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을 평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책과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경제성장률, 물가, 실업률, 전쟁, 외교, 산업정책과 같은 결과를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욕망하고, 누구와 가까우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배니티 페어(Vanity Fair)는 분명히 후자에 속합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2004년 빌 클린턴 기사 「Bill and His Shadow」와 2016년 도널드 트럼프 기사 「The Ugly American」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기사가 모두 정책보다 성격을 중심으로 인물을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클린턴 기사에서 배니티 페어는 경제정책이나 외교정책을 거의 분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클린턴이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하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려 하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기사의 내용은 약간은 비꼬는 듯한 내용이고, 클린턴은 하나의 정치인이 아니라 강한 에너지와 인정 욕구를 가진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리버럴한 매체가 가지는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클린턴을 흔히 말하는 "가지고 논다"해도 될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방식은 리버럴 문화가 개인의 내면과 심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과 잘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기사는 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허영심, 과시욕, 인정 욕구, 인간관계가 주요 소재가 됩니다. 트럼프가 무엇을 했는지보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글을 읽으면 트럼프에 대한 말은 약간의 혐오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정책이나 성과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습니다. 트럼프는 하나의 캐릭터로 소비됩니다. 그의 행동은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것 역시 리버럴 문화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트럼프를 하나의 이야기 속 인물로 소비하는 방식은 개인의 심리와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버럴 문화와 잘 맞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배니티 페어는 정치인을 정책의 주체로 보기보다 하나의 이야기 속 인물로 바라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법안이 아니라 성격이고, 정책이 아니라 동기이며, 국가전략이 아니라 인간관계입니다. 정치는 하나의 심리 드라마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배니티 페어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를 정책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정치 뉴스를 볼 때 사람들은 관세 정책의 효과나 산업 경쟁력의 변화보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차기 주자인지, 어느 계파가 승리하는지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한국 정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기사를 읽어보면 정책 자체보다 친명계, 비명계, 친윤계, 비윤계 같은 계파 이야기가 훨씬 많이 등장합니다. 정치인은 정책의 집행자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가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정치를 소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을 이야기로만 소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소비 방식은 정치의 본질을 흐리며, 결국 우리가 정치인의 행동과 정책 결과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통계보다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정책보다 인물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언론 역시 복잡한 정책보다 이해하기 쉬운 서사를 제공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방식이 리버럴 문화와 비교적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리버럴 문화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내면, 심리, 정체성, 관계, 경험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장 자크 루소 이후 서구 지식인 문화에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고백을 통해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전통이 존재했습니다. 배니티 페어의 인물 기사 역시 이러한 문화적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을 볼 때도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떤 사람인가를 묻습니다. 어떤 정책을 추진했는가보다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딴지일보
한국의 딴지일보 역시 어느 정도 비슷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물론 배니티 페어와 딴지일보는 성격이 매우 다른 매체입니다. 그러나 정치인을 정책 행위자라기보다 하나의 캐릭터로 소비하고, 계파와 인간관계, 권력투쟁과 정치적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치는 하나의 드라마가 되고 정치인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과 정치인의 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배니티 페어는 트럼프를 매우 흥미로운 심리적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 NATO 방위비 압박, 국경 통제, 제조업 보호 정책은 그의 성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들은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Realism) 관점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가깝습니다. 현실주의는 국가가 결국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동맹은 영원하지 않고, 자유무역도 국가 이익을 해치면 수정될 수 있으며, 국제질서보다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현실주의는 규범주의적인 사고를 반대하고 현실을 그대로 보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인지적으로 취하기 어려운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는 규범적인 사회 모델을 만들고 그 모델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의 여러 정책이 이러한 현실주의의 기본 원칙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트럼프를 허영심 많은 인물로 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한 현실주의 정치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사람을 보고 있지만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클린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배니티 페어는 클린턴을 외롭고 인정욕구가 강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냉전 이후 미국 경제의 장기 호황을 이끈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 이 두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층위를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종종 후자가 사라지고 전자만 남는다는 점입니다. 정책과 성과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성격과 인간관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보도는 점점 인물 중심이 되고, 정치인은 점점 하나의 이야기 속 캐릭터가 됩니다.
배니티 페어는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치인을 평가하기보다 해석합니다. 정책을 분석하기보다 성격을 묘사합니다. 국가전략을 설명하기보다 인간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접근 방식의 위험은 단순히 매력적인 인물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책과 성과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치적 책임과 결과를 묻지 못하게 되고, 대중은 정치인을 서사 속 캐릭터로만 소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배니티 페어만의 특징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정치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정치인을 정책의 집합체로 기억하기보다, 하나의 이야기 속 인물로 기억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치 기사에서 누구 계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리버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윤핵관, 진박, 친명, 친윤 같은 계파 이야기는 리버럴 문화에서 정치인을 이야기로 소비하는 방식과 잘 맞습니다. 이런 방식은 정치인의 성격과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리버럴 문화의 전통과도 잘 맞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진실과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정치인을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