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상을 지키기 위해 진실은 어떻게 상대화되는가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은 단순한 불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성이 아니라 진실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국민과 가족과 참모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법적 증언 과정에서도 언어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며 책임을 피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과 진보 인사들은 클린턴을 끝까지 방어했습니다. 그들은 클린턴이 완전히 무고하다고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클린턴이 그들에게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이건 이후 보수 우위의 시대를 뚫고 민주당을 다시 백악관으로 가져온 인물이었습니다. 경제는 좋았고, 대중적 인기는 높았으며, 공화당 의회와 맞서 싸우는 민주당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클린턴 스캔들은 곧바로 성윤리 문제가 아니라 진영 방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질문은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이 문제로 공화당이 이기게 둘 것인가”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도덕 판단은 진영 판단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정직과 충실성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가
클린턴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일부 진보 인사들은 지나치게 높은 도덕 기준을 요구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정직과 부부간의 충실성을 요구하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도덕적 목표”라는 식의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어야 합니다. 정직과 충실성이 정말 그렇게 비현실적인 요구입니까. 거짓말하지 말라는 요구가 과도한 도덕주의입니까. 배우자에게 충실하라는 요구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기준입니까.
물론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욕망에 흔들리고, 실수하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과, 정직과 충실성의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준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클린턴 방어론은 위선적이었습니다. 평소 진보 진영은 권력자의 책임, 약자에 대한 감수성, 공적 윤리, 투명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자기 진영의 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에서 젊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이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때는 갑자기 “인간적 결함”, “사생활”, “정치적 공격”이라는 언어가 앞에 나왔습니다.
권력자의 윤리를 말하던 사람들이, 자기편 권력자의 윤리 문제 앞에서는 권력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불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거짓말이었습니다
클린턴 스캔들을 단순한 불륜 사건으로 축소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흐립니다. 불륜 자체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고, 법적 절차 속에서도 진실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클린턴 지지자들은 이 문제를 사생활 침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구나 사생활이 있다”, “성 문제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은 지나치다”, “공화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이 전면에 나왔습니다.
이 주장에는 일부 진실이 있습니다. 실제로 공화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보수 진영에도 위선은 있었습니다. 클린턴을 공격하던 일부 공화당 정치인들 역시 사생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위선적이라는 사실이 클린턴의 거짓말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공화당이 정치적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이 대통령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나쁘다는 이유로 우리 편의 거짓말이 작아진다면, 도덕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 무기가 됩니다.
우상 보호의 정치심리
민주당 지지자들이 클린턴을 방어한 가장 깊은 이유는 그가 자신들의 정치적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개인 숭배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성공, 문화적 승리, 보수주의에 대한 저항을 투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인물이 무너지면, 단순히 한 정치인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지자들은 자기 진영 전체가 패배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우상의 결함은 쉽게 인정되지 않습니다.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사소한 약점, 인간적 실수, 적의 공격에 의해 과장된 문제로 재해석됩니다.
이것이 우상 보호의 심리입니다. 지지자들은 우상이 완벽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 결함을 인정하는 순간, 상대 진영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클린턴 자신도 이런 논리를 사용했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면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나쁜 사람들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 거짓말을 공적 명분으로 바꾸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너지면 더 나쁜 사람들이 이깁니다. 그러므로 나의 거짓말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방어입니다.
이 논리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거의 모든 잘못이 정치적 필요로 정당화됩니다.
진보 정치의 도덕 언어와 현실
진보 정치는 자주 도덕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권력 남용을 막아야 한다, 여성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 투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클린턴 스캔들에서 이 도덕 언어는 흔들렸습니다. 상대가 보수 권력이 아니라 자기편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준은 갑자기 유연해졌습니다. 젊은 여성 인턴과의 권력 비대칭 문제는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고, 거짓말은 사생활 보호의 문제로 바뀌었으며, 위증 논란은 정치적 사냥의 결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위선입니다. 평소 권력과 성, 권력과 여성, 권력과 진실의 문제를 말하던 사람들이, 자기 진영의 권력자가 그 문제의 중심에 섰을 때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기준과 오늘날 기준은 다릅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관계는 단순한 불륜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보입니다.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사이에는 명백한 권력 비대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진보 진영이 중시하는 언어를 적용하면, 이 사건은 권력형 성적 부적절성의 문제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많은 진보 인사들은 그 언어를 클린턴에게 충분히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는 우리 편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수 진영과의 비교
당시 공화당 정치인 밥 리빙스턴은 자신의 혼외관계 문제가 드러나자 하원의장직을 포기하고 의회에서도 물러났습니다. 물론 그 역시 문제가 공개될 위기에 몰렸기 때문에 사임한 것이지, 순수한 도덕적 결단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징적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그는 클린턴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고, 자신도 같은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클린턴은 버텼습니다. 민주당 지지층도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개인의 성격 차이만이 아니라, 지지 집단의 반응 차이였습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적어도 성윤리 위반을 대놓고 “스트레스 해소”나 “인간적 복잡성”으로 적극 미화하는 언어는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반면 클린턴 주변에서는 그의 결함을 인간적 욕망, 복잡한 인격, 정치적 공격의 맥락 속에서 방어하는 언어가 나왔습니다.
물론 보수 진영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뉴트 깅리치처럼 클린턴 탄핵을 주도하던 인물도 사생활 문제에서 위선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는 보수 유권자들도 성 추문과 개인 윤리 문제에 대해 훨씬 더 관대해졌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보수는 깨끗하고 진보는 타락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면 안 됩니다. 더 정확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보수는 높은 도덕 기준을 내세우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위선에 빠집니다. 진보는 도덕적 목적을 내세우고 자기편의 잘못을 그 목적 안에서 상대화할 때 위선에 빠집니다.
클린턴 스캔들은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성윤리보다 진영 윤리가 앞설 때
클린턴 스캔들이 보여준 것은 진보 진영이 성적 일탈에 무조건 관대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민주당 정치인들도 성 추문으로 몰락한 사례가 많습니다. 존 에드워즈, 앤서니 위너, 엘리엇 스피처 같은 인물들은 성적 문제로 큰 정치적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렇다면 클린턴은 왜 달랐습니까. 그는 대체 가능한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이었고, 보수 공화당에 맞서는 상징이었으며,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투사한 인물이었습니다.
정치적 우상이 위기에 처하면 도덕적 판단은 달라집니다. 평소라면 비판했을 행동도 “맥락이 있다”고 말합니다. 평소라면 권력 남용이라고 했을 일도 “사생활”이라고 말합니다. 평소라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말도 “정치적 함정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영 윤리입니다. 진영 윤리는 보편적 기준보다 우리 편의 생존을 우선합니다. 그래서 진영 윤리 안에서는 정직도 상대화되고, 충실성도 상대화되고, 권력 비판도 상대화됩니다.
결론: 위선은 기준이 무너질 때 드러납니다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은 진보 정치의 위선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 위선은 단순히 불륜에 관대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위선은 평소 자신들이 강조하던 권력 비판, 여성의 존엄, 진실, 투명성의 기준을 자기편 대통령에게는 느슨하게 적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클린턴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사건의 의미를 바꾸었습니다. 불륜은 인간적 욕망이 되었고, 거짓말은 정치적 방어가 되었으며, 권력 비대칭은 사생활 문제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리고 클린턴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도덕주의자, 위선자, 정치적 사냥꾼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물론 공화당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보수 정치인들도 위선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클린턴 방어론의 위선을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위선은 상대가 나쁘다는 사실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위선은 자기편에게 기준을 달리 적용할 때 드러납니다.
클린턴 스캔들의 본질은 성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본질은, 정치적 우상을 지키기 위해 진실과 도덕 기준이 얼마나 쉽게 재구성되는가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미국 정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 모두 자기편의 결함을 방어하기 위해 비슷한 논리를 사용합니다. 상대가 더 나쁘다. 지금은 싸움이 더 중요하다. 우리 편이 무너지면 안 된다. 사소한 약점에 매달리면 큰 대의를 잃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정치의 도덕 기준은 무너집니다.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 진영의 도구가 됩니다.
클린턴 스캔들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편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진실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