니다. 어머니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다는 점도 후대 여성주의가 그녀를 자기 계보 안에 넣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메리 셸리를 단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만 읽으면 그녀의 깊이는 줄어듭니다. 그녀가 본 것은 여성 억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본 것은 자유와 책임의 불균형이었습니다. 특히 남성 지식인들이 자유를 말하면서 그 자유의 현실적 비용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떠넘기는 구조였습니다.

그녀는 남성 과학자의 오만만을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창조자의 방기를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이면서, 사랑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이며, 가족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메리 셸리의 질문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인간은 만들 수 있습니다. 제도를 부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실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조작할 수도 있고, 인공지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가. 바로 이 질문이 『프랑켄슈타인』의 핵심입니다.

보수적 성격을 가진 성장형 인간

메리 셸리는 급진주의자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의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를 배웠지만, 그 언어가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무책임으로 변하는지도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메리 셸리에게는 일종의 보수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성은 정치적 당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쉽게 믿지 않고, 이상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오래 바라보며, 자유보다 책임을 먼저 묻는 기질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완벽함을 신뢰하는 합리주의의 오만을 경계하고 인간의 한계와 제도적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적 시선에 관해서는 보수주의는 독립적인 세계관인가 에세이를 통해 더 자세한 맥락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퍼시 셸리는 감정과 이상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메리 셸리는 그 감정과 이상이 남긴 결과를 오래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퍼시가 불꽃이라면, 메리는 그 불꽃 뒤에 남은 재를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메리 셸리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고통을 단순한 원망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기 상처를 정치적 구호로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을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위대함입니다.

퍼시 셸리보다 메리 셸리가 더 현대적이다

퍼시 셸리의 「서풍에 부쳐」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주의 시대의 혁명적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반면 『프랑켄슈타인』은 시대를 넘어섰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문명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가. 기술은 윤리 없이 전진해도 되는가. 창조자는 피조물을 버릴 권리가 있는가. 인간이 만든 괴물은 정말 괴물인가, 아니면 버려진 책임의 귀환인가.

이 질문은 산업혁명 시대에도 유효했고, 핵무기 시대에도 유효했으며,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시대에는 더 강력해졌습니다. 퍼시 셸리는 한 시대의 바람을 노래했지만, 메리 셸리는 미래의 공포를 발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퍼시 셸리보다 훨씬 현대적입니다. 퍼시 셸리는 자유의 언어를 남겼지만, 메리 셸리는 책임의 신화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여전히 그 신화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깊은 비극은, 메리 셸리가 살아생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문학적 신화를 창조했는지, 훗날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명성을 얻게 될지 결코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남편이 요절한 뒤, 시아버지는 그녀가 셸리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지 모른다는 이유로 남편의 전기나 자신의 소설에 '셸리'라는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나 남은 아들의 양육비 지원마저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메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지적 성취를 세상에 외치기보다, 그토록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퍼시 셸리의 유고 시집들을 편집하고 정리하여 그의 문학적 위상을 수호하는 고단한 편집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을 남성 천재들의 화려한 그늘에 가려진 채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그녀는, 1851년 쓸쓸히 눈을 감을 때까지 《프랑켄슈타인》이 훗날 퍼시 셸리의 낭만주의 시 전체를 압도하며 현대 문명 최고의 묵시록이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찬양해 달라고 울부짖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폐허를 치우고 책임을 다했을 뿐이며, 그 묵묵한 책임 자체가 그녀가 남긴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이었습니다.

결론

퍼시 셸리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책임한 이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말했지만, 그 자유가 남긴 여성과 아이들의 상처를 충분히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낭만주의의 아름다움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메리 셸리는 그 위험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유의 세계 한복판에 있었지만, 자유의 찬란함에만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버려진 존재, 죽은 아이, 책임지지 않는 창조자, 방기된 생명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현대 문명의 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퍼시 셸리가 자유의 시인이었다면, 메리 셸리는 책임의 소설가였습니다. 퍼시 셸리는 아름다운 바람을 노래했지만, 메리 셸리는 그 바람이 지나간 뒤 남겨진 폐허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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