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는 노력한 사람인가, 운 좋은 사람인가
돈을 덜 중시하자는 말 뒤에 있는 성공관의 차이
현대 진보주의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가 돈을 너무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돈보다 삶의 질, 공동체, 평등, 환경, 존엄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돈이 인간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가 돈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돈을 덜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와 성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를 개인의 노력, 절약, 위험 감수, 기업가정신의 결과로 보기보다 운, 구조, 제도, 특권, 시스템의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보수주의자는 대체로 부를 노력의 결과로 봅니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실패를 견디고, 긴 시간 동안 책임을 진 사람이 부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의 도덕적 핵심을 노력과 책임에서 찾습니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부를 운과 구조의 결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학교, 좋은 동네, 인종과 계급의 특권, 공공 인프라, 역사적 불평등, 자본시장, 정치적 로비, 조작된 시스템이 부를 만든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는 부자는 단순히 열심히 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운 좋은 위치에서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돈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깊은 문제는 "성공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입니다.
미국식 성공 신화의 약화
미국에는 오래된 성공 신화가 있습니다. 흔히 “호레이쇼 앨저 신화”라고 부릅니다. 가난한 소년이 성실함, 근면, 절약, 정직, 용기를 통해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식 자수성가 신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신화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도 연결됩니다. 열심히 일하라. 낭비하지 말라. 교육을 받아라. 법을 지켜라.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면 결국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배경, 인종, 지역, 교육 기회, 경기 상황, 운은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식 성공 신화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한 가지 감각을 주었습니다. 내 삶은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노력과 선택은 의미가 있다는 감각입니다.
그런데 현대 진보주의 담론은 이 감각을 점점 약화시킵니다. 성공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운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더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위치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은 위험을 감수한 기업가가 아니라, 조작된 시스템의 수혜자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은 사회적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개인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평등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관점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모든 성공은 의심받고 모든 부는 도덕적 정당성을 잃습니다.
“혼자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이런 관점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 워런입니다. 그는 2011년에 “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된 사람도 도로, 경찰, 교육받은 노동자, 법질서, 사회적 인프라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누구도 완전히 혼자 성공하지 않습니다. 기업가는 도로를 이용합니다.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교육받은 직원을 고용합니다. 금융시스템을 활용합니다. 국가가 만든 제도와 인프라 없이 시장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다른 효과도 있습니다. 개인의 위험 감수와 선택이 뒤로 밀려납니다. 누군가는 집을 담보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창업했습니다. 누군가는 몇 년 동안 소득 없이 버텼습니다. 누군가는 실패를 감수했습니다. 누군가는 남들이 보지 못한 시장을 봤습니다.
“혼자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는 말은 사회적 조건을 상기시키는 데는 유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부자가 된 사람의 노력과 판단과 위험 감수는 희미해집니다. 성공은 개인의 성취라기보다 사회가 만들어준 기회를 운 좋게 차지한 결과가 됩니다.
“You didn’t build that”
버락 오바마의 2012년 발언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오바마는 성공한 기업가도 교사, 도로, 교량, 인터넷, 공공 연구, 사회적 인프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 발언은 맥락 논쟁이 있습니다. 오바마가 말한 “그것”은 사업 자체가 아니라 도로와 교량 같은 공공 인프라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 문장이 강하게 반발을 부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말은 미국식 자수성가 신화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기업가는 자기 사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밤을 새웠고, 돈을 빌렸고, 사람을 고용했고, 실패를 견뎠고, 시장에서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프라 설명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도덕적 소유권을 빼앗는 말처럼 들립니다.
오바마와 워런의 논리는 같습니다. 성공은 개인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사회가 함께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한 사람은 더 많이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이 주장은 재분배 논리로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의 도덕적 의미를 바꿉니다. 부자는 더 이상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조건을 더 많이 가져간 사람이 됩니다.
“부가 아니라 노동을 보상하라”
바이든 행정부도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백악관은 세금정책을 설명하면서 “부가 아니라 노동을 보상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산소득보다 근로소득을 더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정치적으로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와 노동을 분리한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미국식 성공관에서는 부가 노동의 결과일 수 있었습니다. 오래 일하고, 절약하고, 투자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을 키우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는 노동의 배신이 아니라 노동의 축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부가 아니라 노동을 보상하라”는 구호에서는 부와 노동이 서로 대립합니다. 노동은 선한 것이고, 부는 의심스러운 것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만, 부를 가진 사람은 마치 노동하지 않고 얻은 특권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물론 상속, 지대, 독점, 금융투기처럼 노동과 거리가 먼 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를 그런 식으로만 보면, 기업가의 위험 감수나 장기적 축적, 절약, 투자, 실패의 비용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조작된 경제”라는 언어
버니 샌더스는 이 관점을 가장 일관되게 정치언어로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경제를 반복해서 “조작된 경제”, 즉 rigged economy라고 부릅니다. 억만장자 계급이 경제와 정치를 장악했고,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표현은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실패감을 도덕적 분노로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게임이 조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선택을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시스템이 부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언어는 정치적으로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합니다. 세상이 완전히 조작되어 있다고 믿게 되면, 노력과 선택의 의미는 줄어듭니다. 성실함은 순진함이 되고, 절약은 미련함이 되고, 창업은 일부 특권층에게만 가능한 게임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는 부자도 다르게 보입니다. 부자는 위험을 감수한 사람이 아니라, 조작된 게임에서 이긴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마이클 무어와 “호레이쇼 앨저는 죽어야 한다”
마이클 무어는 이 흐름을 대중문화적으로 표현한 인물입니다. 그는 《Dude, Where’s My Country?》에서 “Horatio Alger Must Die”라는 장을 통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미국식 자수성가 신화을 공격했습니다.
그에게 호레이쇼 앨저식 이야기는 매혹적인 신화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마치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성공할 것처럼 믿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이 소수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어는 2004년에는 “Slacker Uprising Tour”라는 이름으로 대학가를 돌기도 했습니다. slacker는 방향 없이 빈둥대는 젊은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어는 이 단어를 조롱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과거 미국 문화에서 청년에게 요구된 미덕은 근면, 자립, 책임, 야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slacker”라는 말이 반문화적 정치정체성으로 등장합니다. 열심히 일해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순진한 신화로 조롱받고, 시스템에 대한 냉소가 더 지적인 태도처럼 여겨집니다.
한국의 “노력 신화” 비판
한국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호레이쇼 앨저 신화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난해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살면 계층상승이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이 믿음은 빠르게 약해졌습니다. “금수저·흙수저”, “헬조선”, “N포세대”, “노력 신화” 같은 말이 등장했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 같은 감각을 공유합니다. 개인의 노력보다 부모의 자산, 계층, 지역, 교육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감각입니다.
이 역시 현실의 일부를 반영합니다. 자산격차는 커졌고, 집값은 올랐고, 좋은 교육은 더 비싸졌고, 계층이동의 통로는 좁아졌습니다. 그러니 노력만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노력 신화가 과장되었다고 해서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계층구조가 강하다고 해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담론이 지나치게 구조 쪽으로 기울면, 개인의 행위성은 약해지고 사회 전체에 대한 냉소만 커집니다.
돈을 덜 중시하자는 말의 역설
여기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돈을 덜 중시하자는 사람들이 부와 성공을 운과 구조의 결과로 설명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을 도덕적으로 낮추려면, 돈을 얻은 사람의 도덕적 지위도 낮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자가 성실함, 절약, 위험 감수, 창의성, 기업가정신의 결과라면, 부는 어느 정도 도덕적 정당성을 갖습니다. 부자는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그의 성취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반대로 부가 운, 특권, 시스템, 조작된 게임의 결과라면,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우연히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혹은 불공정한 구조의 수혜자입니다. 그러면 그의 부를 더 많이 세금으로 걷거나, 규제하거나,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쉬워집니다.
그래서 부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설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 부자가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이라면, 그의 부는 어느 정도 보호받아야 합니다.
- 부자가 운 좋게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부는 사회가 회수해도 됩니다.
이 차이가 진보와 보수의 깊은 차이입니다.
결론: 부를 보는 눈이 다르다
보수주의자는 부를 노력과 위험 감수의 결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책임진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그는 실패할 위험을 감수했고, 선택의 결과를 떠안았고, 시장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진보주의자는 부를 운과 구조의 결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노력한 사람이기보다 좋은 위치에서 출발한 사람, 사회적 인프라를 활용한 사람, 조작된 시스템의 수혜자로 이해됩니다.
물론 현실은 둘 중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부에는 노력도 있고 운도 있습니다. 절약도 있고 상속도 있습니다. 기업가정신도 있고 특권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입니다.
현대 진보주의 담론의 특징은 부의 원천에서 개인의 노력과 위험 감수를 축소하고, 사회적 조건과 운을 확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덜 중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돈을 가진 사람은 더 강하게 의심합니다. 부자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운 좋은 사람입니다. 기업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공공 인프라의 수혜자입니다. 자수성가는 신화이고, 시스템은 조작되어 있습니다.
이 관점은 불평등을 비판하는 데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사회의 근면 윤리와 개인의 행위성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성공이 운이라면 노력은 순진한 것이 됩니다. 모든 부가 구조의 결과라면 책임은 사라집니다. 모든 게임이 조작되어 있다면, 남는 것은 냉소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부자는 노력한 사람인가, 운 좋은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돈과 성공을 바라보는 정치적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