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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새는 왜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갔는가


《데미안》의 알을 부모의 세계에서 이소하는 성장의 문제로, 아브락사스를 공격성과 전쟁의 모순을 품은 상징으로 다시 읽으며, 신비주의가 답하지 못한 알 밖의 질서와 제도를 묻습니다.

깨진 알에서 나온 새가 닭 머리와 인간형 상체, 뱀 다리를 지닌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모습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만큼 한국에서 익숙한 성장소설도 드뭅니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다음 문장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부모의 기대와 학교의 규율, 사회의 통념을 깨고 자기 길을 찾으라는 격려로 읽혔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는 독립과 성장의 상징이 되었고, 《데미안》은 청소년에게 자기답게 살라고 말하는 소설이 되었습니다. 이 독법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에밀 싱클레어가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찾으려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지나치게 안전하게 읽었습니다. 유명한 문장 뒤에는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습니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새는 막연한 자유를 향해 날아가지 않습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의 성격을 함께 지닌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갑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합니다. 왜 성장하려는 인간에게 선한 세계만으로는 부족한가. 왜 부모의 세계를 떠나는 일이 선과 악의 구분을 깨뜨리는 문제로 표현되는가. 그리고 왜 소설의 마지막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등장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함께 놓으면 《데미안》의 구조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이 소설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자리 경쟁이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한 개체가 부모세대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자리를 찾는 이소(離巢)이고, 다른 하나는 집단이 자기 활동영역을 지키거나 확대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 충돌하는 전쟁입니다. 개인에게는 부모의 집을 떠나는 일이 성장이고, 집단에게는 다른 집단과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생존입니다. 규모는 다르지만 둘 다 제한된 자리와 활동영역을 둘러싼 경쟁입니다. 《데미안》에서 반복되는 선과 악의 문제는 이 경쟁에 필요한 공격성과 문명이 가르치는 도덕 사이의 충돌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아브락사스는 헤세가 만든 이름이 아니다

닭 머리와 인간형 상체, 뱀 다리를 지닌 아브락사스가 새겨진 고대 주술 보석

아브락사스 또는 아브라삭스라는 이름은 로마제국 시대의 종교와 주술 전통에 실제로 등장합니다. 고대 후기의 여러 주술 보석에서 아브락사스는 닭의 머리, 인간형의 상체, 뱀으로 된 두 다리를 지닌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브락사스를 제우스나 아폴론처럼 널리 공인된 하나의 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름과 형상은 영지주의, 점성술과 주술이 뒤섞인 고대 후기의 복잡한 종교 환경에서 여러 방식으로 사용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락사스가 헤세가 선과 악의 통합을 설명하기 위해 임의로 만든 이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헤세는 실제 고대 종교 전통에 존재했던 낯선 이름을 가져와 신성과 악마성, 밝음과 어둠, 창조와 파괴를 함께 품는 상징으로 다시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데미안》의 새는 단순히 부모와 학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선악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를 향해 날아갑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헤세가 왜 성장의 문제를 굳이 선과 악을 함께 품는 신의 문제로 확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왜 기존 세계를 의심했는가

영지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종교가 아니라 고대 후기에 나타난 여러 종교 사상의 묶음입니다. 계열마다 교리는 달랐지만, 여러 영지주의 전통은 인간의 영적 본질과 불완전한 물질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긴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부 전통에서 이 세계는 가장 높고 선한 신이 직접 만든 완전한 질서가 아닙니다. 불완전하거나 무지한 창조자인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감옥에 가깝습니다. 인간 안에는 더 높은 신적 세계에서 온 불꽃이 갇혀 있으며, 인간은 비밀스러운 앎을 뜻하는 그노시스를 통해 자신의 기원과 본질을 깨달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적 구원은 기존 세계에 잘 적응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질서의 정체를 꿰뚫고 그 바깥의 더 높은 실재를 깨닫는 일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정통만 존재했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공동체와 해석이 경쟁했고, 주교 중심의 교회가 교리와 정경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영지주의 계열은 점차 이단으로 배제됐습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 한 사람이 성경을 결정하면서 영지주의 문헌을 삭제한 사건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배제의 과정은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훨씬 뒤에 확립된 서방 정통을 계승한 인물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와 구원, 예수의 본질을 다르게 이해했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다만 경쟁에서 승리한 교회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문헌이 사라졌습니다. 《데미안》은 이처럼 정통이 밀어낸 종교적 상징과 해석을 다시 불러옵니다. 카인의 표식, 십자가의 두 강도, 아브락사스는 모두 정통 기독교가 정해 놓은 선악의 위치를 흔드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헤세는 영지주의 교리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와 융 심리학의 상징을 자신의 성장 경험과 전쟁의 위기를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했습니다.

카인과 십자가의 강도는 왜 뒤집히는가

싱클레어가 처음 사는 세계에는 부모와 가정, 청결과 질서, 기독교적 선이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거짓말과 범죄, 성욕과 폭력, 죄와 어둠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두 세계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데미안은 그 구분을 흔듭니다. 성경 속 카인의 표식은 죄인의 낙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두려워한 강한 인간의 특징일 수 있다고 해석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지 않은 강도도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은 인물로 다시 평가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창의적으로 읽는 일이 아닙니다. 정통 종교가 악인으로 분류한 인물을 강한 인간으로 바꾸는 역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한 강도는 예수를 인정하고 구원을 약속받지만, 다른 강도는 끝까지 예수를 조롱합니다. 후대 기독교 전통은 전자를 선한 강도, 후자를 악한 강도로 구분했습니다. 데미안은 바로 이 도덕적 판정을 의심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권위에 순응한 사람이 정말 더 강한 인간인가. 마지막까지 자기 태도를 바꾸지 않은 사람은 단지 악인인가. 비정경 문헌인 《베드로 복음서》에는 이와 조금 닮은 장면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범죄자는 예수의 무죄를 주장하며 처형자들에게 항의합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기보다 부당한 처형을 비판하고, 그 때문에 더 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데미안》의 해석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대 영지주의 문헌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헤세가 특정 외경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카인과 강도의 재해석은 공통된 방향을 가집니다. 사회와 종교가 악으로 규정한 공격성, 저항, 완고함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보는 것입니다. 헤세는 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선하다고 말하는 사회가 실제로는 경쟁과 폭력을 필요로 한다는 모순을 보고 있었습니다.

알은 우주이기 전에 부모의 집이다

작품이 흔드는 대상은 기독교적 선악관과 유럽 시민사회의 질서까지 넓어집니다. 그러나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경험한 세계는 추상적인 문명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부모와 가정입니다. 밝음과 선, 청결과 안전은 부모의 집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세계의 규칙과 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권위자입니다. 어린 싱클레어에게 부모의 세계는 단순한 가치 체계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입니다. 데미안이 카인의 표식을 다르게 해석할 때 무너지는 것도 성경 해석 하나만이 아닙니다.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알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세계의 의미를 독점하던 자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싱클레어가 나중에 어머니이면서 연인의 성격을 함께 지닌 에바 부인에게 이끌린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으로만 읽으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가려집니다. 성장한 자식은 부모가 차지한 세계 안에서 영원히 어린 개체로 머물 수 없습니다. 살아남는 성체가 되려면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자리를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소입니다.

이소는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물에게 이소는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아닙니다. 출생 집단이나 출생 영역을 떠나 자기 생존과 번식의 자리를 찾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곧바로 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는 개체의 수와 번식의 자리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먹이와 영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고, 좋은 자리는 이미 살아 있는 성체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새끼가 태어나도 그 모두가 다음 세대의 번식 개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늑대 무리는 대개 번식하는 한 쌍과 그 자손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성장한 수컷은 출생 무리를 떠나 빈 영역과 짝을 찾거나 다른 무리의 번식 자리를 얻는 경향이 강합니다. 암컷은 출생 무리에 남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고 같은 무리에서 번식 지위를 물려받거나 하위 번식자가 되기도 하지만, 남아 있다고 곧바로 부모세대와 같은 자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에 따라 이소와 번식의 전략은 달라도 이미 성체가 차지한 자리는 제한되어 있으므로, 다음 세대는 떠나거나 기다리거나 새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개체와 충돌할 수 있고, 자리를 찾지 못한 개체는 굶거나 다치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자유생활 마을개에게도 같은 원리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젖을 뗀 새끼는 먹이 자리를 이미 차지한 성체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작은 새끼는 성체를 이기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 성체가 줄어 생태적 빈자리가 생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새 생명이 살아남으려면 기존 세대가 차지한 자리 가운데 일부가 비어야 합니다. 핵심은 부모와 자식이 언제나 직접 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세대가 이미 생태적·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가 들어갈 자리가 제한된다는 뜻입니다. 자식에게 부모는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이미 한 세대의 자리를 차지한 성체입니다.

높은 출산율은 세대 경쟁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문제는 출산율이 높았던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한 세대가 많은 자녀를 낳는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차지할 농지와 직업, 주택과 사회적 지위가 같은 속도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마다 여러 명의 자녀가 태어나지만 부모가 가진 농지와 재산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장남만 토지를 물려받는 사회에서는 다른 자녀들이 군인, 성직자, 노동자, 이민자 또는 개척자가 되어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세대가 차지한 직업과 재산, 사회적 지위를 모든 자녀가 그대로 이어받을 수는 없습니다. 출산율이 높고 새로운 경제적 공간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으면, 젊은 세대의 이소와 이동, 경쟁은 피하기 어려운 현상이 됩니다. 이주와 개척, 도시화, 해외 이민, 식민지 팽창과 군대는 서로 전혀 다른 현상이지만, 모두 기존 사회가 흡수하지 못한 젊은 인구에게 새로운 자리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높은 출산율이 모든 세대 갈등과 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정치적 야심, 종교, 민족주의, 자원과 안보, 국가의 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젊은 개체가 한꺼번에 성체가 되고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충분하지 않다면, 이소와 경쟁의 압력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부모세대와의 갈등은 단순한 심리적 오해가 아닙니다. 새로운 세대가 실제로 들어갈 자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인간은 세대교체를 제도화했다

인간 가족을 늑대 무리와 그대로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앞의 생태학적 사례는 인간의 가족제도나 《데미안》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기존 세대의 보호와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문학적 유추입니다. 인간은 세대 간 자리 경쟁이 직접적인 추방과 살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여러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성장한 자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집과 배우자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대신 집을 떠나 다른 직업과 배우자, 새로운 가구를 얻습니다. 상속, 교육, 직업, 결혼, 재산권과 새로운 주거의 형성은 세대교체를 비폭력적으로 만드는 장치입니다. 인간은 자리 경쟁을 없앤 것이 아닙니다. 그 경쟁이 곧바로 추방과 살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바꾸었습니다. 아버지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대신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납니다. 부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대신 독립된 직업과 가구를 얻습니다. 기존 세대를 죽이는 대신 기존 세대와 다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이 관점에서 《데미안》은 오이디푸스 비극을 문명화된 형태로 바꾼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싱클레어는 아버지를 죽이거나 어머니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의미를 독점하던 세계를 떠납니다. 피로 자리를 빼앗는 대신 부모의 집에서 이소하여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알은 우주 전체이기 전에 부모가 제공한 안전한 자리입니다. 알을 깨는 것은 신비로운 각성이기 전에 부모의 보호권에서 이소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이소가 선악의 문제가 되는가

부모의 집을 떠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하지만 독립에 필요한 힘 가운데에는 부모와 사회가 경계해 온 것들이 포함됩니다. 성장한 자녀는 부모의 말을 거부해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진로를 버리고, 자신의 성욕과 경쟁심을 인정하며, 부모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면서도 떠나야 합니다. 때로는 순종보다 자기주장이 필요하고, 양보보다 투쟁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선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순종하면 독립된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공격성, 욕망과 반항은 위험하기 때문에 악으로 가르쳐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없는 개체는 자기 영역과 지위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성장의 역설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하지만, 끝까지 순종하면 자기 삶을 얻기 어렵습니다. 공격성과 경쟁심은 위험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면 자립할 힘도 약해집니다.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일은 파괴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부정과 단절이 필요합니다. 《데미안》은 이 문제를 현실적인 세대교체의 문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회와 종교가 악이라고 규정한 힘까지 인간의 전체성 안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락사스가 등장합니다. 아브락사스는 성장한 개체가 사용해야 하지만 기존 도덕이 억압해 온 힘을 다시 신성한 전체 안에 넣는 상징입니다.

성적 욕망, 부모에 대한 반항, 경쟁심, 공격성, 자기중심성,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는 충동이 모두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격성이 진화적으로 형성됐다는 사실과 공격적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판단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는 일과 그것을 행동으로 정당화하는 일도 다릅니다. 헤세와 융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생태학적 해석은 유일한 설명이 아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데미안》의 모든 종교적·정신적 갈등을 이소와 자리 경쟁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헤세가 다룬 것은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종교적 신앙의 붕괴, 자기 정체성, 성욕, 고독, 전쟁과 유럽 문명의 위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싱클레어 내면의 자기성과 모성적 전체성이 외부 인물로 형상화된 존재로 읽는 융적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태적 해석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 독립 역시 부모세대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자리를 얻는 성장 구조 위에서 일어납니다. 인간이 아무리 복잡한 상징과 종교를 만들더라도, 한 세대가 자라 부모세대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조건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소와 경쟁은 《데미안》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작품의 갈등이 왜 반복적으로 부모의 권위, 공격성, 선과 악의 문제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기초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헤세는 이 오래된 성장 문제를 영지주의와 융 심리학의 언어로 확대했습니다.

개인의 이소와 집단의 전쟁

《데미안》은 개인의 성장소설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들어갑니다. 이 전쟁을 단순한 시대적 배경이나 낡은 유럽 세계의 붕괴를 알리는 장치로만 보면 작품의 중요한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개인이 부모의 집을 떠나는 것이 새로운 활동영역을 찾는 이소라면, 전쟁은 집단이 자기 활동영역을 지키거나 확대하기 위해 벌이는 경쟁입니다. 두 사건의 규모는 다르지만 구조는 닮았습니다. 성장한 개체는 부모가 차지한 자리에서 벗어나 자기 영역을 찾아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은 다른 집단과 경계를 맞대며 영토, 자원, 교역로, 영향력과 안전을 둘러싸고 경쟁합니다. 개인 수준에서 억제된 공격성이 집단 수준에서는 다시 허용됩니다. 평상시 사회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살인은 가장 무거운 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같은 사회가 젊은이에게 총을 주고 적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어제까지 살인이었던 행위가 전선에서는 의무와 용기, 애국심이 됩니다. 상대편 병사 역시 반드시 악인은 아닙니다. 그 역시 부모의 집을 떠나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온 청년일 수 있습니다. 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고 죽여야 합니다. 이때 선과 악의 경계는 불안정해집니다. 살인이 선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집단의 생존과 경쟁을 위해 평상시의 도덕적 금지를 해제한 것입니다.

선한 사회는 왜 살인을 명령하는가

어린 싱클레어가 믿었던 밝은 세계에는 부모와 교회와 학교가 있습니다. 이 기관들은 정직, 사랑, 순종과 생명의 가치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바로 그 아버지 세대의 국가와 교회와 학교가 젊은이에게 적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 배운 선악은 전쟁터에서 그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적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종교도 조국의 승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군복을 입혀 전선으로 보냅니다. 헤세가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모순을 극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소설의 선악 문제는 단순한 청소년의 도덕적 반항이 아닙니다. 선하다고 자처하는 문명이 어떻게 전쟁과 대량 살인을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카인은 전쟁터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로 기록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그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전쟁 중인 사회는 수많은 사람에게 살인을 요구합니다. 적군을 많이 죽인 병사는 범죄자가 아니라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살인이라도 개인의 사적 행위인지 국가가 승인한 행위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카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정당한 권위의 승인을 받지 않고 죽였다는 사실인가. 국가가 명령하면 살인은 선이 되는가. 적군의 생명은 왜 평상시 시민의 생명과 다른가. 데미안의 카인 해석을 살인의 찬양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가 살인과 공격성을 일관되게 판단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공격성을 악이라고 가르치지만, 경쟁과 전쟁이 시작되면 그 공격성을 필요로 합니다. 개인이 공격하면 범죄입니다. 군인이 공격하면 임무입니다. 지휘관이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면 전략입니다. 국가가 이를 명령하면 전쟁입니다. 행위의 물리적 결과는 비슷하지만 사회가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는 달라집니다. 헤세가 선악의 이분법을 의심한 배경에는 이런 현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출산율과 집단의 팽창

개인의 이소와 집단의 전쟁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조건은 높은 출산율입니다. 한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가 동시에 성인이 되지만, 그들이 차지할 농지와 직업, 주택과 사회적 지위가 충분히 늘어나지 않으면 내부의 경쟁 압력이 커집니다.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도시로 들어가며, 일부는 군인이 되거나 해외로 떠납니다. 새로운 땅과 시장, 식민지와 국경 밖의 기회가 젊은 인구의 출구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높은 출산율이 전쟁을 자동으로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는 권력자의 판단, 국가제도, 민족주의, 안보 불안, 자원과 영토 문제가 함께 작용합니다. 그러나 들어갈 자리는 제한되어 있는데 새로운 성체가 계속 늘어난다면, 이소와 영역 확대의 압력은 커질 수 있습니다. 부모세대에게서 분가해야 하는 개인의 문제와 다른 집단의 영역을 향해 팽창하는 사회의 문제는 여기에서 연결됩니다. 한쪽은 가족 내부의 세대교체이고, 다른 쪽은 집단 사이의 공간 경쟁입니다. 《데미안》에서 개인의 성장과 전쟁이 한 작품 안에 함께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브락사스는 이 모순을 품는 이름이다

이제 아브락사스가 왜 필요했는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협력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경쟁하고 죽이는 존재입니다. 가정에서는 보호하고, 전쟁에서는 파괴합니다.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지만 성인이 되면 독립하라고 요구합니다. 살인을 악이라고 규정하면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살인을 명령합니다. 기독교의 선한 신만으로 이 모든 현실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신성과 악마성, 창조와 파괴를 한데 포함하는 아브락사스는 매력적인 상징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락사스는 모순을 표현할 뿐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인간 안에 공격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상황에 따라 폭력을 금지하거나 허용한다는 모순도 상징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폭력이 정당한지, 침략과 방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개인의 욕망과 타인의 권리가 충돌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선악의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세밀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공격성과 경쟁이 자연적이라고 해서 모든 공격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해서 침략과 방어가 같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 삶을 위해 부모의 뜻을 거부해야 한다고 해서 부모를 해치는 일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헤세는 도덕적 이분법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사용할 경험적이고 제도적인 윤리를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공백을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이 채웁니다.

싱클레어는 정말 자기 자리를 얻었는가

싱클레어는 부모의 세계를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동영역을 실제로 개척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데미안이라는 새로운 인도자를 따르고, 에바 부인의 집에서 귀향과 같은 안도감을 느끼며, 표식을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집니다. 융적 독법에서는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싱클레어 내면의 자기성과 모성적 전체성이 외부 인물로 형상화된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와 서사적 기능은 구분해야 합니다. 그들이 싱클레어 내면의 일부를 상징한다고 해도, 이야기 속 싱클레어는 여전히 새로운 인도자와 정신적 어머니, 선택받은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방향을 확인합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데미안이 대신합니다. 어머니의 보호는 에바 부인이 대신합니다. 가족의 소속감은 표식을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가 대신합니다. 싱클레어는 부모의 세계를 부정했지만, 부모 없는 세계에서 자기 판단과 책임으로 살아가는 과정은 충분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알은 깨졌지만 의존의 구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 《데미안》은 이소를 이야기하면서도 이소 이후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생략합니다. 동물이 출생 영역을 떠난 뒤에는 먹이와 영역, 짝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성체와 관계를 맺고 자기 지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떠나는 것보다 도착하고 정착하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을 만들어내기보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의 공동체 안에 들어갑니다. 그는 자기 자리를 얻었다기보다, 부모가 맡았던 기능을 다른 인물들에게 옮겼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전쟁은 싱클레어에게 자리를 주었는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여기서 전쟁은 개인의 내적 성장과 유럽 전체의 파괴를 겹쳐놓습니다.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전쟁은 개인에게 진정한 자기 자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자기 목적과 판단으로 활동영역을 개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가 정한 자리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난 청년이 국가라는 더 큰 아버지의 명령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소한 개인이 전쟁에서는 다시 집단의 부속품이 됩니다. 이것은 작품의 또 다른 역설입니다. 싱클레어는 아버지의 선악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 했지만, 마지막에는 국가가 수행하는 대규모 살인의 현장에 들어갑니다. 개인의 내면을 따르라는 이야기가 집단적 전쟁으로 끝납니다. 헤세는 전쟁을 찬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증오를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은 유럽의 파괴를 새로운 시대와 인간의 탄생에 겹쳐 놓습니다. 알이 깨지는 일은 개인에게는 성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알이 깨질 때는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개인의 해방을 설명하는 상징을 문명의 파괴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실제 해답은 제도였다

헤세가 아브락사스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문제에 대해 인간 사회가 실제로 만들어낸 해답은 선과 악을 초월하는 새로운 신이 아니었습니다. 경쟁이 곧바로 폭력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가족 내부에서는 분가와 상속, 직업 선택과 혼인의 자유가 세대교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사회 내부에서는 법과 재산권, 계약과 절차가 사람들 사이의 자리 경쟁을 조정했습니다. 국가 사이에서는 외교와 조약, 국제법과 세력균형이 전쟁을 억제하려 했습니다. 이 제도들은 경쟁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경쟁자가 곧 제거해야 할 악인이 되는 것을 막습니다. 인간이 실제로 발견한 해결책은 내면의 어둠을 신성한 전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서로의 영역과 권리를 규칙으로 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락사스는 인간의 모순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은 상징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유지됩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의 표식

《데미안》에는 개성에 대한 찬양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카인의 표식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과 다른 존재로 묘사됩니다. 군중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오해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특별한 인간입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 에바 부인의 주변에는 서로를 알아보는 소수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를 개성의 존중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향에서 보면 정신적 귀족주의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따르는 깨어 있는 소수와 관습에 따라 사는 평범한 다수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집단심리와도 묘하게 닮았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집단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들에게 특별한 사명과 표식이 있다고 믿으며, 상대 집단을 낡고 타락한 세계로 규정합니다. 자신을 선택받은 소수로 생각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삶과 판단을 가볍게 여길 위험도 커집니다. 다수와 다르다는 사실이 더 깊은 인간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사회와 불화한다는 사실도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강한 내면의 목소리가 실제 통찰인지 자기기만과 공격성인지도 별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는 언제 옳은가

《데미안》은 외부의 권위와 규범을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작품의 중요한 힘입니다. 부모와 학교, 종교와 사회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물려받은 가치와 규범을 검토하고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 권위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내면의 목소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욕망이 강렬하다고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금지한다고 더 본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통찰뿐 아니라 충동과 자기기만, 질투와 공격성, 과장된 자의식도 있습니다. 사회적 규범에도 억압적인 것이 있지만 폭력과 착취를 줄이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개인 간 살인을 금지하고 세대교체를 분가와 상속으로 전환한 것은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 문명의 성취입니다. 문제는 규범 자체가 아니라 규범이 상황에 따라 모순되게 적용되는 데 있습니다. 개인의 폭력은 금지하면서 국가의 폭력은 영웅시합니다.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면서 어느 순간 독립된 성인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경쟁심을 억제하면서 성취 경쟁에서는 이기라고 말합니다. 《데미안》은 이런 모순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제도와 상황의 문제로 분석하기보다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신비주의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아브락사스는 답인가, 답처럼 보이는 이름인가

신비주의적 글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인간에게는 잊힌 기원과 감춰진 진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표면만 보지만 깨어난 사람은 더 깊은 실재를 본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은 인생이 신비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비가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글이 아브락사스에서 느끼는 반감도 바로 그 모호함이 깊이와 깨달음의 증거처럼 제시되는 태도를 향합니다. 이 약속은 강렬합니다. 독자는 자신의 답답함과 소외감 뒤에 거대한 비밀이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은 자주 다시 상징으로 돌아갑니다. 영지, 각성, 전체성, 내면의 목소리, 우주의 비밀이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깨달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데미안》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작품은 기존의 선악 구분이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성장에는 부모에 대한 부정과 경쟁이 필요할 수 있고, 평화를 말하는 사회도 전쟁에서는 살인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협력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활동영역을 지키는 경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어떤 삶이 더 나은지에 대한 답은 자동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소는 자연스럽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쟁이 인간 사회에 반복됐지만 어떤 전쟁이 정당한지는 별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공격성은 인간의 일부이지만 그것을 언제 억제하고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인 규칙이 필요합니다. 아브락사스는 이러한 공백을 강렬한 이름으로 채웁니다.

아브락사스는 비밀의 해답이라기보다, 인간의 모순을 하나의 전체성 안에 넣어 해답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이름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문학적 결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학의 상징은 하나의 명제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삶의 지침이나 심리학적 진리로 읽으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설명되지 않은 공백을 깊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을 깨달음의 증거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읽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작품의 낯설고 불편한 부분을 현대적인 언어로 순화했습니다. 카인은 남들과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조화시키는 추상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부모와 학교의 기대를 벗어나는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영지주의적 구원과 종교적 탄생은 자기계발의 자아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융의 신화적 인간론은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통해 과학적 권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다루는 문제는 훨씬 거칠고 현실적입니다. 개인은 부모세대의 보호에서 이소하여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출산율이 높았던 사회에서는 모든 자녀에게 기존 세대와 같은 자리를 제공하기 어려웠고, 젊은 세대는 이동과 경쟁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은 가족 내부의 세대 경쟁을 분가와 직업, 결혼과 상속으로 완화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국가 사이의 활동영역 경쟁은 전쟁이라는 형태로 남았습니다. 평상시에는 악으로 규정되는 공격성과 살인이 전쟁에서는 집단의 생존을 위한 의무가 됩니다. 헤세가 선악의 경계를 의심한 것은 이러한 모순을 보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작품의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데미안》에는 종교적 신앙의 붕괴와 정체성, 성욕과 고독, 융 심리학과 세계대전의 경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생태적 이소와 자리 경쟁은 이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는 설명이 아니라, 그 다양한 갈등이 왜 부모의 권위와 공격성, 선과 악의 문제로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반입니다. 헤세는 이 오래된 성장과 경쟁의 문제를 아브락사스와 영지, 정신적 재탄생이라는 우주적 언어로 확대했습니다. 그 표현은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상징이 설명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합니다.

알을 깨는 것보다 어려운 일

싱클레어가 깨뜨린 알의 가장 구체적인 실체는 부모의 세계입니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선악과 안전한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대신 데미안이라는 인도자, 에바 부인이라는 정신적 어머니, 표식을 지닌 사람들의 새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집단적 경쟁 속에 편입됩니다. 그는 부모의 집에서는 이소했지만 자기 삶의 영역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습니다. 한 권위에서 벗어나 다른 권위로 이동했고, 한 가족에서 벗어나 다른 가족을 찾았으며, 개인의 독립을 추구하다 국가의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우주의 비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모의 자리를 떠나야 하지만 부모 없는 세계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개인은 자기 활동영역을 원하지만 완전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회는 폭력을 악이라고 가르치지만 자기 활동영역이 위협받으면 다시 폭력을 요구합니다. 출산율이 높고 새로운 세대가 계속 늘어나던 사회에서는, 기존 세대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영역을 찾는 일이 더욱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은 협력과 경쟁, 보호와 공격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헤세는 이 오래된 문제를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붙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을 깨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진짜 어려운 일은 알 밖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고, 다른 존재의 자리와 경계를 조정하며, 공격성이 곧바로 폭력으로 번지지 않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데미안》에 던져야 할 질문은 새가 왜 알을 깨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새는 부모의 집을 떠나 어디에 자기 활동영역을 만들었는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를 밀어내거나 죽여야 할 때,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모순을 설명했는가, 아니면 모순 전체에 신비로운 이름을 붙였을 뿐인가. 새는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갑니다. 그러나 알을 깨는 것이 이소라면,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새는 알 밖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들고, 다른 새와 싸우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지킬 것인가.

참고문헌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2000. 본문의 새와 알에 관한 문장은 제5장에서 인용.

레이먼드 코핑거·로나 코핑거, 《개는 무엇으로 사는가》.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Jeremy SunderRaj et al., “Breeding Displacement in Gray Wolves (Canis lupus)”, PLOS ONE 17, no. 11 (2022): e0256618.

The British Museum, “Magical Gem; Intaglio,” Museum No. 1986,0501.40.

The Gospel of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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