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암살자〉 논란의 본질은 박정희가 아니라 역사수정주의다


〈암살자〉 논란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수정하는 데 필요한 증거와 창작의 자유, 정치적 취향에 따른 역사 왜곡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암살자〉 논란의 본질은 박정희가 아니라 역사수정주의다

〈암살자〉 논란이 나오면 곧바로 박정희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박정희와 관련해서 해석하면서, 박정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유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만 집중하면 정작 논쟁의 핵심은 흐려집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가 아닙니다. 역사를 증거가 아니라 정치적 취향에 따라 고쳐 써도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박정희가 독재자였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에게 아무 범죄나 덮어씌워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하려는 인물에 대한 반감이 사실을 대신하는 순간, 그것은 역사 비판보다 역사 조작에 가까워집니다.

의문이 있다고 아무 이야기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고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 사건에 의문이 있다면 조사하면 됩니다. 새로운 문서가 나오면 공개하고, 새로운 탄도 자료가 있다면 검증해야 합니다. 기존 수사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확인된다면 당연히 역사적 설명도 수정해야 합니다. 역사는 그렇게 증거를 검토하고 기존의 설명을 고쳐가며 발전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와 “내가 원하는 설명이 사실이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의문 몇 개를 늘어놓은 다음 그 빈자리에 정치적 상상력을 채워 넣는 것은 역사 연구가 아닙니다. 기존 설명에 빈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다른 설명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존의 사건 구조를 뒤집고, 국가권력이 자국 대통령 부인의 죽음에 관여했을 가능성까지 암시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 정도 주장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역사적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일 뿐입니다.

유럽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왜 그렇게 취급했는가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단순히 “기존 역사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학계와 언론에서 사실상 퇴출에 가까운 취급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의 의견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엄청난 문서와 증언과 물적 증거가 축적된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목적에 맞추어 다시 쓰려 했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도 자신들을 역사수정주의자라고 부르며 기존 역사를 다시 검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다시 검토하는 것과 역사를 다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새로운 증거에 따라 기존 설명을 수정하는 것이 역사 연구라면, 결론부터 정해놓고 그 결론에 맞는 조각만 주워 모으는 것은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홀로코스트와 육영수 사건은 다르다”는 반론

물론 홀로코스트와 육영수 피격 사건은 다릅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수행한 대량학살입니다. 그러나 두 사건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육영수 피격 사건은 그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이상합니다. 국가원수 암살은 전혀 가벼운 범죄가 아닙니다.

특히 다른 국가나 정치세력이 외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면, 그것은 개인 한 사람을 죽이는 데 그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권을 흔들고 국가 간 보복을 촉발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 발의 총알 때문에 수천 명, 수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국가원수 암살은 국제정치에서 극도로 위험한 행위입니다.

그 위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암살 사건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습니다. 그는 재위 중인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그의 죽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사이의 위기를 촉발했고, 최후통첩과 선전포고, 동맹국들의 개입이 이어지면서 세계대전으로 번졌습니다. (뉴질랜드 문화유산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물론 암살 하나만으로 전쟁의 모든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강대국의 경쟁과 군비 확장, 민족주의와 동맹 체제가 이미 긴장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암살이 위험합니다. 한 사람을 겨냥한 폭력이 국가 간 충돌의 방아쇠가 되어 수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원수 암살을 단지 피해자 한 사람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 정부 역사 자료: 1914년 7월 위기)

이것이 국가원수 암살의 무게입니다. 따라서 1974년 사건의 성격이나 배후를 뒤집는 문제 역시 단순한 가십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건의 책임 주체를 바꾼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통째로 다시 쓰는 일이므로,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남침과 국가폭력의 책임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북한 정권의 책임은 남한의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권입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 발발 당일 채택한 결의 제82호에서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로 판단하고, 즉각적인 전투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남침의 불법성은 단순한 정치적 비난이 아니라 당시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문제였습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 제82호)

그 과정 역시 평화적인 통일이나 정당한 정치적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남한을 공격하고, 무력으로 대한민국의 정치적 질서를 뒤집으려 했습니다.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침략과 살상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국가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유엔 헌장의 원칙에 비추어 보아도, 남침을 단지 서로 다른 통일 구상의 충돌처럼 설명하는 것은 침략의 책임을 흐리는 일입니다. (유엔 헌장)

전쟁의 피해는 사망자와 부상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피란과 가족의 생이별, 전후 분단의 고착은 수많은 사람에게 평생의 고통을 남겼습니다. 국가기록원도 한국전쟁 이후 남북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1,000만 이산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생존자 수를 뜻하는 정확한 집계라기보다 전쟁과 분단이 남긴 이산의 규모를 나타내는 역사적 표현입니다. 북한의 남침은 이처럼 천만 이산가족으로 불려온 비극을 낳고 분단을 고착시킨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이산가족상봉)

대한민국의 법질서에서도 북한의 지위를 단순히 보통의 외국 정부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대법원은 북한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가진다고 판단해 왔습니다. 따라서 북한 정권의 불법성을 비판할 때에는 이러한 국내법적 성격과 남침·테러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협상의 상대라는 사실이 침략과 폭력의 책임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대법원 2003도758 판결)

문세광 사건도 이러한 대남 폭력과 테러의 역사 속에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문세광이 조총련 간부 김호룡에게 포섭되어 북한과 조총련으로부터 암살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의 설명은 이 발표와 함께 일본 측이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세광 사건의 배후를 논할 때에는 당시 수사와 외교 문서를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국가기록원: 문세광 사건 관련 한일 관계)

이후 북한 정권이 저지른 대남 테러의 대표적인 사례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입니다. 아웅산 테러에서는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 공작원들의 폭탄 공격으로 대한민국의 외교사절과 수행원 17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민간 여객기에 설치한 폭탄으로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 인사를 겨냥한 공격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까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킨 사건들입니다. (외교부: 아웅산 테러 희생자 추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칼기 폭파사건)

문세광 사건을 이런 사건들과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남한의 지도자와 시민을 겨냥한 정치적 폭력의 문제를 개인에 대한 호불호로 축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일과 북한 정권의 테러 책임을 인정하는 일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문세광 사건의 구체적인 배후를 자동으로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각 사건의 책임은 각 사건의 증거로 판단하되, 남한 정권에 대한 반감을 이유로 북한의 폭력과 테러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영화니까 괜찮다고?

여기서 흔히 나오는 반론은 “영화는 영화 아닌가”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영화는 창작물이므로 가상의 인물을 만들거나 대사를 지어낼 수도 있고, 실제 사건 사이에 허구를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라는 말이 만능 면허증은 아닙니다. 실제 인물의 이름을 쓰고 실제 사건과 피해자를 등장시키면서 사건의 핵심 인과관계를 바꿔놓았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비판도 받아야 합니다.

창작의 자유에는 창작할 자유가 있고, 관객에게는 그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할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를 금지하거나 검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작자는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꾸었다면 그에 대한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화니까 허구다”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피할 수 있다면, 역사적 실존 인물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도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에 대한 비판까지 이 한마디로 막으려는 태도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상한 것은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만약 누군가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사실은 일본 경찰의 밀정이었다는 이야기를 근거 없이 만들어냈다고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은 과연 “영화니까 창작의 자유”라고 말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이나 5·18을 전혀 다른 가해자와 원인으로 재구성한 영화가 나왔을 때도, 그것을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박정희가 등장하면 갑자기 기준이 달라집니다. 박정희는 독재자였으니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도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바로 이 태도가 문제라고 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인물을 다룰 때에도 같은 기준을 지켜야 합니다.

박정희가 싫으면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더 엄격하게 비판하면 됩니다. 유신도 있고, 긴급조치도 있고, 중앙정보부도 있으니 비판할 역사적 사실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굳이 입증되지 않은 이야기까지 만들어야 합니까.

역사수정주의는 방향에 따라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권력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고쳐 쓰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싫어하는 권력자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고쳐 쓰는 것에는 훨씬 관대한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정치적 목적에 맞추어 바꾼다는 점에서는 그것도 똑같은 역사수정주의입니다.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만드는 것이 역사 왜곡이라면, 독립운동가를 친일파로 만드는 것도 역사 왜곡입니다. 독재자를 민주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잘못이라면, 독재자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까지 만들어내는 것도 잘못입니다. 거짓말은 방향이 바뀐다고 진실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입니다

〈암살자〉 논란에서 중요한 질문은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었느냐도, 육영수 여사를 얼마나 좋아하느냐도 아닙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기존 역사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증거가 나왔다면 역사를 바꾸면 됩니다. 저는 그런 역사수정을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란 원래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는 없고 새로운 이야기만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것을 영화적 상상력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역사적 가능성인 것처럼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역사수정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그렇게 경계했던 이유도 결국 같습니다.

역사는 불편하더라도 증거를 따라가야 합니다. 정치적 필요에 맞추어 증거를 따라오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박정희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이 원칙은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역사는 내 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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