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미안은 왜 싱클레어에게 좋은 스승이 되지 못했는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끝납니다. 부상당한 싱클레어는 야전병원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납니다. 데미안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을 전한다며 싱클레어에게 입을 맞추고, 앞으로 자신이 필요하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다음 날 싱클레어가 눈을 떴을 때 데미안은 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과 닮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흔히 이 장면은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에게 내면화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외부의 데미안은 사라졌지만 이제 싱클레어 안에 데미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두 번째 세계는 악의 세계가 아니다
이 질문을 생각하려면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둘로 나눕니다. 한쪽에는 부모와 집, 청결과 질서, 기도와 예절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하녀와 기술공, 도살장과 감옥, 술주정뱅이, 새끼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 절도와 살인과 자살이 있습니다.
흔히 첫 번째 세계를 선, 두 번째 세계를 악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상합니다. 새끼를 낳는 암소가 왜 악일까요. 쓰러진 말은 왜 악일까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젊은 여성과 기술공은 또 왜 어둠의 세계에 속해야 할까요.
이들의 공통점은 악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성과 출산의 구체적인 과정은 알지 못합니다. 말이 마차를 끄는 모습은 보지만 사고를 당해 쓰러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굳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어른들의 갈등도 그렇습니다. 술에 취한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장면을 아이가 본다면 그에게는 그저 무섭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부부 사이에 돈, 성, 질투, 생활고, 오래된 원망과 실패가 어떻게 쌓였는지 아이는 알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보는 것은 결과뿐입니다.
절도와 살인, 자살은 더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부모와 공동체의 보호망을 벗어난 뒤 새로운 생활 기반과 관계망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태학적 이소 과정에서 일부 개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듯, 인간도 이행 과정에서 고립과 좌절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때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나 자기파괴의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 됩니다. 물론 그것이 폭력이나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세계는 선한 세계라기보다 "어린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정돈된 세계"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 세계는 악의 세계라기보다 "생식과 죽음, 노동과 경쟁, 갈등과 도태가 실제로 벌어지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이소하면서 처음 발견하는 세계다
이 장면은 인간의 성장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생태학에서 이소는 단순히 자리를 옮기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닙니다. 기존 서식지를 떠나고, 이동하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세 단계의 과정이며 각 단계의 결과는 개체의 상태와 환경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Bowler와 Benton의 연구는 이소를 이런 조건 의존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동물이 성장해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문제가 시작됩니다. 먹이를 스스로 구해야 하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하며, 다른 개체와 경쟁하고 짝을 찾습니다. 부상과 죽음도 더 가까운 문제가 됩니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의 집에서는 많은 것이 이미 해결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잠잘 곳이 있으며, 위험한 문제는 부모가 대신 처리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 점차 그 보호막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크로머 사건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싱클레어는 또래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말을 했다가 약점을 잡히고 협박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부모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거대한 악의 존재가 아닙니다.
부모가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가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성장에 비유한다면 이것이 이소의 시작입니다. 그런 점에서 《데미안》 초반의 헤세는 성장기의 중요한 순간을 상당히 정확하게 포착했습니다.
그런데 헤세는 현실에서 다시 관념으로 올라간다
제가 아쉽게 느끼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헤세는 이렇게 구체적인 현실을 발견해 놓고 점차 그것을 카인의 표식, 선과 악의 통합, 아브락사스, 내면의 운명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옮겨갑니다. 생식과 죽음, 경쟁과 도태, 부모로부터의 이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어느 순간 정신과 영혼의 문제가 됩니다.
카인은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라 강한 인간이 되고,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함께 품는 신이 됩니다. 싱클레어의 갈등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경쟁심과 성욕, 공격성과 독립 욕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의 선악을 넘어서는 정신적 각성의 문제가 됩니다. 물론 이것을 헤세 개인의 실수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럽의 지적 전통에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 문제를 하나의 보편적 원리로 끌어올리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합리주의와 관념론은 인간과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려 했고, 독일 철학에서는 특히 정신과 의식, 보편적 의미를 중시하는 전통이 강했습니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유럽의 한계’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유럽에서도 경험주의와 자연주의, 진화론처럼 현실의 관찰에서 출발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세의 한계라고 조금 좁혀 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헤세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세계를 떠날 때 무엇을 보게 되는지는 매우 잘 알았지만, 그것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할 때 다시 신화와 상징으로 돌아갔습니다.
데미안은 세계관을 흔들었지만 판단법은 남기지 않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 줍니다. 사람들이 카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에게 낙인이 있다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선악 구분을 의심하게 하고, 아브락사스를 통해 선과 악을 함께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운명을 따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역할입니다.
부모와 학교, 교회가 가르쳐 준 질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세계관을 흔드는 것과 좋은 판단법을 가르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량한 충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격성, 질투, 성적 욕망, 지위 경쟁, 복수심과 자기기만도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내면을 따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욕망은 왜 생겼는가. 그 욕망을 따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생기는가. 내 판단은 현실과 맞는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스승이라면 이런 질문을 남겨야 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신화는 주었지만, 현실을 검토하는 방법은 충분히 주지 못했습니다.
롱 존 실버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 작품을 그 작품 안에서만 해석하면 작품이 제시하는 가치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른 소설의 인물을 하나 가져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보물섬》의 롱 존 실버입니다.
실버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해적이고, 필요하면 거짓말하고 배신하며 살아남기 위해 편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버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보입니다.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고, 사람들의 욕망을 읽으며, 언제 싸우고 언제 협상해야 하는지를 판단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자신의 전략도 바꿉니다. 그래서 독자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실버라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실버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판단은 배우고 어떤 판단은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사고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미안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고 물으면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데미안은 상징적인 말을 하고 신비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는 데는 능하지만, 현실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비교해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는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실버는 행동 모델이지만, 데미안은 해석의 상징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스승이 사라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물론 《데미안》은 현실의 처세술이나 문제 해결법을 가르치는 교본이 아닙니다.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이 글이 문제 삼는 것은 소설에 실용적인 조언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데미안을 싱클레어의 좋은 스승으로 해석할 때, 그가 제자에게 독립적인 판단법을 남겼는지 아니면 새로운 상징과 권위를 내면화하게 했는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이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스승이 제자와 평생 함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자가 자기 판단으로 살아가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스승이 떠난 뒤 무엇이 남았는가입니다. 소설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독립된 판단능력을 얻었다는 뜻일까요.
어쩌면 외부에 있던 데미안의 목소리가 내부로 옮겨갔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권위를 내면화했다고 해서 반드시 독립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거부한 뒤 데미안의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가 되었다면, 권위의 위치만 바뀐 것입니다.
싱클레어는 정말 이소에 성공했을까
이 관점에서 보면 싱클레어의 성장에는 묘한 공백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의 세계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직업이나 사회적 역할을 만들고, 자신의 생활영역을 개척하고, 다른 사람과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살아가는 과정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데미안을 만나고,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고, 에바 부인의 집에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데미안이 대신하고, 어머니의 보호는 에바 부인이 대신합니다. 원래 가족을 떠난 뒤 새로운 정신적 가족을 얻은 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쟁에 들어갑니다.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난 청년이 국가라는 더 큰 권위 아래에서 군인이 됩니다. 알은 깨졌지만 그 뒤에 자기 둥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데미안》은 이소의 첫 단계는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그 다음 단계는 거의 생략합니다.
떠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도착해서 자기 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현대의 데미안이라면 아브락사스와 함께 생태학도 가르쳤을 것이다
만약 데미안이 오늘날의 인물이었다면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사스를 가르쳤을까요. 아마 생태학이나 진화심리학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악마적인 충동이 아닙니다. 성장한 개체가 가족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또래 집단에서 새로운 관계와 지위를 찾는 과정입니다. Ellis 등의 진화발달심리학 연구도 청소년기를 또래 관계와 사회적 지위, 성인기의 삶을 향한 궤적이 크게 달라지는 전환기로 설명합니다.
성적 욕망과 경쟁심, 공격성과 독립 욕구 역시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 성향입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것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의 좋은 스승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안에 특별한 악마가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성장하면서 부모에게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다. 경쟁심과 성적 욕망, 공격성과 독립 욕구는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이해하고,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살피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락사스보다 덜 신비롭습니다. 하지만 훨씬 구체적입니다.
물론 생태학이나 진화심리학이 아브락사스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화와 상징은 성장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매혹을 표현하는 데 여전히 유용합니다. 다만 상징이 경험의 의미를 보여준다면, 생태학은 그러한 욕망과 갈등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문제는 상징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상징을 현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데미안은 좋은 스승이라기보다 성장기의 동행자였다
그렇다고 데미안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부모와 학교와 교회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익숙한 설명을 의심하게 했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욕망과 갈등을 외면하지 않게 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이런 사람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스승은 세계를 부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존의 권위를 의심하게 했다면 새로운 권위도 똑같이 의심하는 법을,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했다면 그 내면이 언제 자신을 속이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데미안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싱클레어를 부모의 세계에서 끌어냈지만, 부모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데미안을 위대한 스승이라기보다 "성장기의 강렬한 동행자"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데미안》이 여전히 흥미로운 책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세계를 의심하는 법은 가르쳤지만,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까지 가르쳐주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문헌
- Diana E. Bowler and Tim G. Benton, “Causes and Consequences of Animal Dispersal Strategies: Relating Individual Behaviour to Spatial Dynamics”, Biological Reviews 80(2), 2005.
- Jean Clobert, Michel Baguette, Tim G. Benton, and James M. Bullock, eds., Dispersal Ecology and 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 Bruce J. Ellis et al., “The Evolutionary Basis of Risky Adolescent Behavior: Implications for Science, Policy, and Practice”, Developmental Psychology 48(3),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