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외계인에게는 누스바움, 지구인에게는 샐리 케이건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과 샐리 케이건의 위계적 동물윤리를 비교하며,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하면서도 생명의 충돌 앞에서 책임 있게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을 살펴봅니다.

외계인에게는 누스바움, 지구인에게는 샐리 케이건

한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생쥐가 물에 빠졌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해야 할까요?

샐리 케이건은 『동물을 어떻게 셀 것인가, 다소간』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동물윤리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난감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생쥐도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피하려는 존재이지만, 한 사람의 생명과 한 마리 생쥐의 생명을 같은 무게로 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에게 동일한 종류의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단일주의적 동물윤리는 이 선택을 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사람도 살고 싶어 하고 생쥐도 살고 싶어 합니다. 둘 다 감각이 있고, 고통을 피하며, 생존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라면 왜 반드시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할까요?

사람에게 가족이 있고 더 긴 미래가 있으며 사회적 관계가 더 복잡하다는 이유를 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단일주의 동물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우선하기 위해 매번 주변적이고 우연적인 조건이나 가중치를 끌어와야 한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더 큰 도덕적 무게를 가진다는 우리의 판단은 이론 안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중치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단일주의 동물권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케이건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과 동물이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지만, 반드시 동일한 정도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동물에게도 도덕적 지위가 있지만 그 지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인간은 일반적으로 생쥐보다 더 큰 도덕적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동물을 존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동물을 존중하면서도 인간과 동물을 서로 다르게 셀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동물을 고려한다는 것과 똑같이 세는 것은 다릅니다

현대의 동물권 논의는 중요한 도덕적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동물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을 경험하며 자신에게 적합한 삶을 살아가려는 존재입니다. 공장식 축산, 불필요한 동물실험, 오락을 위한 학대와 서식지 파괴를 비판하는 데 특별히 급진적인 철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모든 도덕적 위계를 부정할 때 발생합니다.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다는 말은 동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람과 생쥐, 아이와 닭, 돌고래와 모기에게 동일한 도덕적 지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과 동일한 무게로 계산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샐리 케이건은 『동물을 어떻게 셀 것인가, 다소간』에서 바로 이 차이를 파고듭니다. 그는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지만 사람보다 낮은 지위를 가질 수 있으며, 동물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중요성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위계적 동물윤리를 옹호합니다. 그의 핵심 명제는 간단합니다. 사람은 동물보다 더 크게 계산될 수 있고,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크게 계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을 무시하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물을 실제 도덕적 계산 안으로 들여오되, 모든 존재를 억지로 같은 값으로 만들지는 말자는 주장입니다.

외계인이 읽어야 할 누스바움의 책

그럼에도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지구의 동물이란 어떤 존재이며, 인류는 그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마사 누스바움의 『동물을 위한 정의』를 권할 것입니다.

누스바움은 동물을 단순히 고통을 느끼는 감각의 용기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의 동물은 자기 종에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놀고, 번식하며, 환경을 탐색하려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동물이 자기다운 삶을 살아갈 실질적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입니다. 동물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신체적 온전성, 이동, 사회적 관계, 놀이, 자극, 종에 적합한 행동을 실현할 기회입니다. 누스바움은 모든 감각 있는 존재가 번영하는 데 필요한 핵심 역량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외계인의 눈으로 지구를 바라본다면 이 철학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외계인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해야 할 역사적 이유도, 인간 사회의 관습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인간, 코끼리, 고래, 개, 돼지 모두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진화한 서로 다른 동물일 것입니다.

그런 관찰자에게 누스바움의 책은 훌륭한 지구 동물 안내서가 됩니다. 인간만을 중심에 놓지 않고 각 동물이 어떤 삶을 추구하며, 인간이 그 삶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공장식 축산, 포경, 밀렵, 서식지 파괴, 해양오염과 반려동물의 방치는 모두 동물이 자기 삶을 살아갈 역량을 빼앗는 행위로 해석됩니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문제를 인간의 친절이나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격상시킵니다.

외계인이 지구 생명 전체를 내려다보며 인류에게 윤리적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누스바움의 언어가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누스바움의 철학은 너무 멀리서 지구를 봅니다

그러나 누스바움의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 됩니다. 그의 철학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넓게 바라보지만, 때때로 너무 멀리서 바라봅니다.

지구의 생명은 평화로운 공존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늑대는 사슴을 죽이고, 고양이는 쥐를 잡으며, 새는 곤충을 먹습니다. 인간 역시 수십만 년 동안 사냥과 채집, 목축과 농업을 통해 생존해 왔습니다. 자연은 각 동물의 역량이 조화롭게 실현되는 거대한 정원이 아니라, 서로의 역량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공간입니다.

사슴이 살아갈 역량과 늑대가 사냥할 역량은 동시에 완전하게 보장될 수 없습니다. 생쥐가 번식하고 먹이를 찾을 역량과 인간이 곡식을 저장하고 감염병을 막을 역량도 충돌합니다. 야생동물의 자유로운 이동과 인간의 주거, 도로, 농업 역시 언제나 함께 확대될 수는 없습니다.

누스바움은 모든 동물을 인간과 닮은 정도에 따라 서열화해서는 안 되며, 각각의 고유한 삶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원칙은 동물을 이해하는 데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생명의 요구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 결정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누스바움의 세계에는 모든 동물이 자기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지구에서는 하나의 생명이 자기다운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외계인에게는 이 모순이 크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외계인은 지구 생명 전체를 하나의 관찰 대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구인은 관찰자가 아니라 그 충돌 속에서 살아가는 당사자입니다.

지구인은 선택해야 합니다

지구인은 매일 선택합니다. 사람과 생쥐 가운데 누구를 구조할지,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해충 방제를 허용할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동물실험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포식자가 가축을 공격할 때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선언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더라도 모두를 동시에 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인의 윤리는 충돌을 다루는 윤리여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존재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인지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의 이익이 충돌할 때 어떤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지 설명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샐리 케이건의 위계적 접근은 누스바움의 철학보다 불편하지만 정직합니다. 그는 인간만 중요하고 동물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물도 도덕적으로 계산되어야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크기로 계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지위는 이분법적인 신분증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사람과 생쥐가 물에 빠졌을 때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쥐를 아무 이유 없이 고문하거나 죽여도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생쥐도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생존에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이므로 도덕적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다만 사람의 생명과 충돌할 때는 사람의 생명이 더 큰 무게를 가집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지구인이 실제로 받아들이는 윤리입니다. 인간은 특별하지만 유일하게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동물은 중요하지만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위계는 학대의 허가증이 아닙니다

위계라는 말은 위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인정하면 동물 학대를 정당화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위계는 낮은 지위의 존재를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성인은 능력과 책임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어린아이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취약한 존재일수록 더 강한 보호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더 무겁다고 해서, 인간의 사소한 즐거움이 동물의 극심한 고통보다 항상 중요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실험동물 몇 마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과, 값싼 고기를 먹기 위해 수십억 마리의 동물을 평생 좁은 우리에 가두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위계적 윤리는 모든 인간의 이익이 모든 동물의 이익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해야 하는 것은 존재의 지위만이 아니라 이익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생쥐의 생명이 충돌한다면 인간을 구하겠지만, 인간의 사소한 재미와 동물의 심각한 고통이 충돌한다면 동물의 고통을 막는 것이 옳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케이건의 책은 단순한 인간중심주의와 구별됩니다. 동물은 계산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의 무게를 가지고 계산됩니다.

동물을 사랑하려면 지구를 알아야 합니다

누스바움의 철학에는 동물을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닭을 달걀 생산기계로, 돼지를 고기로, 고래를 관광자원으로 보지 않고 각자의 삶을 가진 존재로 보게 합니다. 인간이 동물에게 가한 거대한 피해를 인식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강력한 철학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하는 일과 동물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포식, 경쟁, 기생, 질병, 굶주림과 번식 경쟁이 있습니다. 인간도 그 세계 바깥에 서 있는 순수한 심판자가 아니라 그 안에 속한 한 종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을 보호할 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 가족과 공동체와 종을 우선할 진화적·도덕적 의무도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지구의 모든 동물을 공평하게 바라보려 합니다. 그래서 외계인에게 지구 동물을 소개하기에는 훌륭합니다. 외계인은 인간이라는 한 종의 편견에서 벗어나 각각의 생명 형태가 추구하는 삶을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인은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과 생쥐가 함께 물에 빠졌을 때, 농작물과 해충이 충돌할 때, 포식자와 가축이 충돌할 때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모든 생명을 멀리서 공평하게 바라보는 철학만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책임 있게 우선순위를 정하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외계인에게 지구의 동물을 다룬 책을 한 권 권한다면 누스바움의 『동물을 위한 정의』를 권하겠습니다. 이 책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생명들이 어떤 삶을 원하며, 인류가 그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구인에게 동물윤리에 관한 책을 권한다면 샐리 케이건의 『동물을 어떻게 셀 것인가, 다소간』을 권하겠습니다. 지구인은 모든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생명들을 실제로 세고, 비교하고, 때로는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외계인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지구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생명들 사이에서 책임 있게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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