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경계를 허무는 언어는 누구에게 허용되는가


친밀감과 소속감의 범위, 국가 간 경쟁의 현실, 인간 공격성의 감소, 그리고 좌파적 경계 해체 언어가 왜 지배욕과 결합할 때 위험해지는지 살펴봅니다.

경계를 허무는 언어는 누구에게 허용되는가

우리는 흔히 인간을 보편적 존재로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모든 생명은 보호받아야 하며, 고통 앞에서 국경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분명한 도덕적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우리'로 느끼는가. 누구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누구의 고통을 나의 공동체 안의 일처럼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경계를 허물자는 말을 누가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라고 느끼는 범위는 곧 책임의 범위와 연결됩니다. 누가 실제로 보호하는가. 누가 폭력을 막고, 누가 계약을 집행하며, 누가 세금을 걷고, 누가 재판을 열고, 누가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가. 현대 세계에서 이 친밀감과 책임의 가장 안정적인 단위는 대체로 국가입니다. 인간은 인류 전체 안에서 태어나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법과 경찰, 법원과 행정, 학교와 병원, 군대와 세금 제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존엄은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엄을 매일 지켜 주는 장치는 대부분 국가 단위로 작동합니다.

좌파는 자주 이 경계를 허물자고 말합니다. 국경을 넘어 더 넓은 인류를 보자고 말하고, 시민권의 경계를 좁게 보지 말자고 말하며, 약자의 고통 앞에서 국가의 선을 낮추자고 말합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따뜻합니다. 그러나 경계를 허무는 언어는 아무에게나 허용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격성이 낮고, 지배욕이 억제되어 있으며, 상대를 이용하지 않을 사람에게나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1. 국가는 폭력을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게 만든다

국가 안에서는 분쟁이 생겨도 심판관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폭행하면 경찰이 개입합니다. 계약을 어기면 법원이 판단합니다. 권력이 남용되면 헌법과 절차가 그것을 다툴 수 있게 합니다. 물론 모든 국가는 불완전합니다. 법은 때로 부당하고, 경찰은 때로 실패하며, 법원도 늘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 안에는 폭력을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적 장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국가는 단지 깃발이나 영토가 아닙니다. 국가는 폭력의 사적 사용을 줄이고, 복수를 재판으로 바꾸며, 약탈을 과세와 행정으로 바꾸고, 개인의 힘겨루기를 법적 절차로 바꾸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같은 법의 보호와 구속 아래 있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막스 베버가 국가를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체로 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한다는 말은 국가가 마음대로 폭력을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적 폭력을 줄이고, 폭력을 공적 절차와 책임 아래 묶는다는 뜻입니다. 문명은 폭력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폭력이 제도 안으로 들어간 상태에 가깝습니다.

2.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최종 심판관이 없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로 나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제법과 조약, 유엔과 외교가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내법처럼 즉각적이고 강제적인 보호 장치는 아닙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할 때, 세계 경찰이 곧장 출동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바로 이 냉혹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국가 안에서는 법이 폭력을 대체합니다. 그러나 국가 밖에서는 힘과 동맹, 억지력과 국익이 여전히 질서의 마지막 언어가 됩니다. 국제질서가 아무리 세련되어져도, 그것은 국내 질서처럼 촘촘한 보호망이 아닙니다. 국경 밖의 세계에는 도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 도덕을 집행할 최종 권위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국경은 단지 배타적 감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우리'로 인식하고, 그 인식 위에서 법과 세금과 보호 의무를 조직하는 범위입니다. 국경은 법이 실제로 미치는 범위와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구분하는 선이기도 합니다. 국경 안에서는 국가가 시민에게 보호를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경 밖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수준의 보호를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 한계를 부정하면 도덕적으로는 넓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 제도는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3. 국제정치는 아직 마키아벨리와 한비자의 세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냉정해져야 합니다. 개인의 도덕과 국제정치의 조건은 같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선의를 베푸는 것과 한 국가가 스스로 국경을 낮추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개인은 실패해도 자기 책임으로 끝날 수 있지만, 국가는 실패하면 시민 전체의 안전과 재산, 법적 질서가 흔들립니다.

국가와 국가가 경쟁하는 세계는 아직 마키아벨리와 한비자의 세계에 가깝습니다. 겉으로는 국제규범과 인권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각 국가는 자기 이익을 계산하고, 상대의 약점을 찾고, 내부 균열을 이용하려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선한 의지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고, 한비자는 인간과 권력을 순진하게 믿는 국가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국경은 도덕적 열등감 때문에 세워진 장벽이 아니라, 경쟁적 세계 속에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 장치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국경을 열거나, 자국민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 것은 고상한 도덕이 아니라 위험한 무책임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국가와 정치세력이 모두 순수한 선의로 행동한다면 경계를 낮추는 일은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정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국가는 이민 흐름을 압박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어떤 국가는 문화와 학술, 기업과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려 하며, 어떤 정치세력은 인도주의 언어를 이용해 상대 사회의 법적 방어선을 약화시키려 합니다.

국가는 자기 시민을 먼저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입니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먼저 돌본다고 해서 인류애가 없는 것이 아니듯, 국가는 자기 시민의 안전과 법적 질서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는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4. 인간은 덜 충동적으로 싸우는 방향으로 길들여졌다

여기서 인간 본성의 변화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은 과거보다 공격성이 낮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또 문명화되어 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특히 리처드 랭엄은 인간의 공격성을 반응적 공격성과 계획적 공격성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반응적 공격성은 모욕이나 위협에 즉각적으로 폭발하는 공격성입니다. 반면 계획적 공격성은 전쟁, 처벌, 암살, 조직적 폭력처럼 계산되고 준비된 공격성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전쟁과 학살, 정치적 탄압과 조직범죄를 보면 인간이 선해졌다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적 관계 속에서 즉각 주먹을 휘두르고, 모욕을 피로 갚고, 사소한 다툼을 살인으로 끝내는 경향은 장기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인간은 더 온순해졌지만, 동시에 더 조직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설입니다.

이 변화는 생물학적 진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법, 종교, 예절, 시장, 학교, 군대, 관료제, 도시 생활이 모두 인간의 충동을 길들였습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한 문명화 과정은 바로 이런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타인과 얽혀 살게 되었고, 그만큼 즉각적인 폭력과 노골적인 충동을 억제해야 했습니다. 인간은 갑자기 천사가 된 것이 아니라, 더 큰 사회 안에서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5. 국가가 커질 수 있었던 이유

국가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강한 국가가 먼저 인간을 억눌러 평화를 만든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인간이 어느 정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큰 국가도 가능해졌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고, 낯선 사람과 같은 도시에 살고, 얼굴도 모르는 동료 시민과 세금을 나누며, 직접 알지 못하는 병사와 경찰의 보호를 신뢰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대규모 국가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작은 부족 사회에서는 신뢰가 혈연과 얼굴에 묶입니다. 누구의 아들인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어떤 복수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모두가 압니다. 그러나 국가는 훨씬 더 추상적인 신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송금하고, 모르는 판사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모르는 경찰에게 신고하고, 모르는 군인의 경계 근무에 생명을 맡깁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상한 일이 현대 문명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공격성이 줄고, 자기통제가 늘고, 법적 절차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국가는 더 넓은 영역을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폭력의 단위가 개인과 가문에서 국가로 이동한 것입니다. 사적 복수가 줄어들수록 공적 재판이 강해졌고, 지역 우두머리의 폭력이 줄어들수록 중앙 국가의 법이 넓어졌습니다. 국가의 확장은 단지 정복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더 큰 질서 안에서 살 수 있게 된 심리적 변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6. 그러나 보호는 여전히 국가 단위로 작동한다

이 사실은 중요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더 넓은 공감 능력을 갖게 되었고, 더 많은 낯선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었으며, 국제적 인권 언어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진보입니다. 그러나 그 진보가 곧 국가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대인의 안전은 여전히 국가가 제공하는 법적 보호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학교에 다니고, 범죄 피해를 신고하고, 계약을 집행하고, 선거로 권력을 바꾸고, 복지 제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특정 국가의 제도 안에서입니다. 인류 전체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국가가 나를 보호합니다. 세계 시민이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세계 여권으로 경찰을 부르고 세계 법원으로 임대차 분쟁을 해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점을 잊으면 인도주의는 현실을 잃습니다. 우리는 국경 밖의 고통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국경 밖의 모든 고통을 국경 안의 시민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보호에는 비용이 있고, 법에는 관할이 있으며, 복지에는 부담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냉혹함이 아니라 책임의 언어입니다.

7. 경계는 문화 차단막이 아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경계가 필요하다는 말은 외부의 모든 문화를 막자는 뜻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 중국 문화의 일부가 들어오거나, 미국 사회에 남미 문화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 언어, 음악, 종교, 생활양식은 원래 이동합니다. 문명은 언제나 다른 문화와 접촉하면서 자랐습니다. 외부 문화를 모두 막아 순수한 내부를 보존하겠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자 개인을 문화적 위협으로만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미국에 남미 출신 이민자가 들어온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미국 문명의 붕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이민자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이동합니다. 그들의 문화는 때로 기존 사회를 더 풍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외부 문화나 외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불법 입국 문제도 단순히 문화 방어의 언어로만 다루면 논점이 흐려집니다. 불법 입국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남미 문화가 나빠서가 아니라, 법이 정한 절차와 시민권의 질서를 우회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누가 들어오고, 어떤 절차를 거쳐 머물며,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갖는지를 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화적 순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법치와 책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것은 닫힌 문화가 아니라 열린 질서입니다. 외부 문화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민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과 상호성, 공동체의 책임 능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막아야 할 것은 낯선 문화가 아니라, 경계를 해체해 놓고 그 혼란을 권력의 기회로 삼는 정치적 침투입니다.

중국 문화가 일부 들어오는 것과 중국 공산당식 영향력이 제도와 여론을 장악하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남미 문화가 미국 사회에 들어오는 것과, 불법 이주 흐름을 이용해 시민권과 복지, 선거와 치안의 경계를 흐리려는 정치 전략도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문화 교류일 수 있지만, 후자는 공동체의 방어선을 약화시키는 권력 기술이 될 수 있습니다.

8. 경계를 허무는 언어는 공격성이 낮은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여기서 이 글의 핵심 문제가 드러납니다. 경계를 허물자는 말은 언제나 선한 말처럼 들립니다. 더 넓게 사랑하자, 더 많이 받아들이자, 더 멀리 있는 사람까지 우리로 느끼자. 그러나 이런 말은 오직 공격성이 충분히 낮고 지배욕이 억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자기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상대의 권리를 존중하며, 법의 상호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경계 완화는 관용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욕이 강한 사람에게 같은 언어를 허용하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는 경계를 허물어 자유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방어선을 없앱니다. 법의 경계를 약화시키고, 시민권의 경계를 흐리며, 공동체의 책임 범위를 무한히 늘려 놓은 뒤, 그 혼란을 자신이 해석하고 배분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경계를 허무는 말은 그 순간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가 됩니다.

좌파적 정치 언어가 위험해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좌파는 자주 약자, 인류, 보편적 권리, 국경 없는 연대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세력이 실제로 권력욕과 도덕적 우월감, 상대를 교정하려는 충동을 강하게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공격성이 없는 사람의 연민과 지배욕이 강한 사람의 연민은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진짜 온순한 사람은 경계를 낮추더라도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경계를 낮춘 뒤 그 빈자리에 자신의 규칙을 세우려 합니다. 그는 기존 공동체의 법과 관습을 낡은 배제로 몰아붙이고, 자신이 말하는 보편 윤리를 새로운 심판 기준으로 세웁니다. 이렇게 되면 국경과 시민권을 낮추자는 말은 더 큰 자유가 아니라 더 큰 통제의 입구가 됩니다.

따라서 보수주의가 경계를 중시하는 이유는 단순히 낯선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 아직 지배욕과 공격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충분히 온순하고, 모든 정치세력이 권력을 절제하며, 모든 공동체가 상호성을 지킨다면 경계는 훨씬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가 아니라면 경계는 약자를 배제하는 벽이 아니라, 권력욕 강한 자가 선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장악하지 못하게 막는 방어선입니다.

결론: 보편적 연민과 구체적 보호 사이에서

현대인은 과거보다 더 많은 타인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낯선 사람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할 수 있고, 먼 나라의 재난을 보고 돕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덜 충동적이고 더 협력적인 존재로 변해 온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협력 능력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구체적인 보호 장치 위에서 자랐습니다.

국가는 인간의 보편적 존엄을 부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존엄을 실제로 보호 가능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문제는 인류를 사랑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누가, 어디까지, 어떤 제도로, 어떤 비용을 감당하며 보호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경계를 허물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로 공격성을 내려놓은 사람인지, 아니면 더 큰 지배를 위해 경계를 방해물로 여기는 사람인지입니다.

우리의 도덕은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라고 느끼는 범위도 과거보다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 능력은 여전히 경계를 가집니다. 그 경계를 인정할 때, 인도주의는 감상이 아니라 제도가 됩니다. 특히 마키아벨리와 한비자가 보았던 것처럼 권력은 빈틈을 찾고, 경쟁자는 약점을 이용하며, 국가는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타인의 계산 속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국경을 낮추는 일은 선한 마음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결정이 자국민의 법적 보호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는가입니다. 경계를 허무는 언어는 가장 온순한 사람에게서 나올 때조차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물며 권력욕이 강한 사람에게 그 언어를 넘겨주면, 인도주의는 쉽게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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