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스모크》: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영화 《스모크》를 통해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인물들이 지닌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질량을 들여다보며, 타인의 가죽을 입는 악 대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화해의 윤리를 모색합니다.

《스모크》: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양들의 침묵》이 타인의 피부를 훔쳐 자신을 만들려는 영화였다면, 《스모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도 삶을 살아가는 영화입니다. 하나는 정체성이 껍데기로 무너질 때 생기는 공포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삶이 불완전해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무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스모크》는 1995년 웨인 왕이 연출하고 폴 오스터가 각본을 쓴 영화입니다. 브루클린의 작은 담배 가게를 중심으로 오기 렌, 폴 벤저민, 래시드, 사이러스, 루비, 펠리시티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이어집니다. 이 영화에는 거창한 사건이 없습니다. 세계를 바꾸는 혁명도 없고, 완전한 구원도 없고, 모든 상처를 해결하는 결말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담배를 사고, 농담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빌리고, 상처를 감추고,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면서도 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연기에도 무게가 있다

《스모크》의 첫 장면은 압도적입니다. 폴 벤저민은 담배 연기의 무게를 어떻게 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월터 롤리가 시가의 무게를 재고, 그것을 피운 뒤 남은 재의 무게를 다시 재어 그 차이를 연기의 무게로 계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영화 해설에서도 이 장면을 《스모크》의 핵심 은유로 설명합니다. 연기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미세한 입자로 존재하고, 아주 작은 질량을 가집니다.

이 은유는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연기를 가볍다고 생각합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곧 흩어지고, 바람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볍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기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 뿐, 질량을 가집니다.

영화 속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브루클린의 담배 가게를 오가는 사람들은 거대한 역사나 이념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상처 입고, 거짓말하고, 실수하고, 농담으로 하루를 넘기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가볍습니다. 사회의 중심에서 보면 주변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질량이 있습니다.

그 질량은 거창한 이념이 아닙니다. 기억, 죄책감, 미안함, 농담, 습관, 사진 한 장, 이야기 하나입니다. 《스모크》는 바로 그 작은 질량을 알아보는 영화입니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잃은 사람들

《스모크》의 인물들은 추상적인 다문화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몸과 삶에 구체적인 상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다인종 공동체는 장식적 다양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폴 벤저민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는 작가이고, 지적이며, 가장 WASP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될 때 그는 무력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있고, 글을 쓰지 못하며, 자기 슬픔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교양을 가졌지만 세계와의 접촉을 잃은 사람입니다.

오기 렌은 가벼운 농담과 허풍 속에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같은 거리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구도를 반복합니다. 별것 아닌 습관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의식입니다. 그는 연기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사진으로 붙잡습니다. 그 사진들은 별것 아닌 거리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사라진 사람들의 무게를 보존합니다.

래시드는 본명 토머스 제퍼슨 콜입니다. 그는 이름을 숨기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단순한 장난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잃어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찾으려 합니다. 영화 해설들은 래시드를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사라진 “lost child”로 설명합니다.

사이러스 역시 결손의 인물입니다. 그는 래시드의 아버지입니다.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자신의 한쪽 팔도 잃었습니다. 그의 의수는 단순한 신체 장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책감의 물질적 흔적입니다. 영화 줄거리 자료에서도 사이러스는 음주운전 사고로 아내가 죽었고, 그 결과 한쪽 팔을 잃어 의수를 하게 된 인물로 설명됩니다.

루비 맥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잃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오기의 과거에서 갑자기 나타나 펠리시티라는 젊은 여자의 문제를 들고 오는데, 펠리시티는 임신했고, 약물 문제를 안고 있으며, 삶의 가장 불안정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영화 해설들은 펠리시티를 임신한 약물중독자로, 루비를 한쪽 눈이 없는 인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폴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루비는 눈을 잃었습니다.
사이러스는 팔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래시드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펠리시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품고 있지만, 자기 삶조차 제대로 지탱하지 못합니다.
오기는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 시간은 매일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모크》는 이 결손을 원한의 정치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이들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불완전하게 부딪히고, 거짓말하고, 농담하고, 돈을 주고받고, 도망치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의 선량함은 깨끗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결손을 안고도 완전히 악해지지 않는 데서 나옵니다.

WASP는 무력하지만 다시 듣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WASP적인 인물은 윌리엄 허트가 연기한 폴 벤저민입니다. 그는 백인 지식인이고, 작가이며, 말과 문장의 세계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력한 사람입니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글을 쓰지 못하고, 삶의 현장으로부터 물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를 조롱하거나 폐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모크》는 낡은 WASP적 인물을 악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폴은 무력하지만 악하지 않습니다. 그는 상처 입고, 닫혀 있고, 세상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는 브루클린의 다인종적 삶입니다. 래시드, 오기, 사이러스, 루비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세계와 다릅니다. 그들은 거칠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폴은 그들을 통해 다시 타인의 삶을 듣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모크》의 화해입니다.

WASP가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인 지식인이 다시 세계를 설명하고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통해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의 회복은 권력의 회복이 아니라 서사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폴이 건져 올린 서사란 좌파 지식인들이 기획한 거창한 이념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 관습적 성실함, 가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몸부림, 죄책감을 짊어지는 개인적 책임감처럼 이웃들이 묵묵히 몸으로 살아내던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수적인 삶의 질량이었습니다. 지식인의 창작은 이 실체적인 도덕적 삶의 실재를 경청하는 데서 비로소 다시 시작됩니다.

과거의 지식인은 타인을 해석하고 분류하고 설명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모크》의 폴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는 더 이상 세계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다만 듣습니다. 그리고 듣는 동안 다시 살아납니다.

다인종 공동체의 불완전한 선량함

《스모크》의 다인종 인물들은 모두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완전하지만 대체로 선량합니다. 거짓말을 하지만 완전히 악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주지만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습니다. 자기 삶을 정당화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점에서 《스모크》는 단순한 다문화 찬가가 아닙니다. 영화는 “모든 인종은 아름답다”는 식의 깨끗한 구호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입니다.

모든 사람은 조금씩 부족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조금씩 좋은 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거친 농담도 나오고, 불편한 말도 오갑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조심스럽지 않은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즉시 도덕재판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농담은 때로 거칠고, 관계는 삐걱거리지만, 그 안에는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감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정체성 정치와 다릅니다. 현대의 정체성 정치는 종종 언어의 순도를 도덕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모크》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그렇게 깨끗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실수를 하고, 거친 농담을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함께 살 수 없는가.
아니면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영화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선량함은 깨끗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찌든 사람, 말이 투박한 사람, 과거가 복잡한 사람에게도 작은 선의의 질량은 남아 있습니다.

중국인이 나오지 않는 중국적 영화

《스모크》에는 감독인 웨인 왕의 사유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웨인 왕은 '왕잉(王穎)'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웨인 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중국인들이 중국식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당혹해했다고 합니다. 그 역시 미국과 중국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회색지대에 살았으며, 그는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에 사는 중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 고민의 최종 결론이 《스모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중국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Chan Is Missing》(1982)에서 시작해서 《스모크》에서 결론을 내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양들의 침묵》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공포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면, 타인은 나의 재료가 됩니다. 버팔로 빌은 타인의 피부를 입으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가짜 변태였습니다. 내부의 성숙이 아니라 외부의 약탈이었습니다.

《스모크》는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타인의 피부를 훔치지 않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타인을 기호나 재료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작은 질량을 인정합니다.

연기는 가볍습니다. 그러나 무게가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가벼워 보이는 사람에게도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스모크》는 화해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화해의 영화는 아닙니다. 모든 상처가 치료되고, 모든 죄가 용서되고, 모든 관계가 깨끗하게 회복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화해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다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것.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거친 농담과 실수 속에서도 상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래도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

이것이 《스모크》의 윤리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완전한 순수함도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작고 불완전한 선의, 이야기, 습관, 기억, 그리고 서로의 무게를 인정하려는 태도입니다.

《양들의 침묵》이 타인의 피부를 입으려는 악의 영화라면, 《스모크》는 타인의 삶의 무게를 인정하는 화해의 영화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모른다고 해서 서로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삶 속에서도, 사람은 작은 질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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