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공화국 헌법은 민주주의의 퇴보였을 수 있습니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은 일반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진전으로 평가됩니다.
대통령 간선제를 폐지하고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했으며,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이 평가는 틀리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게 했다는 점에서 제6공화국 헌법은 분명 민주주의의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단순히 정기적으로 투표하는 제도가 아니라, 국민이 권력을 선택하고 통제하며 국가기관의 충돌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제도라고 본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국민에게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가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어느 쪽이 국민의 신임을 잃었는지 다시 판단할 권리는 주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없앴지만 국회의 권력 남용을 견제할 대체 장치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소추하여 즉시 권한을 정지시킬 수 있지만,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아무런 제도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지만, 그 판단에 대해 국민의 재신임을 받지 않습니다.
국회는 책임을 헌법재판소에 넘길 수 있고, 헌법재판관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됩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임기를 잃을 수 있지만, 그 결정을 추진하고 내린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반드시 국민 앞에서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6공화국 헌법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은 여러 기관에 분산되었지만 책임도 함께 분산되었고, 결국에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왜 이런 구조의 헌법이 만들어졌나?
지나고 보면 이런 헌법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 헌법을 만들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지역을 장악하기 있었기 때문에 설사 대선에서 진다고 해도 국회의원으로, 정당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그 세력을 유지하는 데 최적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한 것에 대해서만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같은 방식으로 국민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국회의원도 국민 전체의 대표입니다.
헌법 제46조 제2항은 국회의원이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합니다. 이는 국회의원이 자신을 선출한 지역구 주민이나 소속 정당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자유위임의 원칙입니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법적으로 지역 주민만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은 국회의원에게 부과된 헌법적 의무입니다. 개별 국회의원이 국민 전체로부터 직접 선택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선출됩니다. 전국의 모든 유권자가 동일한 후보들을 놓고 투표합니다.
대통령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유일한 단일 대표입니다.
반면 지역구 국회의원은 특정 선거구에서 선출됩니다.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을 부산이나 광주의 유권자가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당선자가 그 지역 유권자의 과반수 지지를 받지 않고도 선출될 수 있습니다. 세 후보가 각각 40%, 35%, 25%를 얻었다면 40%를 얻은 후보가 지역구 전체를 대표하게 됩니다.
그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는 오히려 60%입니다.
따라서 대통령과 개별 국회의원의 민주적 정당성이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은 전국의 국민이 동일한 후보 가운데 직접 선택한 단일 대표입니다. 국회의원은 지역별로 분절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합의체의 구성원입니다.
국회의 국민대표성은 어느 한 국회의원이나 어느 한 정당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과 정치적 견해를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회 안에서 토론하고 타협하여 공적인 결론을 만들 때 비로소 국회 전체의 대표성이 성립합니다.
국회 다수당이 곧 국민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회 다수당은 국민 전체가 아닙니다
특정 정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했다고 해서 그 정당의 판단이 곧 국민 전체의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전국 득표율과 의석 비율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두 정당의 득표율 차이가 크지 않아도 지역별 표의 분포에 따라 의석수에는 큰 격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전국 유권자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다수당은 일정 기간 국회의 의결권을 위임받은 정치세력입니다.
국민 전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특히 양당이 극단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는 “국회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말을 더욱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국회의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한쪽을 지지하고 나머지 절반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한두 석 더 많은 다수당의 결정을 국민 전체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입니다.
국회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려면 서로 다른 국민의 의사를 국회 안에서 통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당이 상대방을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표결이 당론에 따라 기계적으로 갈라진다면 국회의 통합 기능은 사라집니다.
이때 국회는 국민 전체의 대표기관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두 정치기계가 의석수를 놓고 싸우는 장소에 가까워집니다.
형식적으로 적법한 다수결과 실질적인 국민대표성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소선거구제는 지역정당과 기계정치를 강화합니다
소선거구제는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장기 독점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느 지역에서 한 정당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지면 본선보다 공천이 중요해집니다. 유권자가 누구를 선택하는가보다 우세 정당이 누구를 후보로 지명하는가가 선거 결과를 사실상 결정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정치인이 지역 주민 전체보다 공천권을 가진 정당 지도부에 더 민감해집니다.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지역위원회, 지역단체가 하나의 정당을 중심으로 연결되면 지역의 정치기계가 형성됩니다.
정치기계는 단순한 선거운동 조직이 아닙니다.
공천, 예산, 민원, 인사, 보조금, 지역단체와의 관계를 통해 지지를 관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재생산하는 조직입니다.
한두 번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정치기계를 구성하는 사람과 조직은 남습니다. 다음 선거에서 다시 후보를 내고 기존 인맥과 지지층을 동원합니다.
특정 지역에서 한 정당의 공천이 사실상 당선을 의미하면 국회의원은 헌법상 자유위임을 받은 국민대표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정당에 종속됩니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국가이익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라고 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공천과 당론이 의원의 정치생명을 좌우합니다.
헌법상으로는 자유위임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에 대한 사실상의 구속위임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원들이 정당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표결한 뒤 자신들의 결정을 “국민의 뜻”이라고 선언한다면 국민대표라는 개념은 뒤집혀 사용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은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자신이나 소속 정당을 국민 전체와 동일시할 권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만 위험을 부담하게 했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대통령은 5년 단임이므로 재선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다시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국회가 정부의 법률안과 예산을 반복적으로 막아도 국회를 해산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과 국회가 장기간 충돌하여 국정이 마비되더라도 대통령은 국민에게 다시 판단을 물을 헌법적 수단이 없습니다.
반면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소추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면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 전부터 대통령의 권한 행사는 정지됩니다.
국민이 전국 단위 선거에서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국회가 즉시 직무에서 배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가 무리한 탄핵을 추진했거나 탄핵 사유가 인정되지 않아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더라도 국회는 해산되지 않습니다.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의 임기가 종료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은 탄핵의 위험을 부담하지만 국회는 탄핵 실패의 위험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임기를 걸 수 있지만 자신의 임기를 걸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권력분립이라기보다 책임의 비대칭에 가깝습니다.
국회의원은 책임을 헌법재판소에 넘길 수 있습니다
현행 탄핵제도의 더 큰 문제는 국회의원이 자신의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국회의원은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파면한 것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탄핵소추는 단순한 수사의뢰나 재판 청구가 아닙니다.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의결하는 순간 대통령의 권한 행사는 정지됩니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오기 전부터 대통령은 직무에서 배제되고 국정 운영은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됩니다.
국회의 결정만으로 이미 중대한 정치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탄핵이 인용되면 국회의원은 자신들이 헌법을 수호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 탄핵이 기각되면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내렸다며 책임을 피할 수 있습니다.
탄핵에 성공하면 대통령이 책임집니다.
탄핵에 실패하면 헌법재판소가 기각한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이 자동으로 국민의 재신임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조에서는 국회의원이 자신의 판단에 모든 정치적 위험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뒤 최종 판단과 책임은 헌법재판소에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정이 마비되고 사회적 갈등이 커지더라도 국회의원은 남은 임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 탄핵권은 매우 강력하지만 그 권한의 오판에 대응하는 제도적 책임은 거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도 국민에게 책임지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책임을 넘긴다고 해서 그 책임이 헌법재판소에서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헌법재판소는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을 파면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회 다수파가 단순한 정치적 이유만으로 대통령을 파면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법률적 심사 절차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실제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는지 판단하는 기관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습니다.
재판관은 정해진 임기 동안 재직하며, 대통령을 파면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판단에 대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재신임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결정 이후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면 됩니다.
훗날 그 결정이 법리적으로 잘못되었거나 국가에 심각한 장기적 피해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재판관이 국민 앞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절차는 없습니다.
물론 법관과 재판관은 선거와 여론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합니다.
판사가 인기투표를 의식하여 판결한다면 사법제도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법적 독립과 제도적 무책임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가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를 끝낼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다면, 그 권한의 범위와 판단 기준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현행 제도에서는 국회의원은 “최종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했다”고 말할 수 있고,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판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회도 해산되지 않고 헌법재판관도 국민의 재신임을 받지 않습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만 임기를 잃고, 그 결정을 추진하고 내린 사람들은 누구도 반드시 국민 앞에서 직접 책임지지 않습니다.
국회는 결정을 헌법재판소에 넘기고, 헌법재판관은 임기가 끝나면 물러납니다. 그러나 중단된 대통령의 임기와 흔들린 국가 운영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책임은 국회에서 헌법재판소로 이동하지만, 헌법재판소에 도착한 뒤에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현행 탄핵제도의 핵심적인 책임 공백입니다.
헌법재판관의 판단은 오류가 없는가
헌법재판관이 법률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객관적이고 일관되며 오류가 없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대니얼 카너먼, 올리비에 시보니, 캐스 선스타인의 《노이즈》가 설명하는 것처럼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안을 판단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판단의 변동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같은 사실과 같은 법률을 적용하더라도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재판관은 국가질서와 대통령의 통치 권한을 더 중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재판관은 국회의 통제권이나 기본권 보호를 더 중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위반행위도 어떤 재판관은 파면할 만큼 중대하다고 보고, 다른 재판관은 정치적 책임은 있더라도 국민이 부여한 임기를 박탈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 탄핵은 일반적인 형사재판보다 판단 기준이 추상적입니다.
대통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는지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반이 대통령을 임기 중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지도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대성’은 수학 공식처럼 계산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재판관의 헌법관, 국가관, 정치적 경험, 위험 인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 수천만 명이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가 이러한 평가적 판단을 포함한 재판관 6명의 찬성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법에 따른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법률 전문가는 일반인보다 법률을 더 잘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성이 판단의 무오류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집단판단이라고 해서 노이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재판소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므로 판단 오류가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독립적인 판단을 종합하면 실제로 오류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조건은 판단의 독립성입니다.
각 재판관이 먼저 독립적으로 사건을 검토하고 결론을 내린 뒤 의견을 비교한다면 집단지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함께 토론하며 몇몇 영향력 있는 재판관이 논의의 틀을 설정하면 개인의 독립적인 판단과 정보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몇 사람이 먼저 강한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이 그 의견에 영향을 받는다면,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판단의 신뢰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재판관들이 어떻게 의견을 형성하고 조정하는지도 따라서 중요합니다.
각자가 독립적으로 판단한 뒤 합의하는 것과, 몇몇 재판관이 사건의 해석 틀을 먼저 만들고 나머지를 설득하는 것은 같은 절차가 아닙니다.
특히 대통령 탄핵처럼 사회 전체가 극단적으로 양분된 사건에서는 재판관들도 사회적 압력과 집단역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정 탄핵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미리 단정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어떤 재판기관도 인간 판단의 편향과 노이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제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법률 판단과 정치적 판단을 구분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가 해야 할 일은 대통령에게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었는지 심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반이 국민이 부여한 임기를 즉시 박탈할 정도로 중대한지,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위임을 철회해야 하는지는 순수한 법률문제만은 아닙니다.
대통령 탄핵에는 법률 판단과 정치적 정당성 판단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판단을 구분하는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헌법·법률 위반 여부와 그 법적 중대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부여한 대통령의 정치적 위임을 최종적으로 철회할 것인지는 국민투표나 조기 대통령선거를 통해 국민이 다시 판단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소가 중대한 위헌·위법 사실을 인정하면 즉시 파면하는 대신 대통령선거를 다시 실시하도록 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남은 임기를 걸고 다시 국민의 신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국민이 다시 대통령을 선택한다면 정치적 위임은 유지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한다면 기존 대통령은 물러나게 됩니다.
적어도 현재처럼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하고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하면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가 곧바로 끝나는 구조는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을 선출한 사람이 국민이라면 대통령의 임기를 끝내는 절차에서도 국민이 완전히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회해산권은 대통령의 특권이 아닙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국회해산권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권한이 남용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권한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충분한 해답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권한만 남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권한도 남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폐지했지만 국회가 무책임하게 행동할 가능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과 국회가 정면으로 충돌하여 국정이 마비되더라도 이를 해결할 헌법적 수단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없습니다.
국회는 스스로 해산하지 않습니다.
국민은 임기 도중 국회의 재신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국민이 선출한 두 국가기관이 충돌하는데 정작 국민은 그 충돌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정한 조건 아래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다만 과거처럼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국회해산권을 행사하는 대통령도 자신의 지위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동시에 실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회가 국민의 신임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국회해산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대통령도 같은 선거에서 국민의 재신임을 받아야 합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다시 선택하고 국회 다수당을 바꾼다면 대통령의 주장이 인정된 것입니다.
반대로 대통령을 교체하고 기존 국회 다수파를 유지한다면 대통령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국회해산권은 대통령이 국회를 처벌하는 권한이 아닙니다.
대통령과 국회 가운데 어느 쪽이 국민의 신임을 잃었는지를 국민에게 다시 묻는 장치입니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의회가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총리 역시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국민에게 판단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의회는 정부를 무너뜨릴 권한을 갖는 대신 자신도 해산될 위험을 부담합니다.
반면 한국의 제6공화국 체제에서는 국회가 대통령을 무력화할 수 있지만 국회 자신은 해산의 위험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권한은 강하지만 책임은 약한 구조입니다.
탄핵이 기각되면 국회도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중대한 판단을 내렸다면 그 판단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을 때 국회 역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될 경우 국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국회가 대통령의 임기를 걸었다면 국회도 자신의 임기를 걸어야 합니다.
탄핵을 가볍게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탄핵을 정말 중대한 헌법적 수단으로 만들자는 뜻입니다.
국회의원들이 탄핵을 추진할 때에는 자신들의 판단이 기각될 경우 자신들도 국민의 재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탄핵이 단순한 정당 간 공격 수단이나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탄핵소추권을 행사하는 국회가 아무런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다면 탄핵의 문턱은 의석수로만 결정됩니다.
그러나 국회도 임기를 걸어야 한다면 의원들은 법률 위반의 존재, 위반의 중대성, 국민적 동의와 국가적 비용을 더욱 신중하게 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권한과 책임은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책임 없는 권력을 만들었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 독재를 막기 위해 대통령의 권력을 크게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국회 다수파와 정당이 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에는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지만 국회를 해산할 수 없습니다. 국회가 법률안과 예산을 막고 국정을 마비시켜도 임기 중 다시 국민의 판단을 받게 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소추하여 즉시 권한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국회는 해산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은 탄핵의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킨 후 최종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내렸다고 책임을 넘길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관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은 임기직입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파면하더라도 그 결정에 대해 국민의 재신임을 받지 않습니다.
국회는 헌법재판소 뒤에 숨을 수 있고, 헌법재판관은 임기가 끝나면 물러날 수 있습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만 임기를 잃고, 그 결정을 추진하고 내린 사람들은 누구도 반드시 국민 앞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국민은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지만 대통령과 국회의 충돌을 다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국민에게 선출권은 주었지만 재선택권은 주지 않은 것입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진전인 동시에 퇴보였습니다
1987년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분명 민주주의의 진전이었으나, 민주주의를 국민이 대통령을 한 번 선출하는 절차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국민이 권력기관의 충돌을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도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탄핵처럼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을 내린 국회의원은 최종 판단을 헌법재판소에 넘긴 뒤 안전하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기관일 뿐 오류가 없는 초월적 기관이 아닙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임기를 끝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한을 가지면서도, 그 판단에 대해 아무런 민주적 확인 절차가 없다면 국민주권의 원칙과 충돌합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독재를 막는 데 집중했지만 국회의 무책임과 정당의 기계정치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지역별 소선거구제는 정당의 지역 독점을 강화했고, 국회의원은 국민 전체보다 공천권과 당론에 종속되었습니다.
양당이 극단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도 국회 다수당은 자신의 결정을 국민 전체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6공화국 헌법은 형식적 선거 민주주의에서는 진전이었지만, 책임 민주주의와 실질적 국민주권에서는 퇴보였을 수 있습니다.
다음 헌법은 국민에게 최종 결정권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음 헌법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 충돌을 국민이 다시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대통령에게 일정한 조건 아래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되, 국회를 해산한 대통령 역시 동시에 재신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함께 실시하는 방식이 가장 명확합니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권을 유지한다면 탄핵이 기각될 경우 국회도 해산되어야 합니다.
국회가 대통령의 임기를 걸었다면 국회 역시 자신의 임기를 걸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헌법·법률 위반을 심사하는 기관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국민이 부여한 대통령의 정치적 위임을 최종적으로 철회하는 판단까지 소수 재판관에게 전적으로 맡길 것인지는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가 위헌·위법과 그 중대성을 판단한 뒤, 최종적인 임기 박탈 여부는 국민투표나 조기 대통령선거를 통해 국민이 확인하도록 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선거구제와 지역정당의 결합도 완화해야 합니다.
특정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 되는 구조를 줄이고, 국회의원이 정당 지도부가 아니라 국민 전체를 의식하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합니다.
핵심 원리는 간단합니다.
대통령도 국민보다 위에 있지 않으며, 국회도 국민 그 자체가 아닙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오류가 없는 초월적 기관이 아닙니다.
모든 국가기관은 국민에게서 잠시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입니다.
대통령과 국회가 충돌하면 국민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에 실패하면 국회도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판단 역시 인간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법률 판단과 국민의 정치적 판단을 구분해야 합니다.
1987년 헌법은 국민에게 대통령을 선택할 권리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헌법은 국민에게 대통령과 국회, 헌법재판소 사이의 충돌을 최종적으로 해결할 권리까지 돌려주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4년이나 5년에 한 번 투표하고 물러나는 제도가 아닙니다.
국가기관들이 충돌하고 실패했을 때 최종적인 판단을 다시 국민에게 돌려주는 제도입니다.